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롬비아 공화국 대통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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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 공화국 제31대 대통령 {{{+1''' | |
이름 | <colbgcolor=#FFFFFF,#191919>Álvaro Uribe Vélez 알바로 우리베 벨레스 |
출생일 | 1952년 6월 4일 ([age(1952-06-04)]세) |
출생지 | 콜롬비아 메데인 |
국적 | [[콜롬비아| ]][[틀:국기| ]][[틀:국기| ]] |
정당 | [[민주중도당| 민주중도당 ]] |
재임기간 | 2002년 8월 7일 ~ 2006년 8월 7일 2006년 8월 7일 ~ 2010년 8월 7일 |
서명 |
[Clearfix]
1. 개요
콜롬비아의 제31대 대통령을 지낸 정치인. 한때는 자유당 소속이었지만, 무소속으로 대선에 출마해 당선되어 그간 자유당과 보수당의 양당제를 무너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1] 현재는 민주중도당 소속.지지자들은 그를 콜롬비아의 마크롱이라고 부르기도 하나, 소속된 민주중도당이란 이름과 달리 성향은 우파 포퓰리즘과 극단적인 사회보수주의를 띄기 때문에 안티들에겐 '원조 보우소나루'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2. 생애
메데인에서 지주인 알베르토 우리베의 아들로 태어났다. 밑으로 동생이 4명이나 있으며, 우리베는 집안에서도 맏이다.1970년 호르헤 로블레도 고등학교(Colegio Jorge Robledo)를 졸업했는데, 학창 시절 워낙 공부를 잘했는지, 마지막 2학년은 기말고사를 면제 받았을 정도. 이후 안티오키아 대학교에 입학해 법학을 전공했다.
3. 정치 활동
1977년 알폰소 로페스 미첼센 대통령의 도움으로 노동부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1년 간 사무총장을 지냈다. 이 시절 미첼센 대통령이 소속되어 있던 자유당에 입당했다. 1980년 같은 당 출신의 후임 대통령인 훌리오 세사르 투르바이가 그를 민간항공 총책임자로 지명했지만, 메데진 시장 출마를 위해 조기 사퇴했다. 이후 메데진 시장에 취임했지만, 2개월 만에 그만 두었다.이 때만 해도 그가 정치인임은 맞았지만, 딱히 한 것은 없었다. 그러던 1983년 그의 아버지가 게릴라에 납치·살해되었는데, 이는 우리베를 유력 정치인으로 띄우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힘업어 1986년 안티오키아의 상원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며, 1990년 재선해 1994년까지 재직했다.
1995년 안티오키아의 주지사로 선출되어 2년을 재직했다. 비록 2년이라는 짧은 세월이었지만, 그 세월 동안 많은 족적을 남기면서 우리베는 단숨에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했다. 대표적으로 권위주의적인 적폐를 청산하고 적극적인 소통 정치를 펼쳤는데, 이는 시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었다. 또한 일명 콘비비르(CONVIVIR)라는 치안 서비스를 도입해 당시 반군들의 공격 등 각종 위협에 시달리던 안티오키아 주를 안정화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들이 오히려 포퓰리즘으로 흘러간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실제로 후에 대통령이 되었을 때 일부 포퓰리즘적인 면모를 보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콘비비르 제도 또한 상당한 논란이 있었는데, 비슷한 시기 다바오 시장을 지낸 로드리고 두테르테[2]가 운영했던 자경단 비스무리한 제도로 당시 주민들의 호평을 받았지만, 동시에 무고한 시민들을 암살하는 도구로 악용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4. 2002년 대통령 선거
하지만 이러한 비판이 무색하게, 우리베는 단숨에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했으며, 안그래도 삼페르 정권의 스캔들로 위기에 처한 자유당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으로 떠올랐다.그러나 우리베의 여러 행보들은 자유당의 당론과는 나름 거리가 있었고, 비슷한 시기 1998년 대선에 출마했다가 보수당의 안드레스 파스트라나에 밀려 낙선한 오라시오 세르파가 일찌감치 출마를 준비하고 있었다. 지지율 상으로는 우리베가 앞섰지만, 당 내에서는 세르파를 밀어주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갈등은 극으로 치닫는다.
결국 우리베는 대선을 1년 쯤 앞두고 자유당을 전격 탈당했으며, 콜롬비아 제일이라는 정치 조직을 결성했다. 형식적으로는 "분당"을 선언했지만, 아직 정당은 아니었기에 엄연히 틀린 표현이다. 그렇지만 정당으로 분류하는 경우도 두루두루 보인다.
그렇게 해서 우리베는 자유당의 후보로 선출된 세르파와 맞붙게 되었다. 여당이었던 보수당은 인물난으로 후보를 찾지 못해 대선에 도전하지 못했지만, 대신에 우리베를 지지해 사실상 여당 후보로 간주되었다. 이후 1차에서 53%를 득표해 결선 없이 바로 콜롬비아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동시에 이는 자유당-보수당의 양당제가 붕괴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기도 하였다.
5. 대통령
비록 그가 자유당 출신이라지만, 무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지긋지긋한" 양당제를 타파한 인물로 주목 받았다. 동시에 FARC 등 반군에 맞서는 지도자임을 강조했는데, 안그래도 부친이 반군에 의해 살해된 경력이 재조명되면서 초반기에는 무려 7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각종 논란이 있었지만, 우리베는 주지사 시절에도 이끌어낸 치안 안정화를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그대로 이행했으며, 이를 통해 FARC의 세력을 크게 축소시킬소 있었으며 마약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치안이 아주 좋아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범죄율이 어느 정도 낮아지기는 했다. 그간 반군들의 위협으로 대선 후보가 암살당하거나, 혹은 납치되는 경우[3]가 있었으며, 민간 또한 다르지 않았지만, 이러한 일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보가 오히려 포퓰리즘으로 변질되었다. 우선 치안안정화 및 원자재 값 상승에 따른 경제호황으로 지지율이 60~70%대를 넘나들자 개헌을 통해 그간 단임제였던 대통령 임기를 중임제로 개정했으며, 이에 따라 2006년 야당후보를 압도적인 차이로 따돌리고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두 번째 임기 초반부터 일명 "위정 스캔들"이 터져 위기를 겪기도 했고, 이어 2009년에는 야권인사와 주요언론인들을 상대로 도청 의혹이 불거져 숱한 비판에 직면하게 되었다.
게다가 언론 탄압 논란도 불거졌는데, 국경 없는 기자회의 조사에 따르면 2002년 114위였던 콜롬비아의 언론자유지수가 2010년에는 145위까지 떨어졌다. 거기에다가 치안안정화 과정에서 적지 않은 민간인을 학살한 의혹 및 재정을 횡령한 혐의도 가지고 있으며, 2005년과 2006년 당시에 콜롬비아 방위대 인사들을 사면해주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마약 카르텔로 흡수되어서 현재까지도 콜롬비아를 좀 먹고 있는 존재가 되었다.
허나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권력욕이 끝이 없었는지, 추가적인 개헌을 통해 3선을 시도했다. 이 또한 지금까지도 비판을 받고 있는데, 비슷한 시기 인접한 베네수엘라와 에콰도르에서 강경좌파 정권이 3선 개헌을 강행했기 때문에 "너희들이 그들하고 뭐가 다르냐?"는 여론의 뭇매를 피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의회에서 3선 개헌안이 통과되었지만,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결국 2010년 재출마하지 않았으며, 실질적인 여당인 국민통합사회당의 후안 마누엘 산토스 전 국방장관을 지지했다. 당초 산토스는 녹색연맹의 안타나스 모쿠스와 접전을 벌였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약 70 대 30이라는 충공깽한 결과가 나오면서 또 논란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이후 잠잠해졌으며, 산토스가 취임하면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6. 퇴임 이후
보통 임기제한에 밀려 퇴임하면 사실상 은퇴하는 다른 대통령들과는 달리, 우리베는 퇴임 이후에도 중앙 정치에 그대로 머무르며 지금까지도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4] 이는 매우 드문 케이스.퇴임 이후에도 측근인 산토스가 집권했기 때문에, 여전히 실권을 행사하고 다녔다. 바로 권력 좀 행사하고자 자신의 정치 단체이자 실질적인 여당 역할을 했던 콜롬비아 제일을 해체하고 국민통합사회당에 입당했으며, 이 당에서 그야말로 상왕 노릇을 하고 다녔다.
하지만 산토스가 곧바로 FARC와의 평화 협정 추진에 들어가면서 둘의 관계는 틀어졌고, 결국 우리베는 2013년 자신의 측근들을 끌고 전격 탈당해 민주중도당을 창당했다. 이후 민주중도당의 총재로 취임하면서 실질적인 야당 대표로 활동하면서 다시 권력을 되찾고자 2014년 자신의 측근 중 하나인 오스카르 이반 술루아가를 앞세웠지만, 산토스에 밀려 낙선했다.
이후 한동안 우리베는 권력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산토스 2기대 들어서 원자재값이 하락하며 경제는 침체기에 들어섰고, 베네수엘라와의 충돌도 벌어지고, 부패사건도 벌어지는 바람에 산토스의 지지율이 30% 아래로 추락하며 정권 교체 가능성이 높게 점쳐졌고, 이에 차기 대권주자로 유력시되던 측근인 이반 두케를 앞세워 무소속 급진좌파 후보인 구스타보 페트로와 맞붙게 되었다. 결국 두케가 싱겁게 당선되면서 다시 권력에 복귀했고, 앞으로 적지 않게 실권을 발휘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하지만 이반 두케가 삐끄덕 거리는 바람에 우리베의 이미지도 덩달아 악화되었다.
[1] 1886년 이래 콜롬비아는 중도 내지 중도좌파 성향의 자유당과 중도우파 성향의 보수당이 양당제를 구성했다. 그러나 자유당 소속으로 대통령을 지낸 에르네스토 삼페르가 스캔들에 연루되면서 불안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당에서 버림받은 우리베가 탈당해 독자 출마하면서 그간의 양당제가 붕괴되었다. 이후로 콜롬비아는 브라질처럼 다당제 국가로 변신했다.[2] 후에 필리핀 대통령이 되는 그 사람 맞다.[3] 가장 대표적인 예가, 2002년 우리베의 경쟁자 중 하나였던 산소녹색당의 잉그리드 베탕쿠르 후보였다. 선거 운동 중 FARC에 의해 납치되어 6년간 억류되었는데, 이 때 우리베의 활약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4] 멀리 갈 거 없이 대한민국 제6공화국의 역대 대통령들도 퇴임 후에는 다들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