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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2-21 13:49:28

앨프리드 플레전턴

<colbgcolor=#003458><colcolor=#fff> 미합중국 제6대 국세청장
앨프리드 플레전턴
Alfred Pleasonton
파일:1000148625.jpg
출생 1824년 6월 7일
워싱턴 D.C.
사망 1897년 2월 17일 (향년 72세)
워싱턴 D.C.
학력 육군사관학교
복무 미국 육군
복무 기간 1844년 ~ 1868년
최종 계급 소장
참전 미국-멕시코 전쟁
남북전쟁
묘소 미국 의회 국립묘지

1. 개요2. 생애3. 여담

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워싱턴 DC에서 스티븐 플레전턴의 아들로 태어났다. 1844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병 소위로 임관했다. 제1기병연대에 배치되었고 1년 뒤 제2용기병연대로 배치되어 멕시코 전쟁에 참가했다. 재커리 테일러 휘하에서 팔로알토, 레사카데라팔마 전투 당시 기병 돌격으로 공을 세워 중위로 진급했다. 전후 연대부관으로 있었고 1855년 대위로 진급했다.

1861년 유타준주로 이동했고 국무부 공무원으로 미영전쟁 당시 국립기록보관소를 지킨 아버지의 후광을 받지 못해 진급이 되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소령으로 진급했다. 포토맥군에 속해 반도 전역에 참가했으나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1862년 준장으로 진급해 포토맥군 기병여단장이 되었으며 얼마 안 가 사단장으로 영전했다. 메릴랜드 전역 당시 정찰임무를 수행했으나 남군의 병력이 많다고 오판했다.[1]

앤티텀 전투에서 포탄으로 오른쪽 귀 부상을 입었으며 챈슬러스빌 전투 당시 스톤월 잭슨의 군단을 일시적으로 저지해 아군의 전멸을 막았다. 당시 포토맥군 사령관 조셉 후커는 플레전턴의 활약을 보고했으나 실제론 과장되었다. 이 공으로 소장으로 진급했으며 조지 스톤맨의 후임으로 기병군단장으로 임명되어 브랜디역 전투에서 기병전을 치렀다. 남북전쟁 최대의 기병전에서 전술적으로 패배했으나 남군 기병대들과 대등하게 싸웠고 남군기병대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게티즈버그 전투 당시 기병군단장이였으나 조지 미드 휘하의 참모처럼 있었고 일선지휘를 하진 않았다. 조지 피켓의 돌격을 저지하고 역공세를 펼쳐야한다고 주장했고 제3사단장 휴 저드슨 킬패트릭에게 남부군 우익 공격을 명령했다. 비록 1개 여단이 전멸하고 여단장 엘론 J. 판스워스가 전사했으나 나머지 제대는 우익을 돌파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전투이후 미시시피 전선으로 이동해 미주리 전역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1894년 말에서 이동중 낙상사고를 당했다. 이 시기 남군 포로에 대해 가석방했다. 전후 소령으로 환원했고 전쟁 당시 지휘체계와 전후 지휘체계에 혼란을 겪었으며 보병으로 전환을 권유했으나 거부하고 1868년 제대했다. 제대 후 국세청장으로 부임했으나 소득세 폐지에 대해 재무부와 갈등을 빚으며 자진 사임을 요구받았으나 거부하고 결국 해임되었다. 1897년 사망했다.

3. 여담



[1] 실제로는 북군이 2배 더 많았다. 당시 포토맥군 사령관 조지 매클렐런핑커튼 요원들을 고용해 정찰을 시켰는데 이들 역시 남군이 병력이 많다고 오판을 저질렀고 사령관에서 해임되기 전까지 그렇게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