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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7:34:54

안중읍/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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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중읍의 역사 개요2. 삼국시대3. 남북국시대4. 고려시대5. 조선시대6. 일제강점기7. 광복과 안중면의 형성 (1945~1980년대)
7.1. 1950년대: 안중장과 시가지 팽창 시작7.2. 1960~1970년대: 시가지 팽창과 아산만 방조제 건설7.3. 1980년대: 도로 정비와 안중면 승격
8. 현화지구 개발 (1990년대)
8.1. 현화지구의 과거 (~1995)8.2. 현화지구 개발 신호탄 (1994)8.3. 평택항 본격 개발 시작 및 현화지구 개발 착수 (1994~1995)8.4. 현화지구 토지구획 시작 (1996년)8.5. 토지구획 (1997년)8.6. 도로 포장 (1998년)8.7. 현화지구 기반시설 공사 완료 및 늘푸른아파트 건설 (1999년)
9. 현화지구 발달과 안중읍 승격 (2000년대)
9.1. 아파트 건설과 읍 승격 (2000~2002)9.2. 시가지 성장과 도서관 건립 (2003~2005)9.3. 시가지 정착화 (2005~2007)9.4. 아파트 완공 및 버스터미널 신설·이전 (2007~2010)9.5. 2000년대의 변화: 도로망 확충과 시가지 외형 형성
10. 송담지구와 시가지 팽창 (2010년대)
10.1. 송담지구 개발 (2010~2015)
10.1.1. 송담지구의 과거 (~2009)10.1.2. 노반공사와 토지구획 (2010~2014)10.1.3. 기반시설 급속 개발 및 최초의 도로 개통 (2015년)
10.2. 송담지구 발달 (2016~2019)
10.2.1. 2016년: 송담지구의 발달
10.2.1.1. 송담지구 2016년 총결산
10.2.2. 송담지구의 발달 (2017~2019)
10.3. 현화지구: 상점 증가와 도로 재정비 (2010~2019)
11. 화양지구와 안중역 개통 (2020년대)12. 안중읍 역사 요약

1. 안중읍의 역사 개요

• 안중읍 역사 Preview
: 안중읍의 역사는 안중장(安仲場)의 형성으로부터 시작된다. 현재의 현덕면 황산리 일대는 조선시대 때 지명이 상안중(上安仲)이었고, 이 지역은 직산현(稷山縣, 현재의 천안시 서북구)에 속해 있었다. 이때 직산현의 시장인 직산장터가 상안중이라는 장소에서 열리게 되었는데, 자연스레 안중장(安仲場)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게 되었다.

조선시대 후기, 안중장의 보부상들은 현덕면의 양반들에 의해 내쫓기고서 현재의 안중읍 안중리 일대로 옮겨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곳은 동서남북으로 도로가 있었던 곳이라서 포승에서 나오는 해산물을 교류하기에 편리했다. 이렇게 안중장은 주변 지역과의 교류를 통해 서해안의 주요 시장으로 성장해갔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경부선 평택역이 세워짐에 따라 일본인들이 안중장 주변에 옮겨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한편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종교 활동이 지속되기도 했는데, 몇 지식인의 도움으로 안중장 주변에 교회(대한성공회)가 세워졌다. 한편 일제에 의해 학교(안중초등학교)가 세워지기도 하였다. 이렇게 마을이 형성되고 각종 시설이 세워지자 안중은 서평택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안중장을 중심으로 각종 상가가 모여들었다. 이는 1970년대 이후까지도 이어져서 안중 시가지의 팽창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시가지가 팽창함에 따라 교육시설의 필요성이 강조되어 안중중고등학교와 안중상업고등학교(現 물류고등학교)가 세워졌다.

1980년대에는 안중장이 조선시대 말에 자리를 잡았던 곳 주변의 구불구불한 국도가 직선화 작업을 거치면서 현대 안중읍의 외형이 완성되었다. 한편 시가지를 중심으로 3~6층짜리 빌라가 증가했는데,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안중읍의 시가지는 현대의 안중리 구도심 수준으로 팽창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가지 팽창은, 서평택출장소의 설립(1987년)안중리가 안중면으로 분리독립, 승격(1989년)을 하는 데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안중면이 분리독립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포승·청북·현덕·오성면에서 일부 리(里)를 떼어와 안중면에 이속시키는 방법을 통해 안중면은 현화리, 안중리, 송담리, 성해리, 학현리, 대반리, 삼정리, 금곡리, 용성리, 덕우리의 10개 법정리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1990년대에 와서는 한중수교(1992년)가 체결됨에 따라 중국과의 교류가 늘기 시작하면서 평택항과 포승공단의 건설이 가속화되어 갔는데, 이들의 주거지를 해결할 수 있는 배후도시로서 안중의 현화지구 개발이 방안으로 제시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 안중장을 비롯한 안중리 도심 남부에 현화택지지구가 건설되었다.

1995년에 토지 보상이 끝난 현화택지지구는 1996년부터 본격적으로 토지 구획에 들어갔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갑자기 늘어난 자가용과 교통량으로 인해 왕복 2차선에 불과했던 39번 국도는 명절 때마다 심각한 교통난을 겪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39번 국도 바로 옆에 현화지구를 개발할 경우 앞으로의 교통난은 훨씬 더 심해질 것이 우려되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논밭으로 이루어진 송담리 쪽에 외곽으로 우회하여 왕복 4차선의 39번 국도가 1998년 즈음 건설되었다.

1999년이 되자 현화지구는 토지구획을 전부 다 마무리하여 현화지구 최초의 아파트인 늘푸른아파트가 입주를 시작했고, 39번 국도의 우회·확장 사업도 마무리되어 송담리 쪽엔 신창아파트가 완공을 하게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현화지구에 수많은 아파트 단지가 세워지게 되었다. 그 결과 인구 증가로 2만명을 돌파한 안중면은 2002년 11월 5일 안중읍으로 승격하였다. 특히 2003년에서 2005년 사이에는 현화지구 아파트 단지의 70% 가량이 건설되었으며, 아파트 사이 사이에 학교와 각종 상업 시설이 들어선 것도 이때였다.

2010년대에 와서는 현화지구의 발달이 완료 단계에 접어들었고, 동시에 안중리에 있었던 시외버스터미널 등 각종 시설이 현화리로 이전되는 상황이 펼쳐졌다. 한편 이때부터는 현화지구 동부에 위치한 송담지구가 2009년부터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2018년 이후로는 송담힐스테이트아파트를 비롯해 각종 건물이 완공되어서 어느 정도의 시가지 모습을 형성하고 있다.

2. 삼국시대

삼한시대 안중은 마한의 영역에 속했다. 이후 3세기부터 백제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 정책으로 백제 문주왕이 서기 475년에 도읍을 웅진으로 천도하면서 현대의 안중 지역은 고구려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이때 안중읍 용성리 부근에 상홀현(上忽縣)이 설치되었다.

3. 남북국시대

삼국통일 후에는 경덕왕 때의 행정구역 개편(757년)으로 상홀현이 차성현(車城縣, 또는 거성현)으로 편제되었고 안중읍 남부에는 광덕현이 설치되었다.

4. 고려시대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됨으로써 지방행정구역이 보다 세분화되었다. 현종 때 5도 양계 체제가 완성됨으로써 평택 지역은 6개의 부곡, 6개의 현, 3개의 장, 1개의 역이 설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안중 지역에는 용성현이 설치되었다.

5. 조선시대

조선시대 때의 행정구역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현재의 안중읍, 포승읍, 청북읍, 현덕면, 오성면이란 행정구역은 없었고, 대신 수원부와 충청도의 직산현(稷山縣, 현재의 천안시 서북구 일부)이 서평택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때 당시 수원부의 크기는 매우 커서, 현재의 수원지역은 물론이고 서평택 지역의 대부분도 포함하고 있었다. 수원군에 직접적으로 포함되지 않은 서평택 지역은 대부분 직산현에 속했다.

이때 당시 서평택에 위치한 직산현에는 총 3개의 면(面)이 존재했었는데 이들은 각각 직산현 외야곶면(外也串面, 現 포승읍 남부), 직산현 언리면(偃里面, 現 오성면 남부), 직산현 안중면(安仲面, 現 안중읍 대반리, 삼정리, 현덕면 황산리 일대)으로 구성됐다. 이 중 직산현의 안중면에는 현재의 안중읍 대반리와 삼정리, 그리고 현덕면의 황산리를 포함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바로 직산현 안중면에 포함되어 있었던 황산리 일대인데, 황산1리의 옛지명은 상안중(上安仲), 황산2리의 옛지명은 하안중(下安仲)이었고, 이 두 마을을 합하여 "안중(安仲)"이라고 불렀다. 때문에 이 두 마을을 포함하는 면(面)의 이름 역시 안중면(安仲面)이었다.

이러한 황산리에는 직산현의 장터인 직산장터가 있었는데, 대반3리의 '안중창(安仲倉)'에서 열려 안중장이라고도 불렸다. 안중창은 現 안중읍, 현덕면, 포승읍 지역에 산재한 직산현의 조세를 모아 강 건너 팽성읍 노양리 경양창으로 운반했던 조창[1]이었다.

이렇게 현덕면 황산리 일대에 위치했던 안중장은 조선시대 후기에 현덕면 황산리에서 현재의 안중읍 안중리 쪽으로 옮겨오기 시작했다. 안중장의 이전과 관련된 일화로는 경주 정씨들이 마을 옆에 시장이 있으니 시끄럽다고 하여 강제로 옮기게 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구한말 현재의 안중읍 안중리로 옮겨진 안중장은 5일장이긴 했지만 상설시장처럼 평일에도 열렸다. 당시 평택서부지역에서는 숙성리에 오성장과 현곡리에 신포장이 있었지만 규모가 작았거나 금방 없어졌기 때문에 거래가 제대로 이뤄진 곳은 이곳밖에 없었다.

이후 1896년 광무개혁 당시 갑오개혁의 23부제가 13도제로 개편되어 직산현의 안중면이 폐지됨에 따라 옛 광덕면·현암면·오정면 등으로 편입되면서 행정구역 상에서의 '안중'은 자취를 감추었다. 한편 1914년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는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옛 직산현 안중면 땅은 다시 오성면·청북면·포승면·현덕면으로 분산 귀속되었다.

6. 일제강점기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서평택 지역은 오성면·청북면·포승면·현덕면의 4개 면으로 분산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안중장은 국도 38호선과 국도 39호선이 교차하는 길목에 위치했는데, 충청남도의 지역과 교역하면서 서해안의 주요 시장으로 성장했다. 동시에 일제가 서평택 지역의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일본인 농업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면서 안중의 규모가 커졌다. 일제는 안중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안중초등학교(1922년 개교), 금융조합과 같은 근대 시설을 세웠다. 이와 같이 주변 지역과의 교역이 늘고 근대 시설이 설치됨에 따라 안중은 서평택지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안중 구 시가지에 큰 발전을 가져다 준 시설은 바로 종교 기관이었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침략 앞에서 우리 민족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는데, 이 중 서유럽에 영향을 받은 진보적인 지식인들은 근대화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면서 개신교의 수용에 앞장섰다. 이후 1889년 11월에 초대 성공회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찰스 존 코프(Charles John Corfe) 주교가 내한하면서 우리나라에서의 성공회 선교가 시작되었고, 이후 점차 서울, 인천, 강화도를 중심으로 뻗어나갔다. 경기 남부 지역은 대한성공회의 네번째 선교지였는데, 1904년부터 시작된 경기남부 선교는 수원을 시작으로 평택과 천안, 아산 일대로까지 퍼져나갔다. 특히 평택의 경우 1906년에 팽성읍 객사리에 '성 요한 교회'가 설립됐으며, 얼마 뒤 1909년에는 안중읍 덕우리에 성공회 '덕우리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구한말에 세워진 안중지역 최초의 그리스도교 교회인 덕우리교회는 이택화의 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1934년에 이택화는 덕우리교회를 모체로 하는 성공회 안중교회를 서평택 지역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던 안중 구 시가지에 설립하였다. 안중교회의 발전에 힘을 쓴 사람은 이택화만이 아니었다. 박병무씨 역시 일제강점기 팽성읍에 위치한 성 요한교회와 안중교회를 자주 오갔고, 해방 후에는 서평택 지역에 중등 교육기관이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자신의 아들과 박재필 등의 도움을 받아 안중고등공민학교(現 안중중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한국전쟁 뒤에는 전쟁고아들을 돌보기 위해 안중고아원을 설립하였고, 안중중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은 뒤에는 고아들과 학생들의 자립을 위해 목공강습소도 설립했다.

파일:대한성공회 안중교회.jpg
=> 대한성공회 안중교회 사진(The Anglican church of Holy spirit) - (성신/설립 1934/축성 1999.05.30)
성공회는 초대교회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사도적 전통과 16세기 이래 개혁교회로서 쌓아온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 형성된 독특한 장점인 성서, 전통, 이성을 중요시 하는 교회이다. 새계 성공회 공동체는 전세계 164개국 430개 지역에 독립적이고 자치적인 지역 교회로 이루어져 있으며 신자는 약 1억명 정도이다. 대한성공회는 찰스 존 코프주교(Charles John Corfe)가 1889년 9월 29일 제물포 항을 통해 들어와 인천과 서울에서의 선교를 시작으로, 현재 독립적인 자치관구로서 서울, 대전, 부산 세 개의 교구에 120여 곳의 교회와 나눔의 집 등 다양한 사회선교기관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서울교구에 속한 안중교회는 1934년 선교가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 교인의 증가로 교회를 네 번이나 증축하며 안중지역의 유서 깊은 교회로 성장하였다.
안중교회의 발전은 오늘의 안중 종합고등학교의 전신인 안중 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한 박병무(어거스틴: 1929년 사제서품) 신부가 1934년 설립하여 1956년 별세할 때까지 22년간 교회와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고 또한 6.25 동란에는 전쟁 중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을 설립하여 이웃과 함께하는 선교를 펼치기도 했다. 현 성전은 1999년 5월 30일 축성되었고 성전 내에 소규모 노인요양시설인 "성신은빛마을"이 평택시로부터 수탁받아 운영되고 있어 지역사회 속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교회이다.

7. 광복과 안중면의 형성 (1945~1980년대)

조선시대 때 현덕면 황산리의 상안중(上安仲)이란 동네에서 열리던 직산장터는, 이후 안중장(安仲場)이라는 이름으로 현재의 안중읍 안중리 지역에 정착하였다. 일제강점기 때는 안중장을 중심으로 학교와 교회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섬에 따라 서평택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서평택의 중심지로 부상한 안중장(安仲場)은, 해방 이후 시장 주변에 각종 상점과 마을, 시설들이 들어서면서 시가지 팽창을 이어가게 된다. 그 결과로 1987년에 서평택출장소가 세워지게 되었으며, 1989년에는 안중리(安仲里)가 안중면(安仲面)으로 승격하기에 이르렀다. 안중면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주변에 존재했던 서평택 4개 면(포승·청북·오성·현덕)에서 각각 일부 마을을 편입시킴에 따라 현재의 10리 체제를 완성시켰다.

7.1. 1950년대: 안중장과 시가지 팽창 시작

파일:안중읍 1954.png
: 1954년 촬영된 흑백 항공사진을 살펴보면, 현재의 안중리 지역에는 안중시장으로 추정되는 각종 집들이 마을처럼 모여 있고, 그 북쪽으로는 안중초등학교로 추정되는 학교의 운동장을 볼 수가 있다.

또한 항공 사진을 잘 보면, 중심부 그 주변으로 각각 포승면(서쪽), 청북면(북쪽), 현덕면(남쪽), 오성면(동쪽)으로 뻗어가는 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길 중에서 오성면으로 뻗어 있는 길로는 평택역이 위치한 중심부로 향할 수 있었고, 남쪽(현덕면 방향)으로 뻗어 있는 도로는 중간에 두 방향으로 갈라져서 하나는 현재의 현덕면사무소가 있는 방향으로, 하나는 현재의 광덕초등학교 및 마안산이 위치한 방향으로 꺾어져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7.2. 1960~1970년대: 시가지 팽창과 아산만 방조제 건설

일제강점기 때 서평택의 중심지로 부상한 안중장은 해방 이후 시장을 중심으로 여러 상점이 모여들면서 도시화되고 시가지가 팽창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60~1970년대에는 학교가 새로 설립되는 등 시가지 팽창이 가속화되어 갔으며, 아산만방조제 건설(1974년)로 인해 바닷물이 자주 들어왔던 지역이 농지로 변모함에 따라 지도 상에서 커다란 변화가 나타난 시기였다.

#001. 시가지 팽창: 시설 증가
파일:안중읍 1977.png
: 위는 1977년에 촬영된 항공사진이다. 위의 1954년 사진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느껴질 것이다. 우선 큰 차이는 학교가 1개(안중초등학교)에서 2곳(+ 안중중고등학교, 안중상업고등학교(현 물류고등학교)) 더 늘어났음을 알 수가 있다. 이들은 각각 1964년, 1956년에 개교하였다.

학교 수 이외에도 눈에 띄는 것은 시가지의 크기 변화다. 1954년과 비교해 보면 좀 더 커진 것을 육안으로도 확인해볼 수 있는데, 항공사진으로 가늠해본 1977년의 안중 시가지 크기는 약 136,000㎡(=0.136㎢)로, 56,000㎡였던 1954년에 비해 약 2.4배 정도 커졌다.

#002. 아산만 방조제 건설: 현재의 해안선 등장
파일:안중읍 1950s 안성천.png
1950년대 안성천 사진
파일:안중읍 1970s 안성천.png
1970년대 안성천 사진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기 이전인 1960년대까지만 해도 바닷물이 안성천 깊숙이까지 들어와서 서평택 일대의 경작지가 지금보다 훨씬 더 좁았었다. 밀물 때가 되면 금곡리 앞 동네까지 바닷물이 들어올 정도로 갯골이 넓게 형성되어 있었지만, 1974년 5월 22일에 각각 아산만 방조제와 남양방조제가 건설되고 나서부터는 바닷물이 깊숙이 못 들어오게 되어서 강과 육지 사이의 경계선이 현재의 모습에 이르렀다. 관련 기사

7.3. 1980년대: 도로 정비와 안중면 승격

• 1980년대에는 안중장 주변의 구불구불한 국도가 직선화 작업을 거치면서 현대 안중읍의 외형이 완성되었다. 한편 3~6층짜리 빌라가 증가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안중읍의 시가지는 현대의 안중리 구도심 수준으로 팽창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가지 팽창은, 서평택출장소가 설립(1987년)되고 안중리가 안중면으로 분리독립·승격(1989년)하는 데 있어서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안중면이 분리독립한 뒤에는, 기존의 포승·청북·현덕·오성면에서 일부 리(里)를 떼어와 안중면에 이속시키는 방법을 통해 안중면은 현화리, 안중리, 송담리, 성해리, 학현리, 대반리, 삼정리, 금곡리, 용성리, 덕우리의 10리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001. 1984년 항공사진: 도로 정비 → 현대 안중읍의 외형 완성
파일:안중읍 1984.png
1984년의 항공사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은 도로 정비에 있다. 현재의 안중읍은 38번 국도와 39번 국도가 매끄럽게 교차하는 곳 주변에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지만 1974년까지만 해도 반듯이 뻗은 도로가 없어서 모습을 알아보기가 많이 힘들었다. 그러나 1984년의 항공사진은 이와 다르게, 38번 국도와 39번 국도[2]가 비교적 직선의 형태로 그어져 있어 현재의 안중읍 모습과 많이 비슷하게 변하였다.

파일:1980 안중주변지도.png
위 사진은 1980년대의 안중 주변 지도이다. 국도가 직선화됨에 따라 현재 안중읍의 외형이 완성된 모습을 이 지도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002. 안중면 승격(1987~1989년)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으로 포승면·오성면·청북면·현덕면에 행정구역이 분할 귀속되어 기존의 직산현 안중면이란 행정구역은 자취를 감췄으나, 1987년 7월 1일 평택군 서부를 관할하는 안중출장소가 출범하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안중출장소는 안중리 마을회관을 임대하여 출장소로 사용했다가 1988년 12월 20일 청사를 준공하였고, 1989년 4월 1일에는 안중출장소가 안중면으로 승격하기에 이른다.

군조례 제1220호에 따르면 안중면이 출범하면서 바뀐 행정구역을 열거해 볼 때, 오성면 안중리·학현리·금곡리·대반리·삼정리는 각각 안중면 안중리·학현리·금곡리·대반리·삼정리로, 청북면의 용성리·덕우리는 각각 안중면 용성리·덕우리로, 포승면 석정리 일부는 안중면 성해리로, 현덕면의 인광리 일부와 화양리 일부는 각각 안중면의 송담리와 현화리로 재편되어 최종적으로 현재의 10개 행정리 체제가 갖춰지게 되었다.

+ 1989년의 컬러 항공 사진 (구글어스)
파일:안중읍 1989.png
안중면이 분리독립한 1989년의 컬러 항공 사진이다. 서평택 지역에서 안중면이 가장 발달돼 있는 모습은 이때에도 나타나 있다.

8. 현화지구 개발 (1990년대)

1992년 8월 24일 한중 수교 이후 중국과의 경제적 교류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서해안의 가치가 점차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중국과의 교류를 증대시키기 위한 항구 건설로 모색한 장소가 바로 중국하고 가까운 거리에서 무역을 할 수 있는 평택이었다.

평택항은 1986년 12월 5일에 개항되어 공사를 이미 시작하고 있었으나 한중 수교 이후 개발은 더욱 더 가속화되어 갔다. 이와 함께 평택항에서 오가는 인원을 수용하기 위한 배후 주거지의 필요성이 점차 대두되었는데, 그 방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안중 현화지구 개발이었다.

8.1. 현화지구의 과거 (~1995)

파일:현화리 1995.png
: 1995년의 현화리 항공사진

현화리는 본래 논과 밭, 그리고 중간에 마을이 드믄드믄 위치했던 완전한 시골동네였다. 면적이 큰 동네였으며 지면이 편평하지 않고 울퉁불퉁했다. 현재의 주공아파트 단지 자리에는 과수원도 있었다.

그러다가 1996년부터 현화택지지구 개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울붕불퉁한 부분이 평평하게 닦이고, 기존에 위치했던 마을과 논밭, 과수원 등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파일:안중지도 1990s.png
현화지구가 개발되기 직전인 1990년대 안중 지도이다.

8.2. 현화지구 개발 신호탄 (1994)

파일:안중 1994 매일경제 기사.png
해당 기사 링크: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122400099121001&ed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4-12-24&officeId=00009&pageNo=21&printNo=8965&publishType=00010
1994년 12월 24일 토요일, 매일경제신문에 '안중 현화지구 8천 300가구 내년말 분양'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올라왔다. 평택항의 배후도시로서 현화지구를 개발한다는 내용으로, 당시 평택군은 경기도 외곽에 위치한 일개 시골에 불과했다. 그런 곳에 건설사와 8300여가구의 택지개발을 체결한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8.3. 평택항 본격 개발 시작 및 현화지구 개발 착수 (1994~1995)

파일:서평택 1994.png
1994년의 서평택 지역 항공사진
파일:서평택 1995.png
1995년의 서평택 지역 항공사진

1994년에서 1995년 사이에는 평택항이 본격 개발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와 함께 현화지구 개발도 시작되었는데, 1994년 12월 24일 안중 현화지구 분양을 기사화한 매일경제신문 내용을 참고해 보면 1995년 상반기에는 현화지구 개발에 필요한 토지 보상을 완료했을 것으로 보인다.

8.4. 현화지구 토지구획 시작 (1996년)

파일:서평택 1996.png
1996년의 서평택 지역 항공사진

1996년부터는 현화지구 토지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항공사진으로도 충분히 이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는데, 1995년까지만 해도 논밭이었던 기존 안중리 주변의 땅들이 1996년에 와서는 전부 공사를 시작하여 흙색으로 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안중면 동쪽으로 도로가 새로 건설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존에는 안일물류고등학교 옆을 지나는 도로(현재의 안중읍 안현로)를 39번 국도로 사용했었으나, 왕복 2차선밖에 안 되는 규모 때문에 자가용 증가와 현화지구 개발 등에 따른 교통 혼잡을 우려하여 송담리를 관통하는 새로운 4차선 도로를 신설하게 된 것이다.

8.5. 토지구획 (1997년)

파일:서펑택 1997.png
1997년의 항공 사진

1997년에는 항공 사진으로 볼 때, 토지 구획이 전부 완료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8.6. 도로 포장 (1998년)

파일:현화지구 1998.png
1998년의 현화지구 사진 - 1998년에는 기본적인 도로 건설을 완료하여 현재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8.7. 현화지구 기반시설 공사 완료 및 늘푸른아파트 건설 (1999년)

파일:현화지구 1999.png
1999년 현화지구 사진

1999년에는 도로와 같은 기반 시설 공사가 완료되었는데, 이에 따라 늘푸른아파트와 늘푸른공원 건설이 진행되었다. 한편 39번 국도의 신설에 따라 송담리에는 신창아파트가, 38번 국도 변에는 금곡우림아파트가 각각 새로 건설되었다.

9. 현화지구 발달과 안중읍 승격 (2000년대)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으로 넘어가는 시기는 안중읍의 발달에 있어서 커다란 변화가 있던 시기였다. 아파트라고 해봐야 동환아파트가 전부였고 그밖에는 10층도 채 되지 않는 건물과 구불구불한 도로, 변변치 않은 상업시설만이 주류를 이루었던 1990년대의 <안중면>이, 불과 10년이 지나자 기본 20층이 넘는 8천세대의 아파트단지, 직선으로 반듯하게 닦인 도로, 그 사이로 세워진 학교와 각종 상업시설로 가득찬 2000년대의 <안중읍>으로 발달하였다.

새천년(2000년)을 기준으로 수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인터넷을 비롯한 IT 기술이 발달하여 정보혁명을 맞이하였고 우리 일상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런 급격한 변화와 발전 속에서 안중 역시 커다란 변화를 2000년대에 맞이하게 된다. 그 계기는 바로 현화지구의 발달이었다.

9.1. 아파트 건설과 읍 승격 (2000~2002)

파일:현화지구 2003.png
2003년 3월 18일에 촬영된 사진 (구글어스)

위 사진에서 2003년 3월 18일에 완공된 현화지구의 아파트는 늘푸른아파트, 성원아파트, 현대아파트 이렇게 3개에 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완공되지는 못했지만 현대~2차, 동신 1차, 동신 2차가 한참 공사 중에 있고, 그밖에도 수많은 곳에서 아파트가 건설되기 시작한 모습이 항공사진에서 포착된다. 또한 이 시기에는 현화초등학교, 현화중학교 등 여러 학교가 신설되었다.

이렇듯 인구 증가에 필요한 아파트와 학교 건설로 인해 안중면은 인구를 2만 명 이상 돌파하게 되어 2002년 11월 5일, 안중읍으로 승격하였다.

9.2. 시가지 성장과 도서관 건립 (2003~2005)

파일:현화지구 2005.png
2005년 3월 5일에 촬영된 항공 사진 (구글어스)

2003년의 항공사진과 달리 2005년의 항공 사진은 아파트로 꽉 들어차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기존에 완공이 되어 있던 늘푸른아파트, 성원아파트, 현대아파트를 포함하여 동신 1~3차 아파트, 주공아파트, 우림필유아파트, 건영캐스빌아파트 등 현화지구에 계획된 아파트 부지에 모든 아파트가 거의 다 완공된 상태로 변모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03년까지만 해도 아파트가 별로 건설되어 있지 않아서 허전함이 많이 느껴졌었는데 2년만에 커다란 변화를 맞이한 것이다.

또한 이 사이에 현일초등학교, 평택안일초등학교가 개교하였고, 삼익아파트 주변 상업 지역에는 상가 건물이 많이 건설되었으며, 현대 3차 아파트 북쪽에는 안중시립도서관(2005년 4월)이 새로 신설되었다.

9.3. 시가지 정착화 (2005~2007)

파일:현화지구 2007.png
2007년 4월 26일에 촬영된 항공사진 (구글어스)

2007년은 이제 최근 현화지구의 모습이랑 비교해도 차이를 거의 못 느낄 정도로 웬만한 건물들이 다 들어서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아파트를 살펴보자면, 우림필유골드아파트를 제외하고 모든 아파트가 완공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학교 역시 2년 동안의 시간 동안 현화고등학교, 안일중학교가 새로 신설돼 2018년 현재 안중읍에 위치한 학교 수와 일치하게 된다. 또, 늘푸른아파트와 서광아파트 남쪽에 위치한 상가 단지에도 건물이 상당수 지어진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9.4. 아파트 완공 및 버스터미널 신설·이전 (2007~2010)

파일:안중읍 2010.png
2010년에 촬영된 안중읍 항공사진 (다음지도)

2010년에 들어서는 우림필유골드아파트가 완공됨에 따라 현화지구에 계획된 부지에 아파트가 전부 다 들어서게 되었으며, 삼익아파트 근처 역시 수많은 상가가 입점하게 되어 현재의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

특히 안중시외버스터미널은 2000년대까지만 해도 안중 구도심에 속하는 동북부에 위치해 있어서 혼잡스러웠지만, 2010년 8월 20일에 전용 건물과 주차장을 겸비한 현화지구 동남부의 부지로 이전되었다.

파일:안중지도 2000s.png
2000년대의 안중 지도이다. 현화지구 개발로 현대 안중읍의 모습이 갖춰졌다.

9.5. 2000년대의 변화: 도로망 확충과 시가지 외형 형성

10. 송담지구와 시가지 팽창 (2010년대)

송담지구 개발은 현화지구 개발이 끝난 안중읍에 새 활기를 넣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기존의 안중리 구도심과 현화지구만으로는 4만명이라는 인구에 비하여 상업·문화 시설이 부족했기 때문에 안중읍민들은 버스를 타고 30~40분 이상의 시간을 소요해서 평택시내까지 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2018년 현재 송담지구에 들어서고 있는 수많은 상업시설은 이러한 안중읍의 문화시설 부족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할 것으로 예상되며, 특히 2020년 이후에 개통될 안중역과 송담지구가 연계된다면 안중읍의 규모는 더 팽창할 것이라고 전망된다.

10.1. 송담지구 개발 (2010~2015)

10.1.1. 송담지구의 과거 (~2009)

파일:송담리 2009.png
2009년에 촬영된 송담리 항공사진 (다음지도)

송담리는 논밭이 펼쳐져 있었으며 그 주변으로 조그마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루던 한유로운 동네였다. 한국농어촌공사 평택지사 부지가 있으며[3] 그 앞에는 강변로(평택)가 관통하고 있고, 그 주변으로 '시골추어탕', '솔향기그윽한' 등 자연의 분위기를 살린 식당과 버스 차고지, 그리고 조그마한 집들이 있었던 조용한 동네였다.

1990년대 말에 왕복 2차선뿐이라서 명절 때마다 교통대란을 불러일으켰던 39번 국도가 확장 및 우회 사업으로 농어촌공사 부지 옆 송담리에 4차선 도로가 새로 뚫리고, 이에 따라 39번 국도 바로 옆에 신창아파트가 새로 건설되었으며, 안중과 팽성을 잇는 '안중-팽성간 도로(강변로(평택))'가 개통되는 등 여러 변화가 있긴 하였지만 2009년 정도까지만 해도 송담리는 시골의 모습을 간직하였다. 그러나 2010년부터 송담지구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마자 이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파일:송담리 2008 로드뷰1.jpg
파일:송담리 2008 로드뷰2.jpg
2008년 당시 송담리 사진 (다음지도 로드뷰)

10.1.2. 노반공사와 토지구획 (2010~2014)

# 송담지구 개발 시작 (2009~2010년)
파일:송담지구 2010.png
2010년에 촬영된 항공사진 (다음지도)

2009년은 송담지구 개발이 착수된 해이다.그후 이듬해 2010년부터 기존 송담리에 있었던 가게와 집들이 하나 둘 씩 사라지기 시작하였다.

# 건물 철거 완료 (2011년)
파일:송담지구 2011 항공뷰.jpg
2011년에 촬영된 항공사진 (다음지도)
파일:송담지구 2011 로드뷰.jpg
2011년에 촬영된 송담리 일대 사진 (다음지도)

2011년에는 송담리에 위치한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 토지 노반공사 (2012년)
파일:송담지구 2012.png
• 2012년에 촬영된 송담지구 일대 항공사진 (다음지도)

# 도로 윤곽 (2013년)
파일:송담지구 2013.png
2013년에 촬영된 송담지구 항공사진 (다음지도)
==> 2013년부터는 도로 윤곽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구획 정리 완료, 힐스테이트 건설 시작 (2014년)
파일:송담지구 2014.png
• 2014년에 촬영된 송담지구 항공사진 (구글어스)
=> 2014년엔 도로 구획이 완료되어 도로 윤곽이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하였다.

10.1.3. 기반시설 급속 개발 및 최초의 도로 개통 (2015년)

파일:송담지구 2015.png
2015년 3월에 촬영된 송담지구 항공사진 (다음지도)
파일:송담지구 2016.png
2016년 초에 촬영된 송담지구 항공사진 (다음지도)

3년 만에 노반시설 건설과 기반시설 확충이 완료된 현화지구와는 달리, 송담지구는 개발 속도가 더디기만 했었다. 그러다가 2014년 말에 공사는 다시 활발해지기 시작하여 2015년에 들어서는 대대적인 도로 공사와 상하수도·배관·가로등·보도블럭 공사가 이루어졌다.

한편, 2015년 11월에는 송담지구를 관통하는 4차선 도로(송담3로)가 최초로 개통되기도 하였다.

10.2. 송담지구 발달 (2016~2019)

10.2.1. 2016년: 송담지구의 발달

2015년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기반시설 공사로 인해 송담지구는 2016년부터 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여건을 갖추게 되었다.

2016년 3월에는 송담지구 기반시설(아스팔트 깔기 등) 구축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3월 말부터는 건물이 지어질 만한 여건이 모두 다 조성되어 본격적인 송담지구의 발달이 시작되었다.

2016년 4월부터는 송담지구 내에 건물이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이때 지어지기 시작한 건물들은 2016년 4분기 즈음에 완공되었다.

2016년 6월 중순에 송담지구 현장사무소가 철거되었다.

2016년 7월엔 힐스테이트 단지 내 공사, 단지 앞 CU편의점, 신터미널 쪽 롯데리아가 오픈했다. 2016년 9월엔 힐스테이트 막바지 작업과 송담지구 내 원룸 입주 시작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했다.

2016년 10월에는 송담힐스테이트아파트가 입주하기 시작함에 따라 안중읍의 인구가 급격하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또한 2016년 2분기에 착공된 건물이 이때 완공됨에 따라 이 건물에 상점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10.2.1.1. 송담지구 2016년 총결산
2016년은 송담지구에 있어서 중요한 해였다. 기반시설이 완료됨으로써 그 위에 각종 상업시설과 건물이 들어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어서 송담지구 발달을 가능케 하였다. 그 결과 제자리 걸음이었던 안중읍의 인구는 다시 증가하였고 이듬해 초에는 인구 4만1천명선을 최초로 돌파하기도 하였다.

파일:송담지구 2016말.png
(2016년 8월 16일에 촬영된 항공사진 (구글어스))

10.2.2. 송담지구의 발달 (2017~2019)

2010년에 토지 구획이 시작되어 2015년에 대부분의 기반시설 구축이 완료된 송담지구는, 2016년 2분기부터 건물이 속속 건설되기 시작했고, 이때 지어진 건물들은 2016년 말에 완공이 되어 2017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상점이 들어설 수 있게 되었다.

2018년엔 지엔하임아파트, 노브랜드 등의 브랜드가 들어섰다.

10.3. 현화지구: 상점 증가와 도로 재정비 (2010~2019)

파일:안중읍중심지 2016.png
2016년에 촬영된 안중읍 중심지 항공사진 (다음지도)

2000~2010년 사이에 현화지구 개발이 모두 완료되어서 2010년에서 2018년 사이의 현화지구에 커다란 변화는 없었지만, 홈플러스가 새로 들어서고 도로가 새로 건설되는 등 곳곳에서 작은 변화가 있었다.

#001. 안중시외버스터미널 신설과 안현로 확장
파일:안중시외버스터미널 2010.png
2010년의 안중시외버스터미널 사진 (다음지도)
파일:안중시외버스터미널 2016.png
2016년의 안중시외버스터미널 사진 (다음지도)

=> 2010년 현화지구 동남부에 신설된 안중시외버스터미널은 '신터미널'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서평택의 대중교통을 담당하였다. 그로부터 현재까지 커다란 변화는 없었지만 터미널의 주차장 크기가 늘어나고 주위에 아파트 모델하우스가 생겼다.

한편, 현화지구의 동쪽 외곽을 둘러싸는 '안현로'는 동신2차아파트부터 신터미널까지 왕복 2차로 규모였지만, 2010년대 중반에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송담지구 조성에 힘입어 4차로 규모로 확장되었다. 또한 도로 양측으로 인도도 새로 닦였다.

#002. 홈플러스와 안중레포츠공원 개장
파일:현화지구 서북부 2010.png
2010년의 현화지구 서북부 사진
파일:현화지구 서북부 2016.png
2016년의 현화지구 서북부 사진

=> 2010년대 초반까지 안중읍에는 대형마트가 없어서 평택시내까지 나가야 했지만, 2012년 1월 현화지구 건영아파트 북쪽에 홈플러스가 생겨서 불편이 줄어들었다. 또한 이 시기에 청북지구와 안중읍을 잇는 '안청로'가 완공되어 홈플러스의 진입로 역할을 하였고, 2015년에 들어서는 홈플러스 북쪽에 '안중레포츠공원'이 조성되었다.

11. 화양지구와 안중역 개통 (2020년대)

12. 안중읍 역사 요약

안중읍(安仲邑)은 그 모체가 안중장(安仲場)의 형성과 함께 발달된 마을로, 조선시대 이래 충청남도 직산현에 속해 있었다가 1896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수원군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는 일제의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진위군의 여러 면으로 나뉘어 귀속되었고, 1938년에는 평택군으로 이속됨에 따라 현 안중면 지역은 오성면·청북면·현덕면·포승면의 일원으로 갈라졌다.

광복 이후의 1950~1970년대 안중지역에서는 안중중학교, 안중고등학교, 안중상업고등학교(現 경기물류고)가 개교하였고 안중장 주변으로 상업시설들이 모여듦에 따라 시가지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는 서평택 안중출장소 설치(1987년)와 안중면 승격(1989년)으로 분리독립하였으며, 안중지역을 관통하는 38번 국도와 39번 국도의 직선화 사업으로 현대 안중읍의 외형이 형성되었다.

1990년대 전후에는 포승읍에 포승국가산업단지와 평택항, 해군제2함대사령부 주둔 등에 따른 배후도시(현화택지지구) 개발로 인구가 급증했다. 그 결과 2002년 11월 5일 안중면은 읍으로 승격하였고 서평택의 중심지역으로 변모하였다. 이후에도 아파트, 학교, 상업시설, 안중시외버스터미널 등 편의시설이 속속 들어섬에 따라 안중 현화지구는 서평택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현화지구 발달이 완료된 2010년대 이후부터는 송담1리 일대에서 송담지구가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2016년 초에 기반시설 공사를 마친 송담지구는, 2016년 중반부터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시가지의 모습을 조금씩 형성해 가기 시작했고 특히 2016년 10월에는 송담힐스테이트아파트가 입주하기 시작함에 따라 2000년대 이후 제자리걸음이었던 안중읍의 인구가 상승하는 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편 송담지구로부터 남동쪽으로 약 900m 떨어진 거리에 건설될 안중역은, 2015년 5월에 서해선복선전철이 착공된 이후 별다른 공사 진척이 없는 듯하였으나 2017년 5월부터 노반시설 공사가 본격화되었다. 2020년 현재는 노반공사가 상당 부분 진척되어 금곡리 쪽엔 교각이 많이 세워졌고 송담리 쪽엔 공사 자재들이 질펀하게 널려있어서 안중역 개통이 눈앞으로 다가왔다는 분위기를 실감할 수 있다.

[1] 漕倉, 조선시대에 조세로 거둔 현물을 모아 보관하고 이를 중앙에 수송하기 위해 강 주변에 설치한 창고 및 이 일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세곡의 수납, 보관 가능을 하였다.[2] 39번 국도는 2000년을 전후로 신창아파트 옆 도로로 우회 이전함. 2018년 기준으로 안중읍의 안현로가 과거의 39번 국도에 해당됨[3] 현재는 송담지구 개발로 인해 "이화빌딩"으로 이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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