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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4-02 20:27:35

아우구스틴 에렌스베르드



파일:Detail_of_Olof_Arenius-portrait_of_Augustin_Ehrensvärd.jpg

스웨덴어: Augustin Ehrensvärd

1. 개요2. 일생
2.1. 초기 경력2.2. 7년 전쟁2.3. 전쟁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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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군인. 7년 전쟁 시기 스웨덴령 포메른에 주둔한 스웨덴군을 통솔했으며 수오멘린나 요새를 건설하고 스웨덴 연안 함대를 창시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아우구스틴은 1710년 9월 25일 바르카뢰의 풀레뢰 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주 가문의 일원이었으며 외삼촌은 스웨덴 포병의 선진화를 이끈 칼 크론스테트이다. 1726년, 16세의 나이에 삼촌 칼 크론스테트가 지휘하는 포병대에 입대했다. 아우구스틴은 군사적 역량이 상당했지만 수학과 건축에서도 탁월한 재능이 있었고 화가로서도 훌륭했다. 1734년, 신립 포병 학교에서 수학 및 기계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1736년 해외로 유학을 가서 독일, 덴마크,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을 잇달아 방문하여 현장 실습을 여러 차례 수행하고 각국의 사관학교를 수강했다.

1739년, 스웨덴으로 돌아와 카타리나 엘리사베트 아들러헤임과 결혼했다. 같은 해 스웨덴 왕립 과학 아카데미가 설립되자,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740년엔 과학 아카데미의 총무가 되었다. 1744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치르고 있는 프로이센군에 가담했고 1745년 9월 30일 조르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1746년 스웨덴으로 돌아온 아우구스틴은 소령으로 승진했으며, 하타르당에 가입하여 스웨덴 4개 계급(귀족, 사제, 부르주아, 농부) 의회에서 특별 방위 대표단의 일원이 되었다.

파일:kuvitus_kustaanmiekkatumma-944x498.jpg
수오멘린나 요새. 핀란드 헬싱키에 위치한 6개의 섬[1]에 지어진 요새이다.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747년, 아우구스틴은 중령으로 승진했다. 그는 삼촌의 뒤를 이어 스웨덴 포병대의 선진화를 이끌었고 핀란드에 수오멘린나 요새 건설을 감독했다. 또한 스웨덴 연안 함대를 창설하여 스웨덴이 18세기 말에 잠시 동안이나마 북유럽의 대표적인 해상 강국이 되는데 기여했다. 이후 1749년, 대령으로 승진했다.

2.2. 7년 전쟁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소장으로 승진한 아우구스틴은 수오멘린나에 본거지를 둔 연안 함대를 지휘했다. 그는 1759년에 중장으로 승진했고 1761년 7월 스웨덴령 포메른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스웨덴 야전군의 지휘를 이끌었다. 그는 포메른에서 정예 경기병대를 창설했고 새 척탄병 대대를 창설했다. 그 해 여름 공세를 개시한 아우구스틴은 도중에 가슴에 총탄을 맞았으나 부상을 무릅쓰고 그해 크리스마스와 새해 첫날 사이에 말칭에 고립된 프로이센군에 대한 포위전을 이끌었다.

그러나 1762년 4월, 아우구스틴은 슈테틴 공략 작전을 지휘하던 중 이 작전을 성사시키기에 충분한 병력을 확보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본국의 허락을 받지 않고 프로이센군 사령관과 비밀 휴전 협약을 체결하기로 했다. 이 협약은 1762년 4월 7일에 체결되었고 곧이어 5월 22일 함부르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지난해 여름에 입은 총상을 치료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갔다.

2.3. 전쟁 이후

1764년, 기병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남작으로 봉해졌다. 그리고 1770년엔 백작으로 봉해졌으며, 1772년에는 원수로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몇달 후인 1772년 10월 4일 핀란드 미내매키(Mynämäki)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62세.

유해는 수오멘린나 요새에 안장되었으며 그의 무덤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가 직접 디자인해주었다.
[1] 쿠스탄미에카 섬, 수시사리 섬, 이소무스타사리 섬, 피쿠무스타사리 섬, 랜시무스트사리 섬, 롱외렌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