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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해밀턴/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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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기2. 미국 독립 전쟁3. 독립 이후4. 초대 재무장관5. 적이 많은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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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년기

알렉산더 해밀턴은 카리브 해영국 식민지 서인도 제도 네비스 섬의 찰스타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스코틀랜드 귀족 가문의 사남이자 상인인 제임스 A. 해밀턴, 어머니는 프랑스 위그노와 영국인의 혼혈인 레이첼 포셋[1]이다. 손위형제로 형인 제임스 해밀턴 2세(1753년 ~ 1786년)가 있다.

해밀턴의 출생년도는 다소 애매한데, 1755년생 또는 1757년생로 보여진다. 처음 아메리카 식민지에 왔을 때에는 1757년 1월 11일생으로 신고했지만, 서인도 제도에 머물던 시절 그의 삼촌은 그를 1755년생으로 신고하는 등 자료가 서로 엇갈린다. 어느 쪽이든 나이를 속일 당위성은 있지만 기존의 학설은 1757년생을, 최근 학설은 1755년생을 지지하는 편이다. 여기서는 1757년생설[2]을 기준으로 나이를 표기하겠다.

아버지 제임스 해밀턴이 가족을 버리고 떠나자[3] 레이첼은 두 아들을 데리고 세인트크로이 섬으로 이사해 작은 가게를 운영하며 살림을 꾸렸다. 사생아기 때문에 교회 부속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해밀턴은 따로 개인 교습이나 유대인 학교에서 공부했고, 가게 일을 도우며 살았다. 해밀턴이 11살이 되던 해 2월 19일, 레이첼이 황열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해밀턴 형제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레이첼의 유산은 라비엔과 그 아들에게로 넘어갔다. 그나마 돌려받은 것이라곤 몇몇 은식기와 지인이 경매에서 건진 책 몇 권 뿐이었다.

빈털털이 고아가 된 해밀턴 형제는 사촌 집에 거두어졌다. 그러나 얼마 뒤 사촌이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두 형제는 각자도생의 길을 걸어야 했다. 제임스 해밀턴 2세는 목수 일을 배우러 떠났고, 해밀턴은 무역상의 점원으로 일했다. 이 때부터 해밀턴은 경제, 무역, 금융, 신용에 대한 실무 지식을 쌓아간 것으로 추측된다.

1772년 8월 30일, 15세의 해밀턴은 강력한 허리케인이 자신이 사는 크리스천스테드를 휩쓰는 모습을 보았다. 해밀턴은 이 때의 종말론적인 광경을 편지로 써 아버지에게 보냈는데, 휴 녹스라는 지역 유지가 이 글을 읽어보고 신문에 기고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 로열 대니시-아메리캇 가젯이라는 지역지에 실린 허리케인 편지는 해밀턴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해밀턴의 글 솜씨와 재능을 눈여겨 본 지역 주민들이 돈을 모아 그를 미 대륙 본토로 유학 보낸 것이다. 1772년 10월, 아메리카 식민지 보스턴에 도착한 해밀턴은 엘리자베스 타운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2. 미국 독립 전쟁

혁명 직전 격동기의 사회를 접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13식민지들과 본토 영국정부와의 대립이 거세지자, 해밀턴은 독립파에 가담했고 미국 독립전쟁기에는 조지 워싱턴의 부관이 되었으며, 독립군 내부의 알력다툼 속에서도 버텨내서[4] 요크타운 전투에도 참가하는 등의 전공을 세우며 입지를 쌓아갔다.

3. 독립 이후

독립 이후에는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지가 미국 내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전쟁이나 차후 영국이나 다른 유럽 국가들과 싸워야 할 강력한 정부의 필요성을 주장한 이들도 있는 반면, 영국의 억압을 기억하라며 중앙정부 권한 축소, 각 주의 강력한 자율권 요구 등 다양한 의견들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1787년에 결국 어떤 정부를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제헌 협의회가 열렸는데 해밀턴은 종신 대통령이 주지사까지 임명할 수 있는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정부안을 구상하였다.[5] 이 시기 토머스 제퍼슨과도 독립전쟁으로 인해 생긴 채무를 각 주가 균등하게 짊어지냐(해밀턴) 아님 각 주가 쓴만큼 알아서 자율적으로 해결하냐(제퍼슨) 문제로 다투었다.

이후 구체적인 헌법 초안이 완성되고 각 주의 비준만이 남아 있었으나 새로운 헌법은 강력한 중앙정부가 주와 인민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며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자 알렉산더 해밀턴과 제임스 매디슨, 존 제이는 후대에 『연방주의자 논고(The Federalist Papers)』라고 불리는 에세이[6]를 신문에 기고하면서 연방 헌법 비준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연방 헌법은 비준이 된다.

4. 초대 재무장관

정부 수립 이후에는 조지 워싱턴의 요청으로 초대 재무장관이 되어 미국 재정문제 해결과 정부 체계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나, 재임 중 유부녀 마리아 레이놀즈와의 불륜 스캔들이 터졌다. 해밀턴은 마리아 레이놀즈와 바람을 피우다가 본남편인 제임스 레이놀즈에게 들켰는데, 제임스는 이를 빌미로 해밀턴에게 돈 뿐만 아니라 재무장관으로서 손댈 수 있는 이권을 달라며 협박했다. 견디다 못한 해밀턴은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란 식의 심정으로 사재를 털어서 돈을 주고 관계를 끝냈다. 이걸로 대충 정리가 되나 싶었더니 정적들이 냄새를 맡고 스캔들을 터뜨린 것. 해밀턴은 '재무장관으로서 월권이나 비리를 저지른 적은 없었으며 어디까지나 개인 돈으로 해결했을 뿐이다'라고 해명했지만 불륜 자체로 인한 이미지 하락은 무마할 수 없었다.

5. 적이 많은 사나이

해밀턴은 성격과 이념 문제로 인해 정적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에런 버와의 관계는 버가 해밀턴의 장인 지역구에 출마해 이기면서 틀어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결국 3대 대통령 선거에서 36번째 투표 때 해밀턴이 버를 대통령으로 만들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성향이 정반대였던 토머스 제퍼슨을 지지하면서 극으로 치닫게 된다. 이후로도 해밀턴이 공개적으로든 비공개적으로든 버의 치부를 비난하는 글들을 기사화하고 버를 향한 정치적 공작을 펼친다는 의혹까지 나오면서 결국 분노한 버는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결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죽는 것보다 비겁한 치욕으로 받아들여졌기에 해밀턴은 어쩔 수 없이 결투신청을 받아들였다.

1804년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초유의 결투가 벌어졌고[7] 해밀턴은 버의 총을 맞고 다음날 결국 사망했다. 향년 40대 후반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인들을 충격에 빠뜨렸고, 현직 부통령 에런 버는 살인 피의자로 도주, 잠적해 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각계 각층의 시민들이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뉴욕시는 그의 장례식날 모든 상가를 철시하고 그를 애도했다.

성격적으로도 사교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인물이었고 강력한 중앙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에 정부의 권력보다는 주와 인민의 자유와 권리 보호를 중시하는 정반대의 인물이던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반연방주의자들과는 사이가 당연히 안 좋았고, 같은 연방주의자였던 존 애덤스도 자기만큼이나 꼬장꼬장하기 그지없던 해밀턴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예 결투까지 벌인 에런 버와의 관계는 말할 것도 없고. 건국의 아버지들 중에 사교성이 안 좋다고 평가받은 인물들은 많았지만 해밀턴은 당대 거물급 인사들에게 유독 비난과 비판,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오죽하면 '해외에서 태어난 이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다.'는 조항이 해밀턴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 다만 해밀턴은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총애를 받았기에 워싱턴 은퇴 전까진 정치적 입지를 다질 수 있었지만, 결국 최후는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헌데 그를 쏴죽인 버는 30년이 지나 재판에서 우연아니게도 바로 해밀턴의 아들인 해밀턴 주니어와 법정 대결을 벌이게 된다. 아들 주니어는 1786년생으로 아버지가 죽을때는 컬럼비아 대학교를 다니게 있었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 법대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주니어는 정치에 끼어들지 않았으나 거물 정치인들인 헨리 클레이, 존 칼훈, 제임스 먼로재커리 테일러 대통령을 포함한 이들과 친하게 지내며 정치적 교류를 가졌으며 에이브러햄 링컨과도 만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버는 1833년에 난데없이 77살 나이로 19세 연하의 부유한 과부 엘리자 주멜(1775년 ~ 1865년)과 결혼했다. 엘리자 주멜은 부자인 남편 스테판이 죽은지 1년만에 재혼했지만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멜은 버의 토지 투기 손실로 인해 자신의 재산이 줄어들고 있음을 깨닫고 겨우 결혼 넉달 만에 그와 헤어졌다. 그런데 이혼 소송을 낸 주멜이 고용한 변호사는 다름아닌 버가 쏴죽인 해밀턴의 둘째 아들인 알렉산더 해밀턴 주니어(1786년 ~ 1875년) 변호사였던 것이다. 우연아니게도 아버지를 쏴죽인 원수에게 재판으로 복수한 셈이 되었다.

돈도 없어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버는 결국 이혼했고 오래 안가, 허름한 하숙집에서 죽었고 뉴저지주 프린스턴에 있는 그의 아버지 근처에 묻혔다. 비록 늘그막이라도 주니어는 아버지 원수가 재산이 거덜나고 가난에 시달리며 죽게하여 원수를 갚아준 셈이 되었다. 주니어는 부자 상인인 윌리엄 녹스의 딸인 일리자와 결혼했고 부동산 사업으로도 꽤 대박을 거두며 부유하게 살다가 1875년까지 89살 천수를 누렸다.

해밀턴의 아내 엘리자베스는 1854년까지 97살 장수를 누렸다. 후손들을 보면 큰 아들 필립도 1801년 19살로 결투했다가 총에 맞아 죽었으며 큰 딸 안젤리카는 오빠 필립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아 17살 나이로 정신적으로 무너져 1857년 만 72살로 죽을 때까지 정신병 치료를 받으며 홀로 살아야 했던 비극적 삶을 보냈다. 셋째 아들 제임스 알렉산더 해밀턴은 앤드류 잭슨 지지자로서 검사를 역임했고 변호사로 살다가 1878년까지 90살 장수를 누렸다. 넷째 아들 존 처치 해밀턴도 변호사, 전기작가로 아버지에 대한 책을 서술했으며 1882년 90번째 생일을 한달 앞두고 숨을 거뒀다. 다섯째 아들 윌리엄 스테판은 군인으로 인디언 전쟁, 멕시코 전쟁에 참전했으며 독신으로 살다가 정치인 출마,금광사업에 투자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콜레라에 걸려 1850년 53살로 죽었다.둘째 딸인 엘리자 해밀턴은 평범하게 살다가 1859년에 60번째 생일을 한달 앞두고 세상을 떠났으며 막내 아들인 필립은 1802년 큰 아들 필립이 죽은지 1년뒤에 태어났기에 큰 아들 이름을 그대로 지어줬는데 변호사로 살다가 1884년 82살로 세상을 떠났다.

[1] 레이쳇 포셋은 원래 독일 또는 덴마크 상인 요한 미하일 라비엔의 아내였다. 라비엔 사이에서 아들을 낳은 후, 남편과 아들을 버리고 제임스 해밀턴과 네비스 섬으로 다른 살림을 차렸다. 혼외자이자 사생아로 태어난 해밀턴 형제는 이러한 출생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불이익을 받았다.[2] 해밀턴 본인이 서류에 적은 출생년도.[3] 그런데 제임스 해밀턴이 친부가 아니라는 추측도 있다. 양친을 모두 잃은 뒤엔 어머니의 남자 지인 집에 의탁했는데, 친구 관계로 지낸 그 집 아들과 형제처럼 빼닮았기 때문. 어머니인 레이첼 포세는 강인한 여성이었지만 남자가 은근 많은 마성의 여인이었다나. 어쨌거나 해밀턴은 제임스가 가출한 후에도 꾸준히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며 애정을 표했다.[4] 워싱턴의 새 부관이었던 찰스 리가 워싱턴을 모함하는 사건이 벌어진 와중에 해밀턴의 뛰어난 외국어 실력으로 친분을 쌓은 프랑스 지원군 라파예트 후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5] 해밀턴은 대륙의회 의원 시절 독립전쟁 직후 각 주의 이해관계가 얽혀 군인들이 봉급도 제대로 못받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래서 군인 시절 상관이었던 워싱턴에게 편지를 보내 군의 불만과 쿠데타 조짐을 알리며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런 일도 그의 중앙집권적 정부 추구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6] 단순히 헌법을 옹호한 것 뿐만이 아니라 이 헌법을 어떻게 적용하고 이렇게 탄생한 국가의 권한은 어떻게 해야 하고 등의 이론적인 내용도 전부 설명하는 글이다.[7] 당시엔 이런 결투가 불법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주마다 차이가 있었고, 근본적으로 목숨을 건 위험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대중들의 인식은 좋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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