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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2세/재위 기간 러시아 제국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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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알렉산드르 2세 이전 산업 혁명
2.1. 러시아 산업 혁명의 배경과 초기 산업 혁명2.2. 초기 산업 혁명의 한계
3. 알렉산드르 2세 시기의 산업 혁명
3.1. 각 지역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3.2. 수공업의 변화3.3. 노동자의 삶3.4. 금융과 무역3.5. 인프라의 확장3.6. 농노 해방 이후의 농업

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2세 재위 기간 당시 러시아 제국의 경제 상황.

2. 알렉산드르 2세 이전 산업 혁명

2.1. 러시아 산업 혁명의 배경과 초기 산업 혁명

일반적으로 러시아 제국은 농업 국가이고 상공업은 낙후되었다는 인식이 강하지만, 러시아 제국은 상공업을 등한시한 국가가 결코 아니었다.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강력한 서구화와 상공업 진흥 정책을 추진해서 성과를 내고 있었고 18세기 말에는 공업 기업을 1,200개, 공장과 제조소는 2,300개를 보유하고 있던 국가였다. 그리고 러시아의 다양한 공업 부문은 국가가 요구하는 중요한 수요들을 거의 다 만족시킬 수 있을 정도였으며 대외 무역도 활발해서 중국과 중앙아시아, 유럽과의 교역이 번창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가 강세를 보이던 산업은 금속 공업과 아마포 공업이었다. 우랄의 광산과 금속 공장에서 생산하는 막대한 양의 금속은 외국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프랑스나 영국의 것보다 품질이 좋았다. 18세기 말 ~ 19세기 초에 프랑스가 자국 금속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러시아 금속에 대한 수입 관세를 도입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러시아는 1750년에 41개의 용광로에서 200만 푸트(32,700톤)의 선철을, 1800년에는 111개의 용광로에서 990만 푸트(162,000톤)를 생산해서 금속 생산 분야에서 유럽 1위였다. 비교하자면 영국은 1750년에 30만 푸트(4,900톤)를 생산했고, 산업 혁명 중이던 1800년에는 950만 푸트(155,500톤)를 생산했다.

러시아의 아마포와 밧줄, 돛천은 오래 전부터 명성이 높았다. 영국 선박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선박들은 러시아산 밧줄과 돛천을 애용했으며 러시아는 막대한 양의 아마포를 유럽에 수출해 필리핀산 아마가 유럽에 들어오기 전까지 유럽 아마포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러시아는 기술적인 수준도 다른 유럽 국가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이반 폴주노프(Иван Иванович Ползунов)가 자체적으로 증기 기관을 개발하고 상용화하려 했으며 세계 최초로 2기통 엔진을 발명했다. 또한 영국보다 선진적인 선반 기계를 발명하고 압연 기계와 롤러 기계를 개발해서 우랄의 공장에 도입했을 정도였다.

니콜라이 1세의 치세가 되자, 러시아는 산업 혁명의 영향을 받아 상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했으며 원래 강세였던 금속과 아마포 공업 외에도 면직·목재·유리·가죽·도자기·직물업 등 각종 산업이 번창했다. 그중에서도 면직물 산업의 성장이 엄청났는데, 면직물 생산은 1850년대에 세계 5위로 뛰어오르고 목면 수입은 1819년부터 1859년까지 1,620톤에서 48,000톤으로 증가할 정도였다. 목면 수입이 30배 가량 늘어난 셈인데, 이 정도의 성장은 산업 혁명을 일으켰던 영국조차 이루지 못한 일이었다. 이렇게 급성장한 면직물 공업은 아마포와 모직, 견직물 공업을 밀어내고 러시아 섬유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으며 타국의 면직물 공업이 그랬던 것처럼 국가의 산업 혁명을 이끌었다.

182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처음으로 산업 박람회를 개최하자 수백 명의 기업가들이 참가해서 증기 기관, 선반 기계, 파종기 같은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였고, 박람회가 산업계의 호응을 얻고 성공적으로 끝나는 것을 본 러시아의 도시들은 러시아 혁명이 터지기 전까지 4년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산업 박람회를 개최했다. 또한 러시아는 19세기 후반에 세계 박람회의 상임 참가국 자격을 획득하고 항상 세계 박람회에 참가했으며 박람회에 전시한 러시아의 공산품과 전통 공예품, 예술품들은 언제나 큰 상을 받았다.

1830년부터 러시아의 공업은 조금씩 산업화와 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해서 수공업 공장들이 기계 공장으로 변하고 새로운 기계 공장들이 등장했다. 1830년에 7개의 기계 공장에서 24만 루블 상당의 상품을 생산하던 러시아의 기계 공업은 1860년에는 99개의 공장이 800만 루블에 달하는 상품을 생산할 정도로 성장했다.[1] 그리고 19세기 중반에는 러시아 전체 대기업의 3분의 2가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의 전환을 끝내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만 11개, 모스크바에서는 191개나 되는 신규 기계 공업 회사들이 설립되었다. 모스크바가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보다 더 많은 기계 공업 회사들이 설립된 이유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신기술 도입과 공장 건설에 비용이 많이 드는 중공업이 중심 산업이었던 반면, 모스크바는 상대적으로 비용이 적게 들고 기계화가 빨랐던 경공업이 중심 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막대한 기계 수입량을 줄이기 위한 자체적인 기계 생산도 이뤄졌다. 베르다, 넵스키 기계 제작 공장,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로프 국영 공장과 같은 기계 제작 공장들이 설립되었으며 1849년에는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의 소르모보에서 증기선 건조 공장이, 발트 해 연안과 우크라이나에서는 농기계 제작 공장들이 설립되었다. 공업의 양적인 팽창도 이루어져서 18세기 말에 1200개였던 기업은 1850년대 중반까지 2,800개로 증가하고 1825년에 5,260개였던 공장은 1854년까지 9,940개로 증가했다. 공장에서 일하는 산업 노동자의 수도 20만 2천에서 459,000명으로 증가했다. 산업 노동자와 그외 여러 분야에서 종사하던 노동자의 숫자를 모두 합치면 80만 명이었다.

수공업에서 공장제 기계 공업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자, 생산 공정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가장 빠르게 기계화가 이루어진 면직물 공업 같은 경우에는 30년대부터 실을 뽑는 방적 공정과 염색을 하는 날염 공정을 기계화하고 50년대부터 직포 공정에 대한 기계화를 시작했다. 면직물 공업의 이렇게 빠른 기계화는 면직물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94% 이상이 고용 노동자였고 섬유 기업들이 각종 기계를 빠르게 도입했던 것, 1844년에 영국 정부가 자국 기계의 수출 제한 규제를 폐지한 것이 크게 작용했다. 고용 노동자들은 농노 노동자들보다 생산 효율도 높고, 기계 사용에 필수적인 문자 해독 능력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면직물 업계는 농노 노동력 비율이 높은 다른 산업보다 훨씬 수월하게 기계를 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른 공업의 생산 공정도 조금씩 기계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해서 금속 공업은 증기 기관으로 작동하는 압연 기계와 베서머 법을 도입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금속을 추출하고 제철 과정에서는 목탄의 비중이 높은 가운데 조금씩 코크스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다만, 금속 공업 같은 경우에는 농노 노동력의 비중이 높고 기계 공업으로의 전환에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산업 중에서 기계화가 가장 늦었다.

산업화가 이뤄지자, 인프라도 발달하기 시작했다. 18세기 말에 220만 명이었던 도시 인구는 19세기 중엽에 570만 명으로 증가하고, 양대 수도인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각각 인구가 27만 명과 33만 6,000명이었던 것에서 46만 명과 54만 명으로 증가했다. 또한 전체 인구에서 도시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도 4%에서 8%로 늘어나고 도시의 숫자도 630개에서 1,032개로 증가했다.[2] 교통망도 발달하기 시작해서 육지에서는 9,000베르스타의 포장 도로가 깔리고 볼가 강, 드네프르 강 등의 하천과 아조프 해 및 흑해 등에서는 증기선이 지나 다녔다. 그리고 공병대 사령관으로 커리어를 쌓고 기술에 관심이 많았던 니콜라이 1세는 수익성과 효용성이 없다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1837년에 러시아 최초의 철도인 차르스코셀리스크선(상트페테르부르크 - 차르스코예 셀로)을 건설했다. 공사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니콜라이 1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바르샤바와 빈을 연결하는 철도와(1848)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니콜라이선을(1851) 추가적으로 건설했다. 또한 민간에서는 17세기부터 시작한 선대제 수공업과 매뉴팩쳐가 발달하여 자본을 축적하고 숙련공을 양산했으며 러시아 산업의 성장에도 기여했다. 그리고 농촌에서는 계절 노동이 성행해서 농민들이 겨울마다 도시로 넘어가 상공업에 종사했으며 러시아의 노동 시장 형성과 도시 인구 증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계절 노동은 농업만으로는 가족 부양과 세금 납부가 어려웠던 중앙 러시아, 북서부 비흑토 지역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19세기 중엽에는 아예 성인 남성의 30 ~ 40%가 겨울만 되면 돈을 벌기 위해 대도시로 떠날 정도였다.

그리고 산업 혁명의 영향을 받아 중앙 러시아와 비흑토 지역(야로슬라블, 칼루가, 모스크바, 니즈니노브고로드, 트베리, 블라디미르 주 등)의 많은 농촌과 수공업 마을들이 농사를 그만두고 아예 수공업으로 업종 전환을 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이 지역들은 기후가 농업에 적합하지 않아 비농업 부문 경제의 비율이 높았는데, 본래 면화 산업과 상공업을 하기에는 적합해서 다른 지역보다 무역과 상공업이 발달한 편이었다. 중앙 러시아와 비흑토 지역에서는 전체 인구의 65~90%가 본업은 아니더라도 부업으로 비농업 경제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다수의 농민들이 지주에게 소작료로 현물이나 현금을 주고 있었기 때문에 업종 전환이 용이했다. 예를 들어 야로슬라블 지역은 토양이 척박하고 농지가 부족해서 농노제와 부역이 강화되는 18세기 중반에도 대부분의 농민들이 현물이나 현금을 소작료로 납부하고 있었고 1858년에는 농민의 88%가 현금으로 소작료를 납부하고 있었을 정도였다. 이를 통해 블라디미르 주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와 테이코보,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의 파블로보, 트베리 주의 킴리 같은 마을들이 섬유, 금속가공, 피혁 산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2.2. 초기 산업 혁명의 한계

그러나 한계도 존재했다.
그래서 러시아의 공업은 18세기 말이 되면 판에 박힌 듯한 공장 운영과 지나치게 농노 노동력에 의존하는 점, 국가적 무관심으로 인해 산업 혁명을 치르던 영국과 프랑스, 벨기에와 네덜란드에게 뒤처지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금속 공업은 19세기의 1/4분기 동안 주철 생산량을 900만 푸트(14만 7,400톤)에서 1,800만 푸트(29만 4,800톤)로 두 배 늘렸지만, 같은 시기에 영국은 주철 생산량을 950만 푸트(15만 5,500톤)에서 2억 8,500만 푸트(466만 8,300톤)로 30배 늘렸다. 1830년에 세계 금속 공업에서 러시아가 차지하는 비중은 30%였지만, 1850년에는 4%로 급감했으며 영국을 비롯한 해외 각국들이 러시아산 금속 수입을 줄여서 타격이 심했다. 러시아의 금속 공업은 제국 정부가 흑색 금속과 비철금속 수입에 높은 관세를 부과해준 덕분에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마포와 견직물 공업을 비롯한 다른 산업 분야들도 실질적으로는 성장 속도가 매우 느렸다. 양적으로는 팽창했을지 몰라도[3] 여전히 표트르 대제 시절에 설립한 낡은 광산과 공장, 귀족 지주들이 설립한 영지 매뉴팩처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농노 노동에 의존하는 이 기업들은 생산성과 품질이 나쁘고, 제품 가격은 높아서 경영 위기 상태에 높여 있었고 고용 노동에 기초한 기업들보다 훨씬 뒤떨어졌다. 특히나 영지 매뉴팩처에서의 작업은 농민들에게 가장 힘든 부역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매뉴팩처 노동에 저항했다. 또한 국가 농민들을 고용하는 매뉴팩처들도 효율성이 낮아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대기업의 2/3가 기계화를 이루고 공장의 숫자도 꾸준히 늘어났지만, 19세기 전반기의 러시아에서 생산하는 주요 공업 제품은 대기업이 아니라 10 ~ 15명이 일하는 소규모 수공업 공장과 가내 수공업이 생산했으며 생산재보다는 소비재가 훨씬 더 많았다. 1850년대에 러시아에서 생산하는 공업 제품의 80%가 소비재였고 전체 공업 기업에서 소규모 수공업 공장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82%에 달했다.[4] 공업이 이렇게 중소 기업 중심인 것이 문제는 아니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지나치게 수공업과 소비재의 비중이 높았다.* 농노제가 또 발목을 잡았다. 표트르 대제 시절부터 러시아의 공장은 위생이 나쁘고 안전하지 않았으며 노동 시간은 매우 길었다.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공장 농노’들이라 평생 공장에 묶여서 일해야 했다. 그래서 농노 노동력에 의존하는 공장들은 근로 의욕이 낮고 여건도 좋지 않아서 생산성과 품질을 보장할 수가 없었다. 19세기부터 산업화가 이뤄지면서 임금 노동자의 숫자가 늘어나, 1820 ~ 30년대에 국가 전체 공업 노동자 수에서 농노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46%로 감소하고 1860년에는 그 비중이 18%로 낮아졌다. 그러나 82%의 임금 노동자들 중에서도 다수가 농촌에서 지주의 허락을 받아 공장에 돈 벌러 나온 농노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공장에서 일할 때는 공장주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지주들에게도 종속되어 있어서 지주들은 노동자들을 언제든지 농촌으로 복귀시키고 부역을 강요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장주는 이들에게 임금 외에도 소작료까지 보상해야 했기 때문에 농노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것은 인건비 측면에서 위험성이 상당했다.[5] 물론 이러한 위험성이 없는 국가 농민들을 고용할 수도 있었지만, 국가 농민들도 미르의 통제를 받고 있어서 완전하게 자유롭지가 않았다.공장주 본인들도 농노제에 결박된 상태였다. 농노 해방이 이뤄지기 전까지 대부분의 기업가들과 상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의 신분은 농노였으며 이들은 지주들에게 상당한 액수의 '소작료'를 지불할 의무가 있었다. 기업가들이 신체의 자유를 되찾으려고 해도 좋은 수입원을 잃기 싫었던 지주들이 이들을 '해방'시켜주지 않았기 때문에 기업가와 미등록 상인[6]들은 계속해서 수입의 일부분을 지주들에게 빼앗겨야 했다. 모스크바에서 대규모 견직물 제조공장을 소유하고 있던 콘트라셰프도 농노 해방 전까지 골리친 공작의 농노로 남아 있어야 했으며, 구교도 출신으로 100년 가까이 러시아의 재벌 가문으로 군림하는 모로조프도 1820년대에 2,000명 분의 소작료와 맞먹는 1만 7천 루블을 류민에게 바쳐서 간신히 자유를 얻었다. 이바노프 지역의 공장주 수십 명이 100만 루블이 넘는 돈을 셰레메체프 백작에게 바치고 자유를 얻은 사례도 있었다. 러시아의 자본 형성과 자본주의 발달이 다른 국가에 뒤쳐졌던 것에는 자본가들이 농노제에 결박당해 원치 않는 소작료를 바치고 신분이 농노라는 이유로 여러 가지 제약에 시달렸던 것이 영향을 미쳤다.* 부족한 도로 교통망이 경제 발전을 저해했다. 19세기 전반의 러시아에서 쓰는 주요 운송 수단은 수상 운송과 마차였다. 여름에는 수천이 넘는 하천과 국가가 건설한 운하를 지나가는 수로 교통을 이용하고, 겨울에는 썰매길을 따라 마차로 수송하는 것이 러시아에서 가장 편리한 수송 방법이었다. 그러나 도로의 대다수가 비포장 도로여서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라스푸티차 시기에는 통행이 어렵고, 자연재해가 터지면 아예 통행이 막혀버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니콜라이 1세의 치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바르샤바, 야로슬라블, 니즈니노브고로드 같은 대도시에 포장 도로를 건설하고 1860년까지 9 000베르스타의[7] 포장 도로를 건설했지만, 광대한 영토를 가진 러시아에게 이 정도 도로망은 매우 불충분한 것이었다. 비교하자면 같은 시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45,000km의 도로를 건설해 러시아보다 5배나 더 많은 도로망을 건설했다. 철도망 같은 경우에는 1861년까지 1,500 베르스타의 철도망을 건설했지만, 같은 시기 영국은 15,000km, 프랑스는 10,000km, 프로이센은 5,700km, 독일 전체로는 11,000km를 보유하여 러시아를 압도했다.

3. 알렉산드르 2세 시기의 산업 혁명

초기 산업화 과정을 거친 뒤, 러시아는 알렉산드르 2세의 치세부터 본격적인 산업화에 돌입했다. 제국 정부는 농민들에게서 걷은 조세와 토지 상환금, 농산물 수출 대금을 산업화에 투자하고 국채를 발행하는 한편, 외국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도입해 산업화에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고 산업 자본에 투자했다. 그리고 서유럽의 기술을 도입하고 금융 기관들이 속속 설립되기 시작해서 러시아 산업 부르주아들의 자본 축적 기반이 매우 취약했던 것을 해결해 주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산업 혁명은 농노제가 잔존한 상태에서 일어났고, 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늦게 시작했다는 불리한 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러시아의 자본가들은 산업화에 더 박차를 가하려면 생산성이 낮은 농노 노동자보다는 효율이 높은 임금 노동자들과 넓은 노동 시장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정부에 농노제 개혁을 청원하고 공장 소속 농노들의 해방도 요청했다. 그리고 1861년에 농노 해방이 이루어져서 많은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서 도시로 향했기 때문에 이들의 꿈이 마침내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정부와 자본가들의 기대와는 달리 산업 생산이 증가하고 공장의 숫자가 늘어나는 일은 없었다. 공장에서 일하던 농노 노동자들이 공장을 그만둬서 노동자의 수가 부족해졌기 때문이다. 농노 노동자들은 그 동안 공장에서 받은 억압과 저임금(상대적으로 농민보단 많이 받았지만), 열악한 노동 환경에 염증을 느껴 공장을 떠났고, 임금이 몇 배나 올라도 돌아오지 않았다. 게다가 대개혁이 일으킨 변화로 인해 경제가 혼란스러워져서 많은 기업들이 생산을 줄여야 했다. 농노 개혁의 여파로 1860 ~ 1862년간 선철 생산은 2,050만 푸트에서 1,530만 푸트로 격감하고 면직물은 280만 푸트에서 80만 푸트로 격감했다. 그리고 1858년에 59만 9,000명이던 노동자의 수는 42만 2,000명으로 격감했다.

186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변화에 적응한 기업들이 생산을 늘리기 시작했으며 이 시기부터 산업화에 속도가 붙어 기계 공업 생산이 공장제 수공업과 가내 수공업의 생산을 능가하고 중공업이 성장했다.[8] 그리고 러시아는 서유럽 국가들보다 산업화가 늦었기 때문에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독일이나 이탈리아처럼 국가 주도형 산업화를 시작했고 다른 국가들과는 다르게 대기업을 중심으로 산업이 발달하기 시작했다.[9] 또한 후발 주자의 이점을 살려 서유럽의 자본, 과학, 생산 조직화에 대한 비결을 습득하고 그들의 산업화 과정 속에서 일어난 시행착오들을 피할 수 있었으며 선진 기술을 대규모로 도입해서 서유럽의 공장들보다 더 근대적인 공장들을 설립했다.

러시아 공업에서 높은 비중을 가진 면방직 공업 역시 크게 성장했다. 이 시기부터 면방직 공업은 이미 기계화가 된 방적과 날염에 이어서 직포공정도 기계화를 이루었고 1870년대부터 방적·직포·날염 공정이 일관된 제조 체제를 갖추었다. 그리고 세계시장에서 목화 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원료의 단가를 낮추고 안정적인 원료 공급지를 얻기 위해서 1860년대에 러시아가 합병한 중앙아시아 지역의 토지를 사들였는데, 농노 출신 집안의 자본가인 마로조프가 중앙아시아 이주에 앞장섰다. 자본가들은 현지 주민들에게 이집트와 미국의 질 좋은 품종을 분배했고 목화 수확물에 대한 구입계약을 체결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목화 생산은 이 시기부터 30년간 4배 늘어났다.

노동시장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대개혁 이전에는 공업 노동자들이 농노나 국가 농민, 영지 매뉴팩쳐 소속 농노들이었던 반면, 1860 ~ 70년대부터는 공동체에서 독립해서 가족들과 함께 도시로 영구 이주한 자유민들이 다수였다. 이들은 기계화가 된 공장에서 여러 가지 기계와 기술을 취급하는 능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이전의 노동자들보다 문자 해득 수준이 높았다. 특히 대규모 공장과 철도 산업은 숙련공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이 '새로운 노동자 계층'은 러시아 사회주의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 차례에 걸친 브나로드 운동에도 꿈쩍 않는 농민들에게 실망한 인민주의자들이 도시로 가서 노동자들에게 인민주의를 선전했는데, 농민들과는 달리 공장 노동자들이 인민주의자들의 주장에 상당한 호응을 보였던 것. 그래서 러시아의 인민주의 세력은 그들의 이론과는 달리 노동자들을 지지 기반으로 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산주의가 등장하고 난 뒤부터는 양대 사회주의 세력이 노동자들의 지지를 놓고 서로 다툼을 벌였다.

이렇듯 러시아의 산업은 빠르게 성장했고 그 성과도 높았으나 한계도 있었다. 러시아는 여전히 국민의 대다수가 농민인 농업 국가였고 지역적으로도 산업의 성장이 불균형해서 일부 유럽 러시아 지역, 일부 대도시에서만[10] 공업이 집중적으로 발전하고 나머지 지역은 낙후된 채로 남았다. 그리고 산업의 질적인 성장도 미진해서 1인당 생산량, 기술설비, 노동 생산성 등의 면에서 서유럽 국가들보다 크게 뒤처져 있었다. 그리고 일부 기술 분야에서 서유럽보다 앞서기도 했지만, 끔찍할 정도로 후진적인 면도 있었다. 원래 산업화 과정에서 복잡한 기계와 원시적인 수작업이 병존한다지만, 러시아의 공장은 그 정도가 심각했다.

3.1. 각 지역의 산업화와 경제 성장

중공업이 성장하면서 금속 수요도 함께 증가해서 전통적인 금속 생산지 우랄과 함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금속 생산지가 출현했다. 현재 도네츠크 강 유역의 돈바스 지역에서 철광석과 석탄 채굴을 시작하고[11] 크림 반도에서는 철광석 광산을 개발했으며 유좁카[12]에서는 1872년에 미국인 존 유즈가 선진 기술 설비를 갖춘 금속 공장을 세워 용광로를 가동하고 철 생산에 대한 정부 수주를 받았다. 2년 뒤에는 술린스크의 금속 공장에서도 용광로를 가동하고 금속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몇 년 뒤에 드네프로페트롭스크주크리보이 로크에서 풍부한 철광맥이 발견되자 유좁카와 술린스크 공장은 철광석이 풍부한 크리보이 로크로 공장을 이전했으며 이 두 공장의 이전은 크리보이 로크의 철광 산업을 급속도로 발달시켰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새로운 공장과 기업체들이 출현하자, 러시아 남부 지역은 원료 생산·공급지 상태를 탈피하고 새로운 산업 지역으로 성장했다. 또한 농노 노동력이 아니라 자유민 노동력에 기초해서 성장한 남부의 신생 금속 공업 지역은 경제 성장과 산업화에 장애가 되던 농노제의 잔재를 빠르게 없애고 기존의 경제 중심지보다 훨씬 더 빠르게 성장했으며 러시아의 중요한 산업 지역으로 떠올랐다.

아제르바이잔의 바쿠에서는 석유 산업이 급속도로 성장해서 석유 시추와 가공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일정 기간 동안 유정의 석유를 독점 판매하는 제도를 시행했으나 1872년부터는 석유 산지를 경매에 부치고 기업들이 입찰을 하여 장기 임대하는 제도로 전환했으며 증기 기관을 써서 유정 굴착과 채유를 하는 신기술을 도입했다. 1873년, 알렉산드르 2세는 외국 자본에 석유 산업을 개방하고 캅카스 지방의 석유 탐사를 허가했다. 1876년, 다이너마이트노벨상으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의 형들인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노벨 형제 석유 회사', 통칭 브라노벨 사를 세우고 바쿠 지역의 석유 개발과 생산에 참여했다. 형제의 석유 시추 사업은 성공적이라서 노벨 형제는 1879년에 본사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전하고 회사를 주식 회사로 전환했다. 사족으로 이 시기에는 가정에서 생활용으로 소비하는 등유의 수요가 엄청났던 반면, 중유와 휘발유는 공업과 운송업 분야에서나 조금 쓰는 수준이었다.

이렇듯 남부 지역의 성장 역시 대단했지만, 실질적으로 러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산업이 발전한 곳은 서부였다. 서부 산업 지대는 폴란드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스웨덴과 같은 선진 지역과 가까워서 해외 자본과 기술, 인력을 흡수하기 용이했고 대도시가 많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고를롭카, 나르바, 오레호보-주에보, 이젭스크 등 대규모 공업 중심지들이 성장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벨 기계 공장, 오부호프 제강과 대포 공장, 페름의 기계 공장 등, 대규모 기계 공장들이 설립되었다. 지역적으로는 콜롬나(기관차), 소르모보(증기선), 하리코프, 오데사, 베르댠스크(농기계)에서 대규모 기계 공장이 출현했다.

3.2. 수공업의 변화

산업혁명으로 인한 대규모 기계공업의 성장은 전통적인 수공업 생산을 쇠퇴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전람회와 전시회에서 전통 공예품들이 전시되고 시장과 해외에서 러시아의 고급 공예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등, 전통 공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던 시기이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은 민중의 생활이나 예술, 전설과 같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던 시기였고 그 영향으로 전통 공예품에 대한 관심도 늘어났다. 장인들이 제작한 공예품들이 예술작품 대접을 받기 시작했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전통 공예 예술가 집단도 생겼다. 러시아 각지에서 전통 공예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협회들도 등장했다. 이 단체들의 활동으로 전통 공예가 보존될 수 있었고 새로운 공예도 생겨났다.

기계 공업이 성장하면서 각종 공정이 기계화 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공장제 수공업은 공업 부문에서 그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생산 공정 전부를 담당했지만 이제부터는 일부 공정만 담당하게 되었고 기계 공장으로부터 하청[13]을 받거나 선대제를 하는 방식으로 변화했다. 그러나 수공업이 마냥 쇠퇴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비중이 줄어들긴 했지만 장기적인 성장세를 보였고 전통적인 수공업 작업장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롯한 여러 도시의 소매 시장을 대상으로 하여 명맥을 유지했다. 양복업, 제화업, 보석가공업, 시계제조업, 목가공업이 대표적이다. 도시의 장인들은 작업장을 운영하며 고급 소비자를 위한 상품을 생산했고 도시의 상점에서는 장인들의 공예품을 다량으로 판매하는 체제가 갖추어졌다. 농촌에서는 직물이나 철공, 목공, 도자기, 기름 제조를 비롯한 각종 소규모 수공업이 발달했고 소규모 제련 산업도 발달했다. 농촌과 도시에서 수공업 노동자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났다. 수공업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수는 1880년까지 150만명으로 늘어났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1880년의 농촌 수공업 노동자의 숫자를 최소 400만 ~ 최대 1,500만으로 추산했다. 이 숫자는 100만을 헤아리던 기계 공장 노동자의 숫자를 훨씬 넘는 수치이다.

러시아 각 지방에서도 전통 공예는 살아남았다. 키로프 주의 딤코보에서는 예전부터 여성들이 화려한 색깔로 채색한 점토 장난감을 만들었는데 말이나 병사, 새 같은 것부터 일상의 모습을 묘사한 것까지 다양했다. 공장제 장난감들이 시장에 대량으로 공급돼서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농촌과 도시,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생산하는 수제 장난감이나 작은 조각상들도 인기가 있어서 농촌의 소규모 장인들이 주문을 받아서 제작했다.

블라디미르 주의 므스테라와 이바노보 주의 팔레흐의 이콘 장인들은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이콘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제품 제작 방식과 재료를 바꾸고 고급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덕분에 그들은 정교한 기술과 독특한 미술 전통을 보존할 수 있었다.

1830 ~ 1840년대에 러시아에서 생산되는 도자기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그젤의 도자기도 그 예술적 양식을 보존했고 러시아 내수 시장에서만 유통되던 것을 뛰어넘어 해외에도 수출하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와 볼가 강에서는 비단, 금실 자수, 융단을 비롯한 직물 공예와 가죽 공예, 보석 가공, 도자기와 구리 그릇 제작 같은 실용적인 예술이 발달했다. 젬스트보 역시 전통 공예에 영향을 끼쳤다. 젬스트보는 전통공예를 지원하고 예술가들을 초빙했다. 대표적인 지원 사례로는 니제고로드 젬스트보가 호흘로마의 목제 공예업을 지원한 것과 19세기 말에 모스크바 젬스트보가 공예로 유명한 세르기예프 지역을 지원하여 수공업 단지를 만든 것이 있다. 젬스트보의 이러한 활동으로 전통공예 분야에서 예술가들이 장인들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3.3. 노동자의 삶

산업 혁명 이후로 공업이 발달하면서 1865년에 제조업·광업·철도업에 일하는 산업 노동자는 70만이었는데 70년대 말에는 10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러시아 산업 노동자들은 도시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고 한 농민들과 소수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농민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었고 교육 수준도 농민보다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농민 출신으로서 월급을 아껴서 농촌의 본가에 돈을 보내줘야 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삶은 가난했고 자기 자신에게 투자하기가 어려워서 습기가 많고 어두운 방에서 힘들게 지내면서 잘 먹지도 못했다. 노동 조건도 열악했고 안전 규정도 잘 지켜지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건강이나 안전에는 무관심했고 그런 것에 돈 쓰는 것을 아까워했다. 때문에 일을 하다가 부상을 입거나 신체 일부가 절단될 정도의 중상을 입은 노동자들의 숫자는 매우 많았다. 전체 노동자 중의 20% 이상이 산재를 당한 공장도 있었으며 산재율이 높은 광산업의 경우에는 100명 당 50명 꼴로 산재를 당한 광산도 있었다.

부상을 입은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정부 당국의 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공장에는 제대로 된 침대나 의사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아지긴 하지만 여전히 의사 수나 환자를 눕힐 침대의 수는 부족했다. 그리고 의사가 있더라도 제대로 교육 받은 의사들을 찾기는 힘들었다. 특히 이 당시 러시아의 의료 체계는 열악한 축에 속했다. 거기다 공장에서 발생하는 유독 가스나 먼지를 제대로 처리할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에 호흡기 질환에 걸리는 이들도 많았고 위생 상태도 나빠서 콜레라나 성병이 자주 발생했다.

또한 자본가들은 계약을 맺으면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억압했고 노동자들은 계약이 끝날 때까지 공장을 떠날 수도 없었다. 그렇다보니 노동자의 지위는 농노나 다름없었다. 해고도 쉬웠다. 자본가들은 자기 마음대로 노동자들을 해고할 수 있었고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 또한 자본가들은 조그마한 규율 위반에도 막대한 벌금을 물렸고 벌금 명목으로 임금의 30% 이상을 깎아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임금을 줄 때도 숙식비용, 공제금 납부, 매점 이용권 지급, 현물 지급과 같은 갖가지 방법으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았다. 그리고 공장 밖에서 물건을 사지 못하게 하고 공장 안의 매점에서만 물건을 사게 만들었는데, 공장의 매점은 바깥의 물건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물건을 팔았다.

기계화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노동 시간은 매우 길었다. 최소 12시간을 일했고 14시간 ~ 16시간이 평균적이었으며 18시간까지 일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당시 서유럽보다 노동 시간이 훨씬 더 긴 편이었다.[14] 거기다 자본가들은 부수입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노동자들에게 심어서 잔업을 시켰고, 벌금을 탕감해주는 명목으로 의무 노동을 시키기도 했다. 잔업과 의무 노동은 추가 고용과 추가 설비를 할 필요성을 없앴기 때문에 자본가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었다. 아동 노동도 이루어지고 있었고 여성 노동자나 아동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보다 낮은 임금을 받았다. 여성 노동자들의 대다수가 임금이 낮은 직물업이나 비숙련 직종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도 여성 노동자의 임금이 낮았던 원인 중 하나였다. 숙련공과 미숙련공간의 임금 격차도 컸다.

자본가들의 착취를 감시, 감독해야 할 정부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방관했다. 정부는 늘 자본가들의 편에 섰고, 노동자들의 항의나 파업은 '불온한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경찰력과 군사력을 동원해서 진압해 주었다. 노동 조건을 개선시키는 법이나 조치는 거의 없었고 산업재해에 대해서는 매우 안이하게 대처했다. 노동 조합도 불법이었고 노동자들이 합법적으로 노동 조건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은 아예 없었다.

수공업 쪽은 상황이 더 나빴다. 수공업계는 노동법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법의 보호를 받을 수가 없었고 상술했듯이 수공업 공장은 기계 공장으로부터 하청을 받는 '하청업체'였기 때문에 수공업 노동자들은 기계 공장 노동자들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아동 노동을 제한하는 법이 제정되었을 때도, 수공업계는 이 법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아동 노동을 계속해서 이용했다. 기계 공장이 법 제정 이후로 아동 노동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법 제정으로 기계 공장에서의 아동 노동은 줄어든 편이었고 일을 하는 '아동'의 나이도 수공업 공장보다 더 많은 편이었다. 수공업 공장의 경우에는 11 ~ 12세의 아동이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다. 상술한 대로 많은 노동자들이 농촌에 돈을 보내 주어야 했고,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되고 있어서 예비 노동력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협상력은 매우 약했다. 노동자들은 저임금을 감수해야 했고 해고를 두려워해서 함부로 항의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정 안 되면 농촌에 돌아갈 수도 있다'는 선택지가 있었던 것도 노동자들을 괴롭혔다.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에 항의를 하면, 자본가들은 '너 말고도 일할 사람 많다', '꼬우면 농촌에 있는 집으로 가던가'라는 식으로 대응했다. 정부가 자본가들의 착취를 방관하고 노동 운동을 탄압하던 것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임금이 낮고 예비 노동력이 풍부하다는 것은 노동 조건을 개선하거나 설비에 투자를 할 필요성을 떨어뜨렸다. 노동 조건 개선이나 설비 투자는 돈이 많이 들었지만 노동자를 새로 뽑아 투입하고, 잔업과 의무 노동을 시키는 것은 돈이 별로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임금은 낮고, 그 임금도 벌금과 각종 편법으로 깎아버릴 수 있었으니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도 그냥 새로 고용하면 그만이었고, 항의를 하거나 말썽을 피우는 것들은 해고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더 심한 말썽을 피우는 것들은 경찰에 신고해버리면 그만이었고, 더 심하게 저항하면 정부가 알아서 군대를 보내줬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산업화가 진전되어 공장과 노동자의 수가 늘어나자, 노·사간의 갈등도 심해졌고 노동자의 투쟁도 점점 조직적으로 변했다. 1860년대 노동운동은 해고 문제에 대한 항의와 소요가 지배적이었지만 70년대부터는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작업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의 요구 사항을 사측에 전달하는 조직적인 파업이 속출했다. 1872년에 에스토니아 크렌골림스크 수공업 공장의 파업이 최초의 대규모 단결권 행사였다. 그리고 1870년대 후반부터 오데사와 키예프의 남부 동맹,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북부 동맹 등, 최초의 노동자 단체들도 나타났다. 노동 운동이 시작하고 러시아에 사회주의가 성장할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노동자들의 일상 생활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러시아 노동자들은 농민 출신이 많았기 때문인지 농민들이 입는 옷을 입고 그 위에 조끼를 걸친 채, 모자와 구두를 신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화려한 색의 옷을 선호한 편이었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그대로 자거나[15] 공장 기숙사와[16] 아르텔에서[17] 사는 경우가 많았고 고용주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이들도 있었다. 주택이나 아파트, 방 한 칸을 구해서 사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렇게 사는 노동자들은 일부에 불과했다.[18] 그리고 노동자들은 부서나 업무에 따라 집단을 형성하기보다는 같은 지역 출신들끼리 모여서 집단을 형성했다.

노동자들의 주식은 호밀빵이었고 공동 찻잔과 목제로 된 식기들을 사용했다. 전반적으로 노동자들이 먹는 음식들은 질이 좋지 않았다. 아르텔에서 사는 노동자들은 다른 주거 형태를 가진 노동자들보다는 풍족한 편이었고 집에서 사는 노동자들은 맛과 다양성 측면에서 더 나은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독신 노동자들보다는 가족이 있는 노동자들이 좀 더 상황이 좋았다. 노동자들은 식당이나 선술집에서 10 ~ 15 코페이카를 치르면 흰 빵이나 샌드위치, 철갑상어를 사먹을 수 있었지만 그렇게 사먹는 일은 흔치 않았다.[19]

노동 시간이 매우 길었지만 노동자들은 여가 생활을 즐겼다. 주로 술을 마시거나 카드 놀이를 비롯한 노름을 했고 때로는 무도회에 가기도 했다. 소수의 노동자(주로 숙련공)들은 공연을 보거나 박물관에 갔고, 독서와 공부를 하면서 자기 계발에 힘써 '노동자 지식인'들의 수가 조금씩 증가했다. 축제 기간에는 권투 경기를 열었는데, 각 공장별로 선수들이 나와서 다른 공장의 선수들과 맞붙기도 했다.

3.4. 금융과 무역

러시아에 근대적인 은행제도가 정착한 것은 1860년이었다. 제국 정부는 서유럽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서 민간 기업들의 금융 지원을 위한 목적으로 러시아 최초의 은행을 설립했다. 러시아의 은행은 가장 중요한 산업분야인 금속, 기계공업, 제당, 섬유 공장 등 기업들의 발전을 위해 금융 지원을 시작했다. 국립 은행이 설립된 이후에 나타난 개인 은행들도 기업들을 지원했다. 그리고 산업 분야에 대한 금융 지원은 의무적이었다.

1860 ~ 70년대에는 최초의 개인 은행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설립되었고, 모스크바와 다른 도시에도 설립되었다. 개인 은행이 등장하고 난 뒤에는 신용 대출기관들이 등장했다. 그리고 근대적인 은행의 설립과 신용 대출기관의 등장은 러시아의 경제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쳐서 새로운 형태의 기업이 나타나는 데에도 일조했다. 또한 금융업과 관련된 대자본가들도 등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술의 독점 판매권으로 부자가 된 코코레프인데 1860년대 말에 코코레프는 정부에 제안하여 모스크바 상업은행을 설립했다.

1870년, 산업기업들에 대한 금융지원을 위해 제국 정부는 볼시스코-캄스키 은행을 설립했고 이 은행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은행 중 하나가 되었다. 1875년에는 주식은행이 39개나 설립되었고 신용제도도 정비되었다. 정부는 은행 운영에서도 근대적인 법들을 도입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국립은행의 현금 자산은 국고에 이용할 수가 없다'는 조항으로 이 조항을 통해 정부가 은행 자산에 손대지 못하게 했다.

제정 러시아의 수·출입 현황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수입면에서는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완제품 수입이 줄어들었고, 기계와 각종 설비, 원료에 대한 수입은 예전보다 더 늘어났다. 수출면에서는 필리핀산 아마가 시장에 유입되고 영국이 러시아산 철에 대한 수입을 줄여서 전통적인 수출품인 아마와 철의 수출량은 줄어들었다. 하지만 1846년에 영국의 곡물법이 폐지되고 유럽에서 곡물 가격이 계속 올랐기 때문에 곡물 수출을 많이 하는 러시아는 많은 이익을 보았다. 곡가는 1860년까지 상승해서 1860년에 최고치를 찍었다. 그러나 1860년 이후로 곡가가 조금씩 낮아졌고 1870년대부터 미국산 농산물이 유럽에 대량으로 유입되다보니 농산물 가격이 떨어졌고 러시아는 이 시기부터 수출면에서 예전만큼의 이익을 얻지는 못했다.

3.5. 인프라의 확장

러시아 최초의 철도는 1837년에 건설된 '차르스코셀리스크선'이었다. 이렇게 러시아에는 이미 철도망이 깔려 있었지만 노선은 3개뿐이었다. 본격적인 철도 건설은 알렉산드르 2세의 치세부터였는데, 서유럽보다 뒤떨어진 병력 수송 능력 격차를 해소하고 식량 수출량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제국 정부는 식량을 생산하는 지역에서 항구까지 이어지는 철도망을 건설했고 국내 자본가들과 해외 자본을 유치하는 계획들도 입안했다.

러시아의 철도 건설은 이 시기부터 정부의 지원하에, 민간 기업들이 철도를 건설하는 방식을 취했다. 제국 정부는 기업 설립 기준을 완화하고 기업들에 각종 재정 지원을 해주어 철도업의 성장을 도왔다. 제국 정부는 주식과 채권 구매에 안정성을 더해주었고 국립은행의 대출로 기업들을 지원했다. 제국 정부는 군수목적과 관련된 철도 건설이라면 신속하게 돈을 지급했다. 그리고 일부 기업들이 해외에서 기차를 도입하는 것에 국비를 지원해주었고 레일과 다른 자재들에는 면세 혜택을 주었다. 주식 회사의 설립도 장려했다. 그리고 주식 회사의 대부분은 철도 기업과 은행들이었다.

덕분에 철도업은 러시아의 자본주의 발전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정부의 노력과 기업들의 활동으로 인해 1868년부터 1872년까지 러시아 각지에서 철도 건설이 폭증했는데, 모스크바-쿠르스크, 쿠르스크-하리코프, 하리코프-오데사, 하리코프-로스토프, 모스크바-야로슬라블, 모스크바-탐보프, 탐보프-사로토프, 모스크바-브레스트, 모스크바-니즈니노브고로드 등의 중요한 철도 노선들이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새로 건설된 철도의 대부분은 군사적 용도가 아니라 경제적인 이유에서 건설된 것들이었다. 1861년부터 1877년까지 철도 화물 운송량이 25배 늘어났다. 철도와 관련해서 대외 수입과 수출이 10배 더 늘어났다. 철도 건설은 엄청난 규모의 국가적 지원을 받았고 관료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신규 기업들이 성장하기 시작했다.[20]

그리고 철도 건설은 많은 산업 분야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상공업체와 공장의 숫자가 늘어났고 금속(선로, 화차, 기관차) 수요와 연료 수요가 급증해서 철도 관련 산업도 크게 성장했다. 수입에만 의존하던 기관차·차량·레일의 국산화가 이루어졌고 1860년대 말부터 푸틸로프, 콜로멘스키, 넵스키 같은 대형 공장들이 설립돼서 기차와 레일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기차, 레일의 생산도 국가의 지원을 받았으며, 레일은 1870년에 자급을 달성했고, 1880년대 초에는 이 기업들이 생산한 기관차가 국내수요의 4/5, 차량은 5/6를 충당했다.

산업 혁명은 통신수단의 발전도 일으켰다. 1856년에만 4천만 통의 편지가 발송되었고 1888년이 되면 3억 5,500만 통의 편지가 발송되었다. 1852년에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연결하는 단 하나의 전신선만 있었지만, 1870년대 초에는 모든 구베르니야와 우에즈드의 도시들이 전신망으로 연결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전신선이 연결되었을 정도였고 이 전신선은 세계에서 가장 긴 것이었다. 알렉산드르 2세 사후의 일이긴 하지만, 1882년에 제국 정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오데사, 리가 등에 전화국을 개설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가트치나를 연결하는 최초의 도시 간 전화선이 개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러시아의 도시들은 외관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대도시와 지방의 도시에 철도역과 식당, 상점, 시장, 극장, 은행 건물들이 등장했다. 주택의 건설속도도 빨라졌고 건물 높이도 높아져서 이 시기에 새로 지은 건물들은 보통 4 ~ 5층이었다. 대도시에서는 수도망이 건설되기 시작했고, 대도시 중심부에는 정부 건물과 현지 행정기관 건물, 상업 중심가들이 들어섰다. 대규모 상점들이 전통적인 상가와 소규모 상점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모든 도시에 기업들이 들어섰고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대규모 공단이 새로 생겨났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원래 행정 중심지 역할만 하던 러시아의 도시들이 경제 중심지로서의 역할도 맡기 시작했다.

1860년대 초, 말이 끄는 철로길 <콘카>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놓였다. 1870년대에는 모스크바와 오데사에서도 등장했고 1880년대부터 다른 대도시에도 콘카가 놓이기 시작했다. 도시의 거리는 자갈과 돌로 포장하기 시작했고 모스크바에서는 일부 도로를 아스팔트로 포장하기 시작했다. 거리의 조명도 개선되었다. 1860년대에 등유 가로등이 나타났고, 나중에는 등유 가로등을 가스 가로등으로 대체했다. 1870년 말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전등이 켜지기 시작했고 1880년대 초에는 모스크바에서도 전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3.6. 농노 해방 이후의 농업

1861년의 농노 해방 이후, 30년 동안 경작지는 25%가 늘어났고 식량의 총 수확량은 30%가 늘어났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농업은 여전히 러시아 경제의 토대였고 계속해서 자연경제에서 교환경제로의 변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농민 계층의 분화가 촉진되어서 빈농의 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지주들은 농기구를 구하고 자유 노동자들을 고용해야 했다. 그리고 이전 시대보다 더 많은 숫자의 지주들이 기술을 혁신하고 새로운 종자와 가축, 농기계를 들여왔다.

농노 해방 이후로 농노제에서 자본주의적 영농으로 전환하는 농가가 많아졌고 발트해 연안, 러시아 서부와 남서부, 남부(노보러시아와 캅카스 이북),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야로슬라블, 사라토프에서 자본주의적 영농이 농노제를 대체하고 지배적인 영농 방식이 되었다. 더불어 지역별로 농업이 전문화되었다. 1880년에 폴란드와 발트해 연안, 프스코프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종래의 곡물 생산 대신에 상품 작물을 재배하고 우유를 생산하는 것으로 전환했다. 이로 인해 곡물 생산의 중심지가 러시아 남동부, 볼가강 하류 지역, 우크라이나의 초원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랴잔, 오를로프, 툴라, 니제고로드에서는 축산업이 발달했다.

그리고 미르가 토지 공동 구매를 추진하고 일부 중농이나 부농들이 개인적으로 귀족의 토지를 구매했기 때문에 농민의 토지 보유량도 늘어났다. 1861년에는 귀족의 88%가 지주였지만 1878년에는 56%, 1895년에는 40%로, 점점 귀족 지주의 숫자가 줄어들었고 1905년까지 지주들이 자기들이 가진 토지의 1/3을 농민에게 판매했다. 미르가 공동구매해서 분배한 토지나 농민이 개인적으로 구매한 토지는 미르의 경지 재분배 대상에 들어가 있지 않아서 농민이 온전하게 소유권을 행사했다. 경작 방법도 개선되어서 서유럽에서처럼 휴경지에 클로버를 심고 목초지로 써서 지력 회복과 가축 사육을 동시에 하는 방법을 취했고 윤작을 하는 농지도 늘어났다.

양조업과 제당업도 발달했고 생산량의 증가 덕분에 농촌 지역의 정기 시장들도 많이 열렸고 거래량도 증가했다. 농민들은 각종 농수산물과 가정에서 만든 수공업품, 가축들을 시장에서 판매했다.

그러나 중앙-흑토지대, 볼가강 중류 지대, 비흑토 지역을 비롯한 많은 지역에서는 귀족 지주들이 농민들에게[21] 토지를 임대하는 반(半)농노제 농장이 보편적이었다. 그리고 경작지와 생산량이 늘어나긴 했지만 수확량 증가는 매우 느렸고 농업 전문화가 된 지역은 일부였을 뿐, 러시아 전체에서는 여전히 곡물 농업이 지배적이었다. 또, 러시아의 농업 생산력은 타국에 비해 매우 낮았다. 독일과 생산력을 비교하자면, 독일의 경우, 1 데샤티나(2.7 에이커)의 땅에서 여름에는 밀 128 푸트(1 푸트 = 36 파운드), 겨울에는 104 푸트를 생산했지만 러시아 서부의 경우, 여름에는 64 푸트, 겨울에는 41 푸트를 생산했다. 더불어 농업 기술은 여전히 낙후되어 있었는데, 신형 농기구와 파종기가 등장했지만 대다수의 농민들과 소지주들은 쟁기와 목제 써레로 경작하는 낡은 방식을 유지했고 경지에는 비료를 충분히 주지 않은 상태에서 농사를 지었다.[22] 그리고 농민의 토지 보유량이 늘어난 것은 개인적으로 토지를 구매하거나 미르의 공동구매에 참여할 만한 재산이 있는 농민들에게나 해당하는 일이지, 재산이 부족한 빈농들은 토지 구매가 어려워서 토지 부족 문제에 시달렸다. 불충분한 농노 해방과 인구 폭증으로 인한 문제였고 보유 토지가 줄어들다 보니 농업 수익만으로는 충분히 먹고 살 수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농민들이 부업을 하거나 도시로 이주했다. 농노 해방 직후에만 해도 28%의 농민들이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는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 비율은 1900년까지 52%로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매년 가뭄과 혹한, 홍수같은 자연재해가 일어나서 정기적으로 기근이 발생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러시아 농촌의 상황은 좋지 못했다.

사회적으로는 농민 계급의 분화가 촉진되어서 빈농과 부농의 숫자가 늘어났고 소규모 자영농민 계층이 등장했는데 이러한 계층 분화는 미르의 존속에 균열을 가했다. 러시아에서는 농업용 말이 한반도의 소처럼 농기구 역할을 하여 말이 없으면 땅을 경작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말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가 부유함의 기준이 되었고 말이 없는 농민들은 극빈층, 한 마리만 있는 농민들은 빈농으로 간주되었다. 1880년대 말, 유럽 러시아 지역에서 말이 없는 농가는 27%였고 한 마리만 가진 농가는 29%였다. 5 ~ 25%의 농민들은 10마리에 이르는 말을 가졌다. 알렉산드르 2세 사후의 일이긴 하지만 당시 러시아의 농촌은 대략적으로 27%의 극빈층, 29%의 빈농, 19 ~ 39%의 소농과 중농, 5 ~ 25%의 부농과 지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빈농과 부농 간의 갈등이 심해졌다. 빈농들은 선조들의 관습과 공동체주의에 토대를 둔 미르가 계속 존속하면서 토지 재분배와 약자 구제를 하길 바랐지만, 중농과 부농, 진취적인 농민들은 독립적인 영농과 자기 소유지의 확대, 미르의 폐지를 원했다.

지역적인 차이도 있었다. 유럽 러시아 지역, 특히 중앙 산업 지대 지역은 인구 과잉 때문에 목초지든 삼림이든 전부 다 개간해도 경작지가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시베리아 지역은 경지 부족 문제를 겪지 않았고 농민들도 부유한 편이었다. 시베리아의 농민들은 다른 지역의 농민들보다 가축도 더 많이 가지고 있었다. 농노의 숫자도 인구 100만 중에 3만 7천밖에 되지 않는 편이었다. 제국 정부도 인구 과잉 문제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베리아 이주 정책을 계속해서 실시했는데, 이전의 시베리아 이주 정책이 시베리아 개발을 위한 목적이 강했다면, 이 시기의 시베리아 이주는 농민 문제 해결을 위한 목적이 추가된 것이었다. 그러나 성과는 크지 않았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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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러시아 최초의 기계 공장은 1799년에 설립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국영 알렉산드롭스크 면방직 공장이었다.[2] 그러나 러시아의 도시 중 80%가 인구 5,000명 이내의 소도시였다.[3] 반면에 아마포 공업의 경우에는 1804년 약 285개의 아마포 매뉴팩처가 1845년에는 156개로 감소했다. 다만 이 시기 러시아의 공업은 대기업화되는 경향이 있어서 숫자는 줄더라도 개별 기업의 크기는 커지는 편이었다. 그래서 아마포 공업이 쇠퇴했는지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4] 러시아의 공업 기업 수는 1860년대에 15,000개로 증가했지만, 대부분이 이러한 소규모 공장들이었다.[5] 왜 소작료까지 보상해 줘야 하는지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한데, 아마도 노동자가 도망치는 경우 보상해 주는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6] 당시 러시아는 상인 길드를 만들어 상인들을 여기에 등록시켰는데, 19세기부터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상당한 숫자의 농민들이 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길드에 등록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행위를 했기 때문에 같은 시기 조선의 난전과 비슷한 존재들이었다. 여기서 ‘상업 종사 농민’이나 ‘상업 농민’은 너무 길거나 적절치 않은 듯해서 미등록 상인으로 서술했다.[7] 베르스타는 러시아의 전통 거리 단위로 영미권에서는 '러시아 마일' 로 번역한다. 1 베르스타의 길이는 1.0668km이며 1 베르스타는 500 샤젠과 같다.[8] 중공업이 빠르게 성장하긴 했으나 경공업의 비중이 더 높았다.[9] 대기업 위주로 공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고용자 수가 1천명이 넘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수의 비율은 국가 주도의 산업화와 산업집중화로 유명한 독일보다 3배 더 높았다.[10] 폴란드, 중앙 산업지대, 남부 산업지대,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키예프였다.[11] 돈바스 일대의 석탄 생산량은 전체 러시아의 석탄 생산에서 1위, 전체 석탄 채굴에서 70%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하게 된다.[12] 지금의 도네츠크로, 웨일스인 존 휴즈(John Hughes)가 여기에 공장을 세워서 그의 이름을 따 도시 이름을 유좁카라고 명명한 것이다.[13] 의류, 제화, 금속, 가죽, 목가공업에서 이런 하청제가 많이 퍼져 있었다.[14] 러시아의 노동 시간 단축은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전된 시기인 1880년대부터 매우 느리게 이루어졌다.[15] 주로 수공업 노동자들이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생활하는 노동자들은 고용주의 감시와 감독을 많이 받았다.[16] 큰 방에 100여명의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침구도 없이 대충 누워서 자는 주거형태로서 매우 열악했다. 가족이 있으면 따로 방을 받을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열악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작업장에서 생활하는 노동자들만큼은 아니었지만 공장 기숙사에서 사는 노동자들도 자본가들의 감시를 받았고 외출을 비롯한 각종 권리를 제한당했다.[17] 같은 지역 출신인 노동자들이 단체로(대개 10여명) 아파트를 빌려서 함께 사는 주거 형태이다. 아무래도 사생활이 보장되기 힘들고 사람들이 많이 살다보니 편히 휴식을 취하기 힘들어서 노동자들은 여유가 생기면 아르텔을 떠나려고 했다.[18] 도시로 인구가 몰리다 보니 주거난이 생기고 임대료가 올랐던 탓에, 여유 있는 노동자들이 아니고서는 자기만의 주거 공간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19] 반대로 도시의 중산층들은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는 것이 일상적이었다.[20] 하천 운송량도 59% 늘어났다. 그러나 하천 운송량은 대규모 철도망의 건설로 인해 급격하게 감소한다.[21] 상환금을 다 갚지 못해서 '임시 의무 농민' 상태에 있는 농민들도 많이 이용했다.[22] 이 시대를 다룬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에서는 주인공 레빈이 농민들의 이런 낡은 모습에 분통을 터트리는 장면이 나온다.[23] 사실 주산업이 농업에서 공업 및 광업으로 바뀐 현재에도 비슷한데, 의외로 시베리아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평균소득이 유럽 러시아와 크게 차이도 안나고 삶의 질도 좋은 편이다. 이런 대도시들은 도시를 먹여살릴 큼직한 사업들이 적어도 한두개는 있기 때문읻이댜. 그래서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서부에 비해 시베리아 및 극동에서 범죄율이 적은 이유기도 하다. 물론 투바 공화국, 알타이 지방처럼 낙후된 지역은 주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