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安羅王가야의 국가 중 하나인 안라국(아라가야)의 왕들. 아쉽게도 이름이 기록되지 않으며, 일본서기에서는 6세기 전반에 외교활동을 벌인 기록이 남아있다.[1]
안야국(아라가야) 시절에는 《삼국지》 동이전을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우호(優呼)'가 주어진 신지로 보기도 한다.[2]
2. 일본서기 계체기의 안라왕
529년 안라회의를 개최한 안라국의 왕. 당시 반파국이 신라와의 혼인동맹 이후 가야 제국(諸國)로부터 불신을 사면서 안라국을 중심으로 뭉치게 되었다.안라국왕은 백제, 신라, 일본을 초청해 안라회의를 열어 백제, 신라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3]
이후 안라국은 531년 백제에게 걸탁성을 뺏겨서 백제의 영향력으로 편입되었다.
3. 일본서기 흠명기의 안라왕
541년과 544년에 개최된 1차, 2차 사비회의에서 차한기 이탄해, 대불손, 구취유리를 백제에 파견시킨 왕. 역시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으며, 계체기에 기록된 안라왕과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다.다만 544년 2차 사비회의에서 이탄해는 참석하지 않은 점을 근거로, 2차 사비회의 때 국왕은 이탄해가 아니었냐는 설도 있다.[4]
이후 552년 백제, 가라(반파국)과 함께 일본에 사신을 파견해 고구려 - 신라 간 동맹을 맺었다면서 구원병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
4. 신찬성씨록의 안라왕(아라라국주)
- 아라라국주(阿羅羅國主)
9세기 초반(815) 편찬된 일본 씨족지 신찬성씨록에는 이하도군의 형. 원문에는 신라의 아라라국주로 기록했는데, 아라라(阿羅羅)는 안라국의 다른 이름이라 신찬성씨록의 오류로 보인다.
5. 기타
- 신찬성씨록에 기록된 ‘임나국(任那国) 풍귀왕(豊貴王)’이 안라국의 왕이 아니었나는 설이 존재한다. 가야/왕사 항목 참조.
- 그외에도 아로한기나 아리사등을 안라국 국왕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古代 王權의 成長과 日韓關係, 모리 기미유키)
[1] 다만 가실왕이 대가야가 아닌 안라국의 국왕이라는 설이 있다.[2] 해당 기록의 문장에 도치로 인한 오류가 있다고 보는 관점에 따라 안야국 신지의 우호는 다르게 파악된다. 원문은 '축지분(踧支濆) 신지'로 해석되지만, 도치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축지(踧支) 신지' 또는 '축지리(踧支離) 신지'로 해석한다.[3] 신라에게 멸망당한 탁기탄국을 재건국시키려고 했는데, 신라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면서 가야제국 내 안라국 영향력 확대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4] 이탄해가 차한기, 안라국의 2인자로 기록된 인물인데 그가 회의에 참석하지않았다는 점은 그가 안라국왕으로 즉위했기 때문에 참여햐지 못했다는 것. 다만 544년 2차 사비회의 이전에 사망해서 오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