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스탠리 클레어 피어슨 (Stanley Clare Pearson) |
생년월일 | 1919년 1월 11일 |
사망년월일 | 1997년 2월 20일 (향년 78세) |
국적 | 잉글랜드 |
출신지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솔퍼드 |
포지션 | 인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
신체조건 | 175cm | 70kg |
소속팀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37-1954) 베리 FC (1954-1957) 체스터 시티 FC (1957-1959) |
국가대표 | 8경기 5골 (1948-1952) |
감독 | 체스터 시티 FC (1959-196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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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전 축구 감독.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잉글랜드의 솔퍼드[2]에서 태어난 피어슨은 1935년 12월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와 유스 계약을 맺었다. 피어슨은 1937-38 시즌부터 프로 선수가 되었지만 얼마 못가 잉글리시 풋볼 리그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중단되었다.피어슨은 1954년까지 유나이티드 선수로 뛰면서 343경기 출전, 5번의 해트 트릭[3]을 포함해 148골의 기록을 남겼다. 그동안 유나이티드는 디비전 1 우승 1회(1951-52), FA컵 우승 1회(1947-48)를 거뒀다.
1954년에 피어슨은 유나이티드를 떠나 디비전 2의 베리 FC에 정착했고 그곳에서도 2경기당 1골에 가까운 득점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베리는 1956-57 시즌에 디비전 2에서 강등당했고 피어슨은 1957년에 체스터 시티 FC로 팀을 옮겼다. 피어슨은 1959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2.1.2. 국가대표
피어슨은 1948년 4월 10일에 있었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친선 경기에서 처음 삼사자 군단의 유니폼을 입었다.피어슨은 1949년 11월 16일, 잉글랜드가 북아일랜드를 9:2로 대파했던 1950년 월드컵 지역 예선전에서 2골을 넣었다. 그러나 피어슨은 2주 후에 있었던 이탈리아와의 경기를 끝으로 1950년까지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월드컵 본선 명단에도 그의 이름이 없었다.
2.2. 이후
피어슨은 선수 은퇴 후 자신이 선수 생활을 마쳤던 체스터 시티 FC에서 감독을 맡았는데 체스터 시티 팬들에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61-62 FA컵에서 체스터 시티가 모컴 FC에 패하자 피어슨은 클럽을 떠나야 했다.축구계를 떠난 피어슨은 프레스트베리(Prestbury)의 우체국에서 부국장으로 일했다.
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피어슨은 뛰어난 축구 지능을 이용한 절묘한 패스, 화려하지 않은 기술, 비이기적인 플레이 스타일로 높이 평가받았다. 피어슨은 강력한 슈팅보다는 대부분 페널티박스 안에서 찬스를 처리했지만 체력과 좋은 터치, 전술적 감각, 헤딩 능력을 갖춘 선수였다. 더욱이 그는 뛰어난 체력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어서 많은 기회를 만들고 득점할 수 있었다.피어슨은 동료들이 어디로 달려갈지 미리 아는 듯한 본능으로 원터치 패스를 이용해 팀원들을 돕는 능력도 갖고 있었다. 그는 결코 화려하지 않고 공격력은 다소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크로스를 올리거나 수비수를 제치는 데에도 능했다. 피어슨의 팬들은 그의 장인 정신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는 잉글랜드에서 당대 최고의 인사이드 포워드로 평가받았다.
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 잉글리시 풋볼 리그 디비전 1 우승 1회: 1951-52(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FA컵 우승 1회: 1947-48(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FA 채리티 실드 우승 1회: 1952(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 잉글리시 풋볼 리그 디비전 1 준우승 4회: 1946-47, 1947-48, 1948-49, 1950-51(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 출처: 위키피디아, 11v11[2] 솔퍼드는 현재 그레이터 맨체스터에 속해있지만 1974년까지는 랭커셔에 속해있었다.[3] 피어슨의 첫 해트 트릭은 1946년 9월, 리버풀 FC와의 경기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