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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쇠귀에서 넘어옴
신영복
申榮福 | Shin Young-bok
파일:145286690479_20160116.JPG.jpg
<colbgcolor=#000><colcolor=#fff> 출생 1941년 8월 23일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칠곡리
사망 2016년 1월 15일 (향년 74세)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
본관 평산 신씨
위경(葦經)
소당(紹堂)
우이(牛耳)
쇠귀
학력 밀양국민학교 (졸업)
밀양중학교 (졸업)
부산상업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 / 학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 석사[1])
병역 대한민국 육군 중위 만기전역[2]
직업 교수, 작가, 경제학자
종교 무종교 (불가지론)
부모님 아버지 신학상, 어머니
배우자 유영순 (1989년 결혼)[3]
자녀 아들 신지용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4] |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신영복 소리아카이브)

1. 개요2. 생애3. 약력4. 저서5. 사건 사고 및 논란6. 정치인들과의 인연7. 신영복체
7.1. 문재인 정부에서의 활용7.2. 윤석열 정부에서의 폐기
8. 여담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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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께 맞는 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신영복 《담론》중에서
대한민국 진보 학계를 대표하는 경제학자이자 문학가. 젊은 시절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20년간 징역살이를 했으며, 수감 생활 당시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엮어 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이름을 알렸다. 쇠귀라고도 불린다.

2. 생애

1941년 8월 23일 경상남도 의령군 유곡면 칠곡리 유곡국민학교 교장 사택에서 아버지 신학상(申鶴祥)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의 고향인 밀양시 무안면 중산리의 평산 신씨 집성촌에서 자랐다. 밀양국민학교와 밀양중학교, 부산상업고등학교, 1963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5]를 취득하였다.

석사 학위 취득 후 숙명여자대학교육군사관학교에서 강사로 근무하다, 육군 장교로 임관하여 육사 교수사관으로 복무했다. 그러던 중 1968년 북한과 연계된 지하당 조직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아[6] 구속되었다가 전향서를 쓰고 1988년 특별 가석방으로 20년 20일만에 출소하였으며 옥중의 시절을 경험하여 써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출간하였다.[7]

이후 성공회대학교 경제학부 교수로 2006년[8]까지 재직하였으며, 진보 진영의 대표적인 지식인 중 한 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암 판정을 받게 되어서 흑색종 투병으로 요양 중 2016년 1월 15일 밤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의 자택에서 향년 74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유족의 뜻에 따라 화장 후 장지는 비공개로 하였다.

3. 약력

4. 저서

5. 사건 사고 및 논란

5.1. 통일혁명당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통일혁명당 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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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월간 ' 인터뷰에서 '전향서를 쓰긴 했지만 사상을 바꾼다거나 동지를 배신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며, 통일혁명당에 가담한 것은 양심의 명령 때문이었고 향후로도 양심에 따라 통혁당 가담 때와 비슷한 생각으로 활동하겠다'는 의견을 밝힌 바가 있다. #

신영복의 경우는 통일혁명당이라는 지하 정당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엮여든 것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신영복 본인의 주장 외에는 검증할 길이 없다. 오히려 통일혁명당 하위조직인 민족해방전선에서 조직비서를 맡아서 조직원 포섭 및 공산주의 교육 활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수감 이후 북한측에서 월맹에 억류되어있던 대한민국 외교관 3명을 교섭수단으로 삼아 북송을 요구할 정도로 주체사상 선전의 중요인물이었다. 다만 신영복이 북한에 다녀왔다고 언급한 중앙정보부 수사기록은 당시 육군사관학교의 문서(출강기록)와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정측이 조작한 것으로 봄이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북한에 다녀왔다는 부분이 조작되었다고 해서 김질락 등의 간첩과 북한 조선로동당이 위 단체와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실이 변할 수는 없으며, 또한 모든 수사 기록이 중정측으로부터 조작되었거나 중정수사내용과 상반된 연루자들의 증언이 모두 진실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일단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통혁당 사건에서 선고받은 인물들 중 한명숙의 남편 박성준[13][14]을 제외하고는 재심으로 무죄된 경우가 없다. 그러므로 신영복은 통일혁명당 사건에서 무고하게 죄를 뒤집어 썼다는 주장을 할 수는 있으나, 국가에 의해서 조작되어 누명을 썼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한 '무고하다'고 단정짓는 건 무리가 있다.

현재 신영복과 통일혁명당의 관계에 대해선, '신영복이 처음부터 끝까지 통일혁명당에 깊이 관여했다'는 사건 가담자 김질락[15]의 옥중수기 <어느 지식인의 죽음>에 실린 주장과 '신영복은 자신이 가담한 조직을 단순한 반독재민주화운동 단체로 알았지, 북한과 연계된 지하당 통일혁명당이란 것은 몰랐던 무고한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김삼웅, 한홍구[16] 등의 주장이 맞서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신영복이 실제 통일혁명당에 어떻게 가담했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향후 실증적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할 것이다.[17]

6. 정치인들과의 인연

진보 진영의 지식인으로 오래 활동하여 정치인들과도 꽤 인연이 있다. 대표적으로 민주당계 정당의 주요 정치인인 노무현 대통령이나[18] 문재인, 안희정을 비롯해 정청래, 손혜원 그리고 대한민국의 진보정당의 주요한 정치인인 심상정, 노회찬이나[19] 기타 인사들과 상당한 친분이 있다. 이 중 몇몇 정치인들은 신영복을 존경하는 지식인으로 뽑고 있어, 생전 선거에 나갈 때 신영복에게 조언을 구하러 자주 방문하였다.

반면 대한민국의 보수정당 쪽에서는 과거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고 간첩이나 종북주의자로 보는 시각이 있으나, 그래도 사회에서 이름 있는 지식인임은 부인하지 않는다. 일례로 신영복의 대학교 11년 후배이기도 한 김문수는 신영복을 거론할 때마다 그의 사상을 비판하면서도, 훌륭한 문학가이자 나오기 힘든 천재라는 말도 붙이면서 그의 명성은 부정하지 않는다.[20] 정우택은 아예 신영복을 존경해서 선거공보물에 그의 글씨체를 새기기도 했다.

7. 신영복체

일반인에게는 서예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데, 어머니의 모필 서한에서 느껴지는 서민적 체취와 정서를 독특한 서풍에 담아내었다는 평을 받는다.

소설가 조정래의 '한강' 표지에 친필을 담았으며, 소주 처음처럼 포장지와, 교보문고 신용호[21] 회장의 어록인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의 '사람이 먼저다' 라는 슬로건,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문구에 주로 그의 글씨체가 쓰였다.[22] 그의 서화 작품은 신영복아카이브에서도 감상할 수 있다.

처음처럼은 본래 그가 쓴 책의 제호로 사용된 작품이었는데, 나중에 두산주류BG(현 롯데주류)에서 동명의 소주를 출시하면서 그의 글씨를 상표로 사용하였다. 어떻게 보면 그의 작품이 상업적으로 사용된 드문 사례이기는 한데, 서민의 술인 소주에 자신의 작품이 사용되는 것을 흔쾌히 허락하면서 저작권료 대신 성공회대에 장학금 1억 원을 기부하였다고. 처음처럼을 디자인한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이 나중에 밝힌 바에 따르면 원래 신영복이 받은 금액은 5천만 원이었다. 손 의원이 신영복이 1억원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본인이 두산으로부터 받은 금액 중 5천만 원을 신영복에게 주었지만 신영복은 이 금액 모두를 기부하였다고 한다. 손 의원은 '신영복 선생이 지나치게 돈 욕심이 없다'고 안타까워 했다.

또한 제자 윤도현과의 인연으로 YB 8집 <공존>과 15주년 기념 앨범 <나는 나비>에 각각 '共存', '나는 나비' 글씨를 써서 주기도 했다.[23] 작곡가 이영훈의 컴필레이션 앨범 '옛사랑' 의 자켓 글씨도 신영복이 썼다.

굳이 말하자면 민체를 즐겨 쓴다고 할 수 있는데, 쇠귀체, 어깨동무체, 연대체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 신영복체라는 이름으로 폰트가 개발되어 유료로 판매되었다. 그런데 그의 타계 1주기를 앞둔 2016년 12월 21일부터, 많은 사람과 글씨를 나누고 싶어했던 그의 유지를 받들어, 개인사용자에 한하여 무상으로 배포한다. 직지소프트 홈페이지에서 배포 중. #

이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전반적으로 글씨를 남에게 써주는 데에 인색함이 없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사회 온갖 곳곳에서 신영복의 글씨를 발견할 수 있다. 숭문고등학교 도서관에도 신영복의 글씨가 걸려있었고(적어도 16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서울시립대학교 학생회관 근처 학생운동탑에 쓰여진 글씨도 신영복의 글씨다.[24] 신송고등학교 교훈석에 쓰여진 글씨도 신영복의 글씨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서울시립대학교/캠퍼스 문서
2.6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신송고등학교 문서
4.7.1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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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노무현 대통령의 어록인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를 신영복이 친필로 남긴 족자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달되었고 청와대 집무실에 걸리게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면 노무현 재단에 기증하게 될 예정.

신 교수가 생전 마지막으로 대중에 공개한 필체는 2014년 10월 세월호 희생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쓴 "아이들을 구하라!" 였다.

한편 보수 정당 소속인 정우택선거벽보선거공보에도 사용되었다.

7.1. 문재인 정부에서의 활용

문재인 정부 들어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사람이 먼저다에서 부터 시작된 인연이다. # 경찰 등 정부 상징물 곳곳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청와대 비서관들에게 신영복체로 된 '춘풍추상(春風秋霜)' 액자를 선물하기도 했다. # 홍범도의 묘에도 사용되었다. #

2021년 교체된 국가정보원의 새 원훈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을 새긴 원훈석에 이 서체가 사용되자,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의 글씨체가 정보기관의 원훈에 사용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보수진영의 비난이 쏟아졌다. #1, #2, #3

7.2. 윤석열 정부에서의 폐기

윤석열 정부로 정권교체가 이뤄진 후 2022년 6월 22일, 교체를 추진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경찰 등에서 사용되던 신영복체도 모두 교체할 것이라고 한다. #

2022년 6월 24일에 국가정보원은 신영복 원훈석을 폐기하고, 1961년 중앙정보부 창설 당시 원훈인 '우리는 陰地에서 일하고 陽地를 指向한다'로 되돌아가며 당시 세웠던 원훈석을 다시 세운다고 발표했다. #

보수 성향의 임태희 교육감이 취임[25]경기도교육청에서도 신영복체로 쓰였던 교육감 직인 5개를 훈민정음체의 새 직인으로 교체하기로 했다. 쉽고 간명하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필기체 기반의 신영복체 대신 정자체 기반의 훈민정음체를 사용하기로 한 것. #

8. 여담

9. 관련 문서



[1] 석사 학위 논문 : 封健制社會의 解體에 關한 考察 : 勞動力의 社會的存在樣式을 中心으로(봉건제사회의 해체에 관한 고찰 : 노동력의 사회적존재양식을 중심으로, 1964).[2] 육군사관학교 교수사관 #[3]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48세의 늦은 나이로 결혼했다. 그 탓에 50세에, 즉 당시로서는 손주를 보기 시작할 나이에 늦둥이 아들을 봤다. 배우자도 1948년생으로 결혼 당시 41세.[4] 이전의 개인홈페이지 shinyoungbok.pe.kr가 여기로 리다이렉트 된다.[5] 논문 제목은 '봉건사회의 해체에 관한 고찰: 노동력의 사회적 존재양식을 중심으로'[6] 당시 군사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한다.#[7] 정확히는 수감 생활 중 가족들에게 써서 보냈던 편지글을 모은 것이다.[8] 정년퇴임. 강의 자체는 2014년까지 나갔으나 암 진단을 받게되면서 그해 가을 마지막 강의를 준비했고 이를 바탕으로 『담론』을 냈다.[9] 교사였던 아버지 신학상(申鶴祥)의 근무지[10] 여기의 '더불어'는 추후 더불어민주당의 '더불어'의 모티프가 된다.[11] 출소 후 첫 작품이다.[12] 고인의 유작[13] 2022년 1월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재심으로 무죄 확정. 기사(법률신문)[14] 뿐만 아니라 이 경우 역시 구속영장 미발부 상태에서 체포 및 심문, 내란 음모 및 회합 등의 혐의를 입증하기 위한 직접 증거가 부족해서 무죄 선고가 나온 것이지, 박성준이 공산주의 지하조직이었던 통일혁명당에 가담했던 사실 자체가 뒤집힌건 아니다[15] 북한까지 갔다 왔던 김질락은 이후 사형을 선고받은 뒤 1972년 7월 15일, 서울구치소에서 형을 집행당했다. 기사(중앙일보)[16] 신영복과 성공회대 교수로 같이 근무하였다.[17] 1990년대 이후 NL운동의 핵심으로 활동하면서 오랜기간 범민련에서 일했던 민경우는 통혁당 사건에 대해서 공안기관의 고문이 문제이지, 조작해서 발표할 정도로 허술한 집단이 아니었으며 발표한 내용의 대부분은 진실로 본다고 언급하였다.[18] 취임 초기와 말년 두 번 청와대를 찾아 각각 '춘풍추상(남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하라)', '우공이산' 등의 글씨를 선물하였다. 노 전 대통령은 우공이산이라는 글씨를 좋아해 퇴임 후 자신의 웹사이트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자신의 아이디를 여기서 따온 '노공이산' 으로 바꾸어 사용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의 묘역에 새겨져있는 어록도 신영복이 직접 썼으며, 서거 2년 후인 2011년 12월 봉하마을 찾아 문재인 당시 이사장을 만나고 권양숙 여사도 만났다. 생전 마지막 방문이었다.[19] 노회찬이 사망한 이후 창립된 노회찬재단 역시 신영복의 글씨가 쓰였다. 물론 신영복은 노회찬보다 2년 일찍 사망해서 직접 글씨를 쓰지는 못했고, 배포된 신영복체를 사용하였다. 신영복 재단에 사용비를 내고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20] 본인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인 김문수TV에서 한 말이다.[21] 독립운동가 집안이다.[22] 사람사는세상 노무현 재단의 글귀도 신영복의 작품이며, 무엇보다 노 대통령의 묘역에 새겨져있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역시 신영복의 글씨이다.[23] 윤도현과는 2003년 윤도현이 김제동과 함께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편입으로 입학하게 되면서 인연을 맺었고, 위에 공존과 나는 나비 이외에도 여러 서예 글씨를 자주 선물해주었다고 한다.[24] 시대와 더불어 민중과 함께[25] 역대 최초의 보수계 경기도교육감이다. 이명박 정부에서 노동부장관, 대통령비서실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