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신문화운동(新文化运动)은 1915년부터 1920년대 초까지 중국에서 진행된 문화적·사상적 개혁 운동이다. 이 운동은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비판하고, 민주주의, 과학, 백화문(白话文), 개인주의 등을 강조하며 현대적인 사상을 확산시키는 데 중점을 두었다.2. 배경
1911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고 중화민국 북양정부가 수립된다. 그러나 새 정부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했고, 여전히 봉건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 이에 따라 근대적 개혁을 요구하는 지식인들이 전통적인 사상을 타파하고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중국 사회는 여전히 충효, 가부장제, 군신 관계 등의 유교적 전통에 기반하고 있었고, 신문화운동 지식인들은 유교 사상이 중국 사회 발전을 저해한다고 보고 이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위안스카이가 정권을 탈취하고 복벽을 통해 존공복고(尊孔復古) 운동을 벌이는 등 또다시왕조체제로 회귀하는 것 아닌가라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19세기 이후 서구 열강이 중국에 진출하면서 서양의 민주주의, 과학, 자유주의, 개인주의 사상이 점차 유입되어 일본을 거쳐 서구 문물을 접한 지식인들은 서양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중국 사회를 개혁하려고 했다.
3. 전개
초기의 신문화운동은 공가점타도(孔家店打倒)라고 하여 유교 사상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졌다.[1] 그래서 전통적인 윤리가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차별로 서구의 평등주의와 어긋난다고 보았다. 천두슈는 "공자를 몰아내야한다."라고 주장하며 기존 유교적 가치 체계를 부정하고 공격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는 1915년 잡지 '신청년'을 창간하여 지식인들의 글을 그곳에 싣고 신문화운동을 촉진시켰다.후스는 백화운동을 일으켜 《문학 개량 추구(文学改良刍议)》를 발표하며 문언문을 폐지하고 백화문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신문학(新文学) 8대 원칙을 발표했다.
- 須言之有物(내용이 있어야 한다.)
- 不摹仿古人(고인을 모방하지 말아야 한다.)
- 須講求文法(문법을 준수해야 한다.)
- 不作無病之呻吟(병이 없는데 신음하는 듯한 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
- 務去濫調套語(진부한 표현과 상투적인 문구를 없애야 한다.)
- 不用典(고사성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 不講對仗(대구(對句)를 맞추는 것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 不避俗字俗語(속어와 구어체를 피하지 말아야 한다.)
천두슈는 '신청년'을 통해 백화문 사용을 강력히 지지하며 대중에게 확산시켰다. 1918년, 루쉰은 중국 최초의 백화문 소설인 《광인일기(狂人日记)》를 발표하였고 이후로도 아Q정전등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1920년, 베이징대학이 공식적으로 백화문 사용을 지지하고 교육 과정에서 백화문을 채택하기에 이른다. 1922년, 국민정부는 초등학교 교육에서 백화문을 공식 표준으로 지정하였다. 이러한 점들은 5.4 운동의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
한편 의고파(疑高派) 교수들은 유교 경전들의 신빙성을 재검토하면서 이들 경전들의 저자,편자가 공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공가점타도 등의 과격한 신문화운동에 반발한 량치차오는 "공자나 유교를 매도하기보다 우선 중국의 위대한 전통에 풀무질을 해 겨와 낱알을 가려내자."고 주장하면서 후스[2]와 함께 국고정리운동(國故整理運動)을 일으켰다.[3] 한편 량치차오와 국고정리운동을 함께한 후스는 "하나의 주의(사회주의)를 추종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생활을 향상시키는게 더 도움이 된다."라고 하면서 무조건적인 해방을 비판하였다.
이러한 후스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신문화운동은 점차 정치적인 방향으로 발전해나갔다. 한편 러시아 혁명의 성공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갔고 리다자오와 천두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을 소개하고 확산시켰다. 여기에 5.4 운동으로 인해 민족주의 감정이 고조되어갔고 이러한 요인들이 결합되어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창설된다.
4. 참고 문헌
- 중국근대언론발전사
- 류근성. (2008). 5 · 4 신문화운동 시기의 유교문화 비판. 동양철학연구,(56), 193-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