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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2-19 20:37:31

신예



고려 판도첨의사사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신예
辛裔
<colbgcolor=#fedc89><colcolor=#670000> 출생 미상
사망 1355년(공민왕 4)
본관 영산 신씨(靈山 辛氏)
봉호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
관직 지신사(知申事), 첨의평리(僉議評理)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
가족 매부: 고용보(高龍普)
동생: 신귀(辛貴), 신순(辛珣)
자녀: 신돈(辛旽)[1]
친척 조카/손녀: 신빈 신씨(태종의 후궁)

1. 개요2. 생애
2.1. 출세와 권력의 배경2.2. 충혜왕 체포 사건2.3. '신왕(辛王)'이라 불리다2.4. 오만방자한 행각2.5. 온 집안의 행패2.6. 사망
3. 가족 관계4. 평가5. 여담

1. 개요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권문세족. 본관은 영산 신씨이다.

원나라기황후를 등에 업고 권세를 떨친 환관 고용보의 매부이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고려 말기 국정을 농단한 대표적인 부원배(附元輩)이자 탐관오리로 평가받는다.

당시 인사권을 장악하고 매관매직을 일삼으며 위세가 대단하여 세간에서는 그를 왕에 빗대어 신왕(辛王)이라 부를 정도였다. 훗날 고려의 집권자가 되는 승려 신돈의 아버지 혹은 형으로도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출세와 권력의 배경

영산현(현재의 경상남도 창녕군 영산면) 출신으로 과거에 급제한 뒤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충혜왕 대에 거듭 승진하여 좌정언(左正言), 지신사(知申事) 등을 거쳐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랐다.

그가 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막강한 권력을 쥘 수 있었던 뒷배경에는 바로 매부(妹夫)인 환관 고용보(高龍普)가 있었다. 고용보는 원나라기황후를 섬기며 고려 국정에 깊숙이 개입하던 인물로, 신예는 이러한 원나라의 위세를 등에 업고 고려 조정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권문세족이자 전형적인 부원배(附元輩)가 되었다.

2.2. 충혜왕 체포 사건

그의 매국적인 행보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건이다. 원나라 사신 도치(朶赤)와 나주(乃住)가 고려에 와서 국왕인 충혜왕을 체포하여 압송하려 할 때, 신예는 이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매부 고용보와 공모하여 군사를 매복시키고 궁궐 외곽을 수비하며 왕의 체포를 도왔다.

일국의 신하이자 유학자 출신인 관료가 외세의 힘을 빌려 자국의 왕을 잡아가는 패륜을 저지른 것이다. 당시 고려 사람들은 이를 보고 "고용보 같은 소인배야 환관이니 말할 필요도 없지만, 유학자라는 신예가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라며 비난을 쏟아냈다.

2.3. '신왕(辛王)'이라 불리다

이후 원나라 황제의 명을 받아 유점도감(楡岾都監)을 관장하며 사찰의 토지를 둘러싸고 고려 관료들을 협박하거나 투옥시키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

충혜왕의 측근들이 숙청된 후에도 신예는 전숙몽(田淑蒙) 등과 결탁하여 권력을 유지했다. 특히 인사권을 담당하는 정방(政房)을 장기간 장악하여 매관매직을 일삼고, 자신의 친인척과 친구들을 고위직에 앉혔다. 대언(代言) 정사도(鄭思度) 역시 신예에게 아첨하여 승진한 케이스였다.

이 시기 그의 집 앞은 청탁을 하러 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그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세간에서는 그를 가리켜 신왕(辛王)[2]이라 부를 정도였다.

2.4. 오만방자한 행각

원나라의 뒷배만 믿고 고려의 예법을 무시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충목왕 즉위 초, 신예는 노영서(盧英瑞)와 함께 궁궐 안에서 붉은 신(자화)을 신고 몽골식 모자(종모)를 쓴 채, 오랑캐의 의자인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있었다.

심지어 왕족인 상락군(上洛君) 김영돈(金永旽)이 지나가는데도 일어나 인사조차 하지 않았는데, 이에 김영돈이 그들을 불러세워 호통을 쳤다.
"내가 듣건대 임금(충목왕)께서 왕위를 계승해 귀국한 후 다시 삼한을 바로 잡으려 하시니 온 나라가 이를 반겨 춤추며 축하하는데, 공들은 어째서 전대의 악소(惡少)[3]들이 입던 사치스런 관복을 벗어던지지 않소? 이것이 어찌 풍속을 바로 잡는 길이겠소?"

김영돈의 서슬 퍼런 꾸짖음에 신예 등은 얼굴을 붉히며 물러갔고, 얼마 뒤 취성부원군(鷲城府院君)에 봉해졌다.

2.5. 온 집안의 행패

신예 본인뿐만 아니라 그 일족의 행패도 극에 달했다. 신예가 감찰대부 이공수에게 앙심을 품고 장령 송구를 잡아가려다 실패하자, 신예의 사주를 받은 동생 신귀(辛貴)가 군관(중랑장)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고용보의 권세를 믿고 공권력을 우습게 안 것이다.

또한 신예의 어머니가 남의 종을 강탈하는 사건도 있었다. 노비의 주인이 돌려달라고 애원하자 오히려 주인을 구타했고, 이에 주인이 관청(정리도감)에 호소하여 관리가 파견되었으나 신예의 집안사람들은 공무를 수행하러 온 관리마저 구타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신예의 또 다른 동생인 대호군(大護軍) 신순(辛珣)이 수감되어 곤장을 맞기도 했다.

2.6. 사망

온갖 전횡을 일삼던 신예는 공민왕 4년인 1355년에 사망했다.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일족(아들 혹은 동생)인 승려 신돈이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집권하게 되면서 영산 신씨 가문은 다시 한번 고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3. 가족 관계

4. 평가

고려 말기, 원나라의 간섭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외세(환관 고용보, 기황후)에 기생하여 자국의 국왕을 능멸하고 백성을 수탈한 전형적인 권문세족이자 부원배(附元輩)로 평가받는다.

유학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왕을 체포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은 당시에도, 후대에도 용납받기 힘든 패륜 행위로 지탄받았다. 그의 일생은 고려 말이 얼마나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고 도덕적으로 타락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5. 여담


[1] 신예의 아들이라는 설과 동생이라는 설이 공존함.[2] 신씨 성을 가진 왕이라는 뜻.[3] 불량배를 뜻함.[4]고려사》 열전에는 신예가 신돈의 아버지라는 설과 형이라는 설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신돈이 집권했을 때 신예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5] 신예의 동생 신귀가 신빈 신씨의 아버지인 신영귀(辛永貴)와 6촌 형제 지간이다. 즉, 신예에게 신빈 신씨는 7촌 조카딸 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