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3-04-24 18:59:04

안드레이 안드레예프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1. 개요

러시아의 혁명가, 소련의 정치인.

2. 생애

1895년 10월 30일, 스몰렌스크 인근 쿠즈네초보에서 농부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동료 노동자들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1914년 볼셰비키당에 가입했다. 1차 세계 대전 중에 페트로그라드의 푸틸로프 군수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철강노동조합을 조직하여 열성적인 볼셰비키로 활동하였다. 몰로토프는 "혁명 전까진 가장 훌륭한 볼셰비키 중 하나"라고 나중에 회상했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동료 노동자이며 혁명가인 도라 카잔과 결혼하였다. 1916년 2월 파업에 참여했으며 이때 아내 도라 카잔은 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을 떠났다. 10월 혁명 이후 철강노동자조합을 조직하였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전연방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서기로 활약하면서 노동조합을 볼셰비키당에 종속시키는데 공을 세웠으나 트로츠키를 지지하였다.

1922년 철도노동자 무역조합의 지도자로 조동되어 1927년까지 재임하였다. 중앙위원회 내부에서 이오시프 스탈린를 지지하였으며 스탈린을 경칭이 아니라 애칭인 코바로 부를 정도였다. 젊어서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상쇄하기 위해서 1920년대에는 여가 시간에 가정교사를 두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한다. 전체적으로 젊고 근면한 지도자로 인기가 좋았고 보로실로프와는 아예 사돈관계를 맺었다. 칼리닌과의 관계도 좋았다고 한다. 1922년 9차 당대회에서부터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4년 2월, 12기 8중전회에서 서기국 서기로 선출되었다. 1924년 6월, 13차 당대회에서 서기국 서기로 재선되었으며 지노비예프 그룹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였다. 1925년 12월, 14차 당대회에서 서기에서 해임되었다. 1926년 7월 23일,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1927년 12월, 15차 당대회 및 1930년 7월 16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재선되었다. 1928년 4월, 북캅카스 서기로 파견되어 농업생산의 증산을 독려하였다. 하지만 안드레예프 스스로 자신은 농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은 인정하였다. 1930년 11월, 노동자-농민검열인민위원에 임명되었으나 1930년 12월 21일, 정치국 후보위원에서 소환되었다.

1931년, 교통인민위원에 임명되었다. 1932년 2월 4일, 정치국 위원에 보선되었다. 1934년 2월, 17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위원에 재선되었으며 조직국이 설치되면서 서기국 서기 및 조직국원에 선출, 조직국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35년에 교통인민위원에서 물러났다. 대숙청 시기에는 과거 자신이 트로츠키를 지지했었다는 것 때문에 죽을까봐 전국 각지를 돌면서 지방의 대숙청을 진두지휘하였다. 대숙청 와중에 아내가 체포되었지만 칼리닌이 그랬던 것처럼 찍소리도 내지 못했다.

1938년 소련 최고회의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1939년 3월에 당중앙통제위원장, 1943년 12월부터 농업부 장관도 겸하였다. 1945년에 소련 최고소비에트 의장에서 물러났으며, 1946년 3월, 농업인민위원에서도 물러났다. 이후 소련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었다.

말년에 들어서 건강 상태가 크게 악화되었고 이에 따라 1952년 19차 당대회에서 정치국 및 당중앙통제위원회에서 은퇴하였다. 스탈린 시기에 숙청당하지 않고 곱게 물러나는 행운을 누렸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에서도 물러났다. 이후 소련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위원을 지냈다.

1956년 2월, 20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된 것을 마지막으로 이후 중앙위원회에선 은퇴했다.

사망 4개월 전에 자신의 삶을 다룬 회고록을 출판했으며, 1971년 12월 5일에 사망했다.

3.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