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 스미스 (Stan Smith) | |
생년월일 | 1946년 12월 14일 ([age(1946-12-14)]세) |
미국 패서디나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프로데뷔 | 1969년[1] |
신장 | 키 193cm[2] 체중 84kg |
사용 손 | 오른손 (언노운 백핸드) |
ATP 싱글 랭킹 | 최고 3위[3] |
ATP 더블 랭킹 | 최고 1위 |
개인전 통산 성적 | 779승 305패(71.86%)[4] |
개인전 타이틀 획득 | 64회[5] |
그랜드슬램 결과 | 호주 오픈 3라운드 (1970, 1975, 1977[6]) 프랑스 오픈 8강 (1971, 1972) 윔블던 우승 1회 (1972) US 오픈 우승 1회 (1971) |
통산 상금 획득 | $1,774,811 |
S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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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前 테니스 선수이자 現 의류 사업가.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아디다스의 스탠스미스로 더 유명하다.
현역 시절 비공식적인 남자 단식 세계 랭킹 1위[7]과 공식적인 복식 세계 1위를 비롯하여 윔블던과 US오픈 우승 등 굵직한 임펙트를 보이며 1970년대 초반 미국 테니스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2. 커리어
- 개인전 통산 성적 : 779승 305패 (승률 71.86%)
- 단식 통산 타이틀 획득 : ATP 기준 48개
- 통산 상금 획득 : 1,774,811달러
그랜드슬램 대회 : 우승 2회, 준우승 1회 - 통산 112승 48패(승률 70.00%)[8]
- 호주 오픈 : 3회전 (1970, 1975, 1977[9]) - 5승 3패(승률 62.50%)
- 프랑스 오픈 : 8강 (1971, 1972) - 23승 9패(승률 71.88%)
- 윔블던 : 우승 1회 (1972), 준우승 1회 (1971) - 45승 17패(승률 72.58%)
- US 오픈 : 우승 1회 (1971)- 39승 19패(승률 67.24%)
연도 | 호주 | 프랑스 | 윔블던 | US |
1964 | 불참 | 불참 | 불참 | 2라운드 |
1965 | 불참 | 불참 | 2라운드 | 2라운드 |
1966 | 불참 | 불참 | 4라운드 | 1라운드 |
1967 | 불참 | 불참 | 3라운드 | 3라운드 |
1968 | 불참 | 불참 | 2라운드 | 2라운드 |
1969 | 불참 | 4라운드 | 4라운드 | 2라운드 |
1970 | 3라운드 | 1라운드 | 4라운드 | 8강 |
1971 | 불참 | 8강 | 준우승 | 우승 |
1972 | 불참 | 8강 | 우승 | 8강 |
1973 | 불참 | 4라운드 | 불참 | 4강 |
1974 | 불참 | 1라운드 | 4강 | 8강 |
1975 | 불참 | 4라운드 | 1라운드 | 1라운드 |
1976 | 3라운드 | 불참 | 4라운드 | 4라운드 |
1977[10] | 3라운드 | 4라운드 | 4라운드 | 2라운드 |
1978 | 불참 | 3라운드 | 1라운드 | 3라운드 |
1979 | 불참 | 3라운드 | 3라운드 | 3라운드 |
1980 | 불참 | 불참 | 3라운드 | 1라운드 |
1981 | 불참 | 불참 | 4라운드 | 2라운드 |
1982 | 불참 | 불참 | 2라운드 | 2라운드 |
1983 | 불참 | 불참 | 1라운드 | 1라운드 |
1984 | 불참 | 불참 | 불참 | 불참 |
1985 | 불참 | 불참 | 불참 | 불참 |
그랜드 슬램 복식 우승 5회 / 준우승 8회
호주 오픈: 우승 1회(1970)
프랑스 오픈: 준우승 2회(1971, 1974)
윔블던: 준우승 4회(1972, 1974, 1980, 1981)
US 오픈: 우승 4회(1968, 1974, 1978, 1980)
기타 대회 성적
마스터스 컵[11]: 우승 1회(1970)[12] / 준우승 2회(1971, 1972)
3. 선수 경력
스탠 스미스는 1946년 12월 캘리포니아 패서디나에서 태어났다. 주니어 시절 1950년대 미국 테니스를 대표했던 판초 세구라[13]를 코치로 만나 기량을 길렀으며,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진학하게 된다.[14] 1964년 아마추어로 데뷔하여 출전한 US오픈에서 2라운드 탈락에 그쳤고, 1967년까지 특출난 성적을 내지 못하여 그저 그런 선수로 남을 뻔 했지만 대학에서 만난 조지 툴리 코의 가르침을 기반으로 NCAA[15] 단식 무대와 복식 무대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며 이를 토대로 밥 루츠와 팀을 이뤄 1968년 US 오픈 복식에서 우승한다.1969년 프로 선수의 그랜드슬램 진출이 허용됨과 동시에 프로 선수로 데뷔하였으며 1970년 즈음부터 전성기를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인디아나폴리스 오픈 준우승을 기록하였고, 로이 에머슨을 제압하며 US오픈 8강에 진출하였다. 이어 1970년 도쿄에서 처음으로 개최된 마스터스[16]에서 얀 코다시, 켄 로즈월, 로드 레이버 등을 꺾고 우승을 차지하였다.
1971년 3월에 시즌을 시작하여 파리오픈까지 14승 1패, 우승2회, 준우승1회의 호성적을 기록하였고, 롤랑가로스 8강에 진출하며 커리어 하이 갱신을, 베케넘 오픈과 퀸즈클럽 오픈 우승, 윔블던 준우승, 신시내티 오픈 우승, US 오픈 우승 그리고 마스터스 준우승을 기록하며 71승 14패, 승률 83.5%를 기록하며 세계 1위의 영광을 누린다.
1972년 지난 해 준우승을 기록했던 윔블던에서 일리에 너스타세를 제압하여 우승하며 개인 통산 2번째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추가하였고, 1972년에도 마스터스 준우승을 기록하는 등의 활약으로 84승 13패, 승률 86.6%과 9개의 타이틀로 커리어 하이 시즌을 기록하였다.
1973년 새롭게 제정된 WCT대회에 참가하여 WCT대회 우승 6회, 준우승 2회, 4강 1회의 호성적을 기록하였고, 5월 개최된 WCT 파이널스까지 우승하며 최고의 전반기를 보냈으나 롤랑가로스 16강 탈락, 윔블던 불참, US오픈 4강 탈락 등으로 고전한다. 우승 1회와 준우승 2회를 기록하며 활약했던 마스터스에서 1승 2패로 RR탈락을 기록하며 커리어 최초로 마스터스 결승 진출에 실패한다. 여담으로 1973년 8월 23일 새롭게 제정된 ATP 랭킹 산출에서 3위로 기록되었고, 연말 5위로 1973년을 마무리한다.
1974년 지난해 휩쓸었던 WCT 대회에서 전반적으로 부진하는 모습을 보인다. 롱아일랜드 WCT, 세인트루이스 WCT와 칼스배드 WCT에서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대회의 성적은 비교적 아쉬웠다. 그러나 후반기 윔블던 4강 진출, 시카고 오픈 우승, US오픈 8강 진출 등의 성과를 이뤘으나 발목 부상으로 고생하며 US오픈 이후 4경기에 진출하는 것에 그쳤고, 마스터스 컵 진출에 실패한다. 연말 랭킹은 8위
30대에 접어들기 시작한 1975년부터 은퇴를 선언한 1986년까지 스미스는 복식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1974년 US오픈 8강 진출을 끝으로 은퇴 때까지 8강 이상 진출을 이뤄내지 못하였으며 단식 타이틀 우승 7회, 준우승 10회로 부진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복식의 경우 1978년과 1980년 US오픈 우승, 그리고 1980년과 1981년 윔블던 준우승을 기록하였고, 1981년 3월 복식 세계 1위에 이름을 올리며 35세의 나이에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1981년까지 단식 역시도 세계 20위권을 유지하는 베테랑의 면모를 보였다. 이후 단복식 통틀어 특별한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고 1986년 40세의 나이로 은퇴를 선언한다.
4. 타 선수들과의 상대 전적
문서가 존재하는 선수들만 기입하였습니다.
- 스탠 스미스의 전적이 우세한 상대
- 스탠 스미스의 전적이 불리한 상대
- 지미 코너스 : 4승 14패
- 존 매켄로 : 0승 5패
- 이반 렌들 : 1승 2패
- 비타스 게룰라이티스 : 1승 5패
- 아서 애쉬 : 10승 13패
- 비에른 보리 : 2승 5패
- 켄 로즈웰 : 3승 4패
- 로드 레이버 : 7승 10패
- 존 뉴컴 : 5승 10패
5. 여담
- 2005년 테니스 시대의 가장 위대한 선수 40인에서 35위로 선정되었다.
- 1987년 테니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 마스터스 컵 결승에서 일리에 너스타세에 2년 연속으로 패하며 준우승의 눈물을 흘렸지만 커리어 통산 상대 전적이 11승 10패로 앞선다.
6. 외부 링크
[1] 아마추어 데뷔는 1964년이며 프로 데뷔가 1969년이다.[2] 6 ft 4 in[3] 1971년 세계 1위를 기록하였으나 이 시기에는 ATP가 설립되기 이전이였고, 이로 인해 인정받지 못했다.
세계 3위의 성적은 ATP가 처음으로 랭킹을 산출한 1973년 8월 23일의 기록이다.[4] 오픈 시대 이전 성적까지 합칠 경우 950승 383패, 승률 71.27%[5] ATP 인정 타이틀은 48개[6] 12월에 개최된 오픈[7] 1971년 기록[8] 오픈시대 이전 기록까지 포함함[9] DEC[10] 12월에 개최된 경기의 기록이며 전기 대회는 불참하였다.[11] ATP 파이널스의 전신[12] 마스터스 컵이 창단된 이례 최초의 우승자이다.[13] 에콰도르 출신의 테니스 선수로 1940년 19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귀화하여 테니스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다. 아마추어 시절에는 프랑스 오픈, 윔블던 3라운드, US 오픈 4강 4회 진출을 기록하며 준수한 수준의 선수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프로로 전향한 뒤 US Pro 우승 3회, 웸블리 프로 준우승 4회, 프렌치 프로 우승 1회를 기록하며 미국 테니스 No.1에 오르는 등 USTA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14] 현대로 가까워질수록 테니스 선수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만-특히나 유럽 선수들- 이 시기까지만 해도 미국 테니스 선수들의 경우 대다수가 대학에 진학하였다. 스탠 스미스를 비롯하여 존 메켄로도 스탠포드 대학교에 진학하였고, 로스코 테너는 테네시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아서 애쉬의 경우에도 UCLA에 진학했으며, 비타스 게룰리타스는 롱아일랜드 대학 출신이다. 이례적으로 지미 코너스는 하버드 대학교와 UCLA에서 장학금 제안을 받았지만 바로 프로 무대로 진출하였다.[15] 대학 디비전 테니스 선수권 대회[16] 현재의 ATP 파이널스
세계 3위의 성적은 ATP가 처음으로 랭킹을 산출한 1973년 8월 23일의 기록이다.[4] 오픈 시대 이전 성적까지 합칠 경우 950승 383패, 승률 71.27%[5] ATP 인정 타이틀은 48개[6] 12월에 개최된 오픈[7] 1971년 기록[8] 오픈시대 이전 기록까지 포함함[9] DEC[10] 12월에 개최된 경기의 기록이며 전기 대회는 불참하였다.[11] ATP 파이널스의 전신[12] 마스터스 컵이 창단된 이례 최초의 우승자이다.[13] 에콰도르 출신의 테니스 선수로 1940년 19살의 나이에 미국으로 귀화하여 테니스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다. 아마추어 시절에는 프랑스 오픈, 윔블던 3라운드, US 오픈 4강 4회 진출을 기록하며 준수한 수준의 선수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프로로 전향한 뒤 US Pro 우승 3회, 웸블리 프로 준우승 4회, 프렌치 프로 우승 1회를 기록하며 미국 테니스 No.1에 오르는 등 USTA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었다.[14] 현대로 가까워질수록 테니스 선수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