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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4 18:43:39

스튜드베이커 아반티

파일:스튜드베이커 로고.png
파일:Studebaker-Avanti-10.webp
Avanti

1. 개요2. 상세
2.1. 1세대(1962~1963)
2.1.1. 판매량
3. 미디어에서4. 둘러보기


Studebaker Avanti[1]

1. 개요

미국의 자동차 제조사였던 스튜드베이커에서 생산했던 퍼스널 럭셔리 카.

2. 상세

2.1. 1세대(1962~1963)

파일:스튜드베이커 아반티 후면부.png
차량의 후면부

스튜드베이커 그란투리스모 호크의 후속 차량이었으며, 미국 유일 4인승 고성능 승용차'라는 기치를 내걸고 판매가 이루어졌다. 1962년 4월 26일에 뉴욕 국제 자동차 박람회와 연례 주주 총회에서 동시에 공개되었다. 같은 해 6월에 스튜드베이커 브랜드의 헤일로 카로 출시되었다. 1호차는 당시 인디애나폴리스 500에서 우승했던 로저 워드가 상품 중 하나로 받았다고 한다.[2] 당시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생산 차량'으로 불리며 보네빌 솔트 플랫[3]에서 시속 약 270km/h를 주파했으며, 총 29개의 기록을 깬 것으로 알려졌다.
파일:스튜드베이커 아반티, 레이먼드 로위와 셔우드 에그버트.png
아반티와 레이먼드 로위, 셔우드 에그버트

차량의 개발은 1961년 2월에 이루어졌는데, 당시 스튜드베이커 회장인 셔우드 에그버트가 취임했을 당시 비행기에서 비행 도중 봉투 뒷면에 낙서한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부분은 포드 썬더버드에 대한 대응 및 실적 부진을 개선해 보려는 노력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과거 스튜드베이커와 오랜 연이 있었던 산업디자이너 레이몬드 로위[4]와 회동하여 컴팩트카 라크에 기반한 GT카의 디자인을 주문했으며, 안전 기능과 고속 성능 등이 적용되었다. 레이몬드 로위는 1961년 3월 9일부터 스튜드베이커의 본사가 있는 인디애나 주 사우스 벤드에서 셔우드 에그버트를 포함한 스튜드베이커의 인력들[5]과 같이 40일 간의 빠른 개발과정을 거쳐 아반티의 개발을 진행했다. 차량의 기반은 스튜드베이커 라크 컨버터블과 같은 2,769mm 휠베이스를 적용했으며, 호크와 공유하는 개선된 파워트레인인 240마력의 4.7L 289 V8 엔진이 탑재되었으며 이와 함께 3단/4단 수동변속기, 3단 자동변속기가 적용되었다. 차량의 전장은 4,887mm, 전폭은 1,786mm, 전고는 1,367mm, 공차중량은 1,404kg이었다.
파일:스튜드베이커 아반티 구조도.png
차량의 구조도

당시 쉐보레 콜벳처럼 급진적인 섬유 유리 차체로 제작하였으며, 팩스턴 슈퍼차저가 옵션으로 적용되었다. 차량을 섬유 유리 차체로 제작하게 된 경위로는 당시 복잡한 아반티의 구조를 강철로 구현하기에는 비용이 비쌌으며, 외부 패널을 유리로 강화된 플라스틱(섬유 유리)으로 제작하기로 결정하면서 오하이오 주 애슈타불라에 지역에 있는 '몰디드 파이버글라스 바디(Molded Fiberglass Body)' 사에 외주를 두었는데 해당 회사는 경쟁 차량인 쉐보레 콜벳의 차체 구조를 구현한 바 있었다. 영국의 던롭 디자인 전면 디스크 브레이크가 적용되었으며, 벤딕스 사에서 라이센스를 받은 제품이었다. 이는 미국산 차량 중에서 최초로 적용되었다. 일반적인 그릴이 아닌 차량 전면 아래의 흡기구로 공기가 유입되는 그릴리스 룩의 '보텀 브리더(Bottom Breather)' 디자인이 적용된 최초의 차량 중 하나였다.[6]

1962년 4월 뉴욕 오토쇼 출품을 목표로 스튜드베이커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유럽풍의 급진적인 고성능차[7]를 디자인해달라는 제안 하에 로위는 10일 내로 구성한 소규모의 디자인 팀과 함께 당대 미국 차들보다 훨씬 유럽적인 색채의 스타일링을 목표하여 디자인했다.# 그로 인해 8일 동안 제작된 결과 2도어 쿠페 및 4도어 GT 쿠페 사양 2대의 클레이 모형이 등장했으며, 톰 켈로그는 4도어 GT 쿠페를 주장했다. 레이먼드 로위는 초음속 항공기를 연상시키는 스타일링으로서 그릴이 없는 노즈와 리어 펜더에 둥근 말벌 허리와 같은 낮은 전고에 긴 후드, 짧은 데크를 가진 세미 패스트백 쿠페를 구상하였다.

1963년 11월에 단종되었다. 1962년 12월에는 LA 타임즈 측에서 자체 섬유 유리 차체 증산을 했다고 언급했으나 공급업체, 조립품질 및 마감과 관련한 부분에서 관련 문제가 터져 나오면서 차량 생산 지연 및 취소 등이 이루어졌다. 그로 인해 연간 20,000대 가량을 판매하는 게 목적이었지만, 실제로는 1,200대만 생산되었다. 그로 인해 판매 부침을 겪을 상황으로 인해 단종 직후인 같은 해 12월 20일 컴페티션 프레스 지의 언급에 의하면, 차량의 재고가 많이 있어 공장에 먼지만 쌓이고 있다는 부분과는 다르게 당시 재고는 5대만 남아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당시 딜러들은 2,500대 가량을 보유하고 있었고 출시 이후 1,600대는 판매된 상황이었다. 이는 1963년 당시 23,631대를 판매했던 쉐보레 콜벳과 대조적인 결과를 낳았다.

이후 2006년까지 여러 번의 부활을 통해 계속적으로 판매되었다. 이는 단종 이후 공장 부지, 설비 및 아반티라는 이름의 상표권을 스튜드베이커 딜러점을 운영하던 네이트 알트만 및 레어 뉴먼에게 판매했기 때문이었다.[8] 이들은 해당 차량에 약간의 수정을 거치면서 판매했는데, 섀시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파워트레인제너럴 모터스 제품을 활용하였다. 이후 1982년에 스티븐 블레이크, 마이클 켈리와 존 카파로 등의 손을 거쳐 수정을 받았다. 해당 내용은 아반티 문서를 참고할 것.

또한, 이 차량의 인기로 인해 국제 아반티 오너 협회가 설립되어 전 세계적으로 거의 2,00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상황이고, 매년 미국스위스의 여러 도시에서 모임을 갖는 듯하다. 비영리 단체의 회원들은 1965년에 설립된 이래로 풀 컬러로 된 분기별 "아반티 매거진"이라는 간행물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2.1.1. 판매량

스튜드베이커 아반티 판매량
연도 미국 시장 판매량
<colbgcolor=#0047A0> 1962년 <colbgcolor=#fff> 1,200대
1963년 4,600대 정도 추정

3. 미디어에서

파일:스튜드베이커 아반티 가타카.png
가타카에 등장한 스튜드베이커 아반티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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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탈리아어로 '앞으로 나아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2] 당시 스튜드베이커 라크는 페이스 카로 활용되었으며, 아반티는 명예 페이스 카로 선정되었다.[3] 해당 지역의 이름에서 따온 차량 이름이 폰티악 보네빌이었다.[4] 전후 산업의 더 중요한 이정표 중 하나로 묘사된 바 있는 인물이었다.[5] 톰 켈로그, 밥 앤드루스, 존 엡스타인 등으로 구성되었다.[6] 이는 1980년대 이후에 인피니티 Q45, 볼보 480이나 그 이후에 나온 닷지 어벤저크라이슬러 세브링에도 이런 방식이 적용된 바 있다.[7] 레이몬드 로위 사단에서 부회장을 담당했던 존 엡스테인(John Ebstein)은 당시 막 공개되었던 재규어 XKE의 카탈로그를 셔우드 에그버트가 디자인 팀에게 보내 "이런 차를 디자인해 달라"는 메모를 남겼다고 회고했다.[8] 캐나다의 광고 및 홍보 부서장 직을 역임했던 스튜 채프맨의 책(My Father The Car)에 따르면 이들을 통해 아반티를 재출시하는 부분에 대해 진지하게 고려했었다는 대목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