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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24 00:12:24

수차관의 살인



아야츠지 유키토「관」 시리즈
십각관의 살인
(1987)
수차관의 살인
(1988)
미로관의 살인
(1988)
인형관의 살인
(1989)
시계관의 살인
(1991)
흑묘관의 살인
(1992)
암흑관의 살인
(2004)
깜짝관의 살인
(2006)
기면관의 살인
(2012)
쌍둥이관의 살인
(미정)

수차관의 살인
水車館の殺人
파일:attachment/수차관의 살인/Example.jpg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장르 추리
저자 아야츠지 유키토
옮긴이 유혜승 (학산문화사)
김은모 (한스미디어)
출판사 파일:일본 국기.svg 코단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학산문화사[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한스미디어
최초 발행 1988년 2월 5일
국내 출간일 1997년 (학산문화사)
2012년 3월 29일 (한스미디어)
쪽수 파일:일본 국기.svg 274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307 (학산문화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355 (한스미디어)
ISBN 파일:일본 국기.svg 4-06-181320-X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8987657019 (학산문화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9788959753932 (한스미디어)

1. 소개2. 수차관3. 등장인물4. 줄거리5. 신장개정판 작가 후기6.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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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일본의 추리소설아야츠지 유키토의 소설. 관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이다. 1988년 출판되었으며 이후 2008년 신장개정판이 나왔다. 신장개정판은 전에 나온 십각관의 살인과 마찬가지로 문장을 다듬고 각종 오류나 오자를 수정했으며 사실상 완전판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학산문화사에서 구판을 정발했다가 절판, 이후 한스미디어에서 신장개정판을 바탕으로 하여 정식발매되었다. 현재는 다시 절판된 상태.

작가 아야츠지 유키토는 원래 십각관의 살인을 쓸 때는 작품들을 시리즈화하려는 생각이 없었지만 이 수차관의 살인을 쓰면서 본격적으로 관 시리즈를 계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의 구성이 좀 특이한데, 소설의 현재 시점인 1986년, 그리고 1년 전인 1985년 두 개의 시간대가 번갈아가면서 서술된다. 화자도 서로 다른데 1985년은 전지적 시점이며 1986년은 수차관의 주인인 후지누마 기이치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충격적인 반전 및 트릭으로 유명했던 십각관의 살인과 비교해서 반전이나 트릭은 그렇게 놀랍지는 않다. 추리소설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금방 눈치챌 수 있을 정도. 그래서 반전, 트릭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평이 그렇게 좋지 않은 편으로, 관 시리즈 작품 중에서는 인기가 낮은 편이다.

그러나 반전을 위한 복선들이 충실하게 잘 깔려있고 힌트도 관 시리즈치고는 정정당당하게 나오는 편이라서 공정한 대결을 원하는 팬들에게는 나름대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조잡한 문체로 비판받던 십각관의 살인에 비해 상당히 문체가 좋아졌으며 시점이 번갈아가며 제시되는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꽤나 흡입력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음울하면서도 칙칙한 분위기를 잘 살렸으며 특히 여태까지의 복선을 잘 살린 결말은 높이 평가받는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절친인 아리스가와 아리스가 관 시리즈 중에서 시계관의 살인 다음으로 좋아하는 소설이라고 한다.(시계관의 살인은 걸작이 아니라 '대걸작'이라고...) 그래서인지 구판과 신장개정판 양쪽에 후기 및 추천사를 써주기도 했다.

2. 수차관

파일:수차관 평면도 1.jpg 파일:수차관 평면도 2.jpg
수차관의 평면도

가까운 마을에서 차를 타고 한참을 가야 나오는 외딴 곳에 있는, 서양식 을 떠올리게하는 모습의 저택. 후지누마 기이치의 의뢰로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지었다. 사방이 네모나게 벽으로 둘러쌓여 있으며, 벽 안쪽에는 후지누마 잇세이의 작품들이 걸려있는 복도가 있다. 북서쪽에는 집주인 후지누마 기이치가 머무는 본관이, 남동쪽에는 손님들이 머무는 별관이 있다. 서쪽 벽에는 발전기 역할을 하는 거대한 수차 3개가 언제나 돌아가고 있다.

3. 등장인물

4. 줄거리

사고로 인해 흉측하게 망가진 얼굴을 하얀 가면으로 가린 채 살아가는 후지누마 기이치. 그는 친구의 딸 후지누마 유리에를 아내로 맞아 외딴 골짜기에 세운 '수차관'이라 불리는 괴이한 저택에서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을 거부한 채 살아간다. 그가 유일하게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날은 그의 아버지 후지누마 잇세이의 기일이다.

후지누마 잇세이는 천재 화가이자 환시자(幻視者)로, '마음의 눈'으로 보고 캔버스에 옮긴 환상의 풍경들이 미래를 예시하기도 한다. 후지누마 잇세이의 그런 그림에 매혹당한 네 사람이 그의 기일에 맞춰 '수차관'을 방문해 작품을 감상하며 애도의 시간을 갖는다.

폭풍우가 치는 후지누마 잇세이의 어느 해 기일, 네 사람의 방문객이 찾아오면서부터 그들의 고요한 일상에 파열이 일어난다. 소각로에서 머리, 몸통, 양팔, 양다리의 여섯 토막 사체가 발견되고, 수차관에서 일하는 가정부는 '탑' 발코니에서 떨어져 죽는다. 그리고 후지누마 잇세이의 마지막 작품 '환영군상'과 함께 한 남자는 사라져 돌아오지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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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 스포일러 #===
수차관 살인사건의 범인은 마사키 신고였다!

초기에는 다들 후지누마 잇세이의 그림 '분수'와 함께 감쪽같이 사라진 후루카와 쓰네히토가 마사키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여기에는 1. 후루카와의 방은 2층이었는데 1층에서 밤새 체스를 두던 모리 시게히코와 미타무라 노리유키는 후루카와가 내려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2. 그 외 밖으로 이어진 곳은 창문 뿐이었는데 사람이 나갈 수 없는 크기였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기에 모리와 미타무라가 잘못 본 것으로 결론났었다.

하지만 문제의 창문으로 후루카와가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토막을 내는 것. 마사키는 후루카와를 죽여 창 밖으로 내던졌고, 공범인 후지누마 유리에를 시켜 그림을 숨기고 잠겨있던 수차관의 뒷문을 열였다. 이로서 후루카와가 그림을 훔쳐 뒷문으로 달아났다는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마사키가 이런 일을 꾸민 이유는 다음과 같다. 마사키는 과거 후지누마 기이치와 함께 차를 타다 일어난 교통사고로 후천적인 색맹이 생겼는데, 이때문에 화가의 길을 포기해야만 했다. 꿈을 잃고 방황하던 중 큰 빚까지 지게되었고, 빚을 갚기 위해 범죄에 손을 댔다 경찰을 피해 수차관으로 도망쳐왔다. 기이치가 자신의 모든 걸 빼앗았다 생각한 마사키는 어릴때부터 수차관에 갇혀 살던 유리에와 함께 기이치를 죽이고 그의 신분을 빼앗을 계획을 세운다. 기이치의 시체를 자기껄로 위장하는 것은 무리였기에 자신과 신체적 특징이 비슷한 제3자 후루카와를 죽인 것이다. 토막낸 후루카와의 시체는 소각로에서 태우고, 자신의 것이라고 속이기 위해 반지가 끼워진 자신의 왼손 약지까지 잘라냈다. 주인에게 관심이 없는 집사 구라모토 쇼지는 별 문제가 안 되었지만, 이발이나 목욕도 돕던 가정부 네기시 후미에는 계획에 방해가 되었기에 제일 먼저 살해했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본관에서 기이치를 죽이는 것까진 성공했지만, 숨겨둔 그림을 발견한 구라모토를 몰래 제압하러 나갔다 온 사이 기이치가 사라진 것. 아직 죽지 않았던 기이치가 서재로 가서 수차관에 있는 비밀통로로 달아난 것이었다. (나카무라 세이지는 자신이 지은 건물에 이런 비밀장치를 숨겨두곤 한다.) 하지만 마사키는 비밀통로를 찾지 못했고, 결국 기이치가 아직 수차관 어딘가에 숨어있다는 두려움에 서재를 봉인한다.

시마다 기요시가 범행을 알아내고, 때마침 경찰들도 도착하자 마사키는 시마다가 발견한 비밀통로로 달아난다. (장식용 벽난로에 숨겨져 있었다.) 수차관 지하 비밀의 방에 들어간 마사키는 기이치의 시체와 잇세이의 유작 '환영군상'을 발견한다. 그림에는 놀랍게도 잇세이의 사후 세워진 수차관과 유리에를 연상시키는 소녀, 기이치가 쓰고 다니던 가면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의 한 구석에는 약지가 잘려나간 왼손이 있었다.

5. 신장개정판 작가 후기

뜻밖에도 『십각관의 살인』(신장개정판) 평이 좋아 ‘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수차관의 살인』도 신장개정판을 내게 되었다.
본문을 개정할 때의 방침은 ‘십각관’ 때와 똑같다. 플롯과 스토리는 일절 변경하지 않았고 에피소드의 수도 가능한 한 늘리거나 줄이지 않았다. 그리고 읽을 때 원래의 맛이 크게 변하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주로 문장을 세세하게 손봤다. 내용면에서도 요즘의 시각으로 볼 때 이건 좀 아니지 않느냐고 느껴지는 부분 몇 군데를 수정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작품의 완성도는 다소나마 올라갔다고 생각한다. ‘십각관’에 이어 이 ‘수차관’도 이 책을 결정판으로 삼고 싶다.
이 작품의 초고는 지금으로부터 약 21년 전, 1987년 여름과 가을에 걸쳐 썼다. 같은 해 9월에 『십각관의 살인』이 출판된다고 결정된 것이 분명 5월인가 6월이었다. 그때 이미 될 수 있는 한 빨리 두 번째 작품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고 구상을 하기 시작해 ‘십각관’이 간행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초고를 완성한 기억이 난다. 구판 ‘후기’에서도 언급했지만, ‘관’ 시리즈라는 연작 장편 소설의 콘셉트는 이 작품을 쓸 때 떠올랐다.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희한한 건축가와 연관된 각지의 별난 건물을 무대로 이런저런 기괴한 사건이 일어난다. 시리즈에서 공통되는 모티브는 어디까지나 ‘관’이니까 설령 이 작품에서는 아무개 씨가 명탐정으로 활약하지만 다른 작품에서도 꼭 같은 역할을 맡는다고는 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이미지만은 당초부터 머릿속에 있었던 것 같다. 하여튼 이건 제법 재미있겠다는 손맛을 느꼈다.
그건 그렇고 그로부터 21년이 지난 지금도 이 시리즈의 속편을 고대한다는 이야기가 들리다니 역시 감사하다. 적어도 열 편까지는 쓰겠다는 결심은 변하지 않았으니 느긋하게 기다려주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21년 전, 『수차관의 살인』을 쓰면서 염두에 둔 것은 정말 작정하고 ‘그야말로’ 본격 탐정 소설을 써보자는 마음이었다.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의 오마주이기도 한 『십각관의 살인』은 커다란 한 방으로 승부한, 말하자면 기습적인 놀라움을 노린 작품이었다. 이번에는 반대로 ‘본격 미스터리의 경향’이 조금 더 강한, 즉 주어진 단서를 이용해 진상을 논리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작품을 쓰려고 했다. 이것은 당시 내가 꼭 도전해보고 싶은 과제 중 하나였다.
어쩌면 이런 종류의 미스터리에 익숙한 독자들의 눈에 이 작품은 ‘너무 쉬운 문제’로 비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직감에 의존하지 않고 세부적인 진상까지 추리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십각관’보다도 마니아적인 측면을 지닌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이번 개정 작업을 통해 그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나도 제대로 된 장편 본격 미스터리를 쓸 수 있다’고 실감했다는 의미에서도 이 작품은 내게 좀처럼 잊기 힘든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잊기 힘든 요소가 또 하나 있다. 바로 마지막 장의 마지막 장면이다. 솔직히 말해 작품을 쓰던 나도 놀랐다. 구상 단계에서는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라스트 신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집필을 하다가 언제 이 같은 결말이 떠올랐는지 이제는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그런데 참 재미있게도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 남긴 여운이 오래도록 남아 있다가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인 『암흑관의 살인』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다시금 이렇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 자신도 참 감개가 새롭다.
생각해보니 이런저런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쨌든 ‘수차관’의 고단샤講談社 노블스판 초판은 ‘십각관’이 출간된 지 5개월이 지난 1988년 2월에 간행되었다. 그리고 약 반년 후에는 우타노 쇼고, 노리즈키 린타로 두 작가의, 1년 후에는 아비코 다케마루, 아리스가와 아리스 두 작가의 데뷔작이 각각 출판되었다. 그야말로 ‘신본격’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시기였다. 모두 젊었고, 무서운 줄 모르고 배짱 있게 열심히 썼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시간이 이만큼이나 흐르면 어느 정도 늙은이 같은 생각이 들기 마련인가 보다.
책은 나왔으나 1년 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만큼 앞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그 당시의 묘하게 설레고 열띤 감각은 지금도 분명 모두의 가슴속에 남아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로부터 2008년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 무렵의 동지들이 저마다 제일선에서 활약하고 있으니, 더없이 기쁘고 믿음직스럽기 그지없다.
이 책에도 『십각관의 살인』(신장개정판)과 마찬가지로 16년 전의 구판 해설이 실려 있다. 해설자는 아리스가와 아리스 씨다. 그래서 역시 아리스가와 씨에게 신장개정판의 새 해설도 부탁하기로 했다.
이례적인 의뢰를 쾌히 받아들여주었을 뿐 아니라,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저주’(너는 죽을 때까지 ‘본격의 혼을 지닌 작가’다, 라는) 같은 해설을 새로이 써준 오랜 ‘맹우’에게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감사의 뜻을 전한다.

2008년 3월
아야츠지 유키토

6.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해설

구판 해설
아야츠지 작가의 저서에 내 명함을 끼워 넣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일단 그와 나의 비슷한 점에 대해 쓰겠다.
그와 나는 같은 세대이다. 생일은 내가 1년 8개월 빠르지만, 작가 데뷔는 그가 1년 4개월 앞섰다. 둘 다 초등학생 때 ‘미발표된 처녀작’을 썼고, 그 이후로 추리작가가 장래의 꿈이었다. 심취한 작가는 엘러리 퀸. 결국 둘 다 교토의 대학에 입학해 추리소설 연구회에 들어갔다. 동아리 동인지에 기고했고, 현상공모에 떨어진 경험이 있다. 데뷔할 때 그는 시마다 소지 씨, 나는 아유카와 데쓰야 씨의 추천을 받았으며 현상공모의 난관을 돌파하지는 못했다. 간사이 지방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살고 있다. 물론 서로 얼굴도 안다. 붙여진 꼬리표는 ‘신본격파’다.
비슷한 점이 이만큼이나 많은 그와 그의 작품에 대해 쓰자면, 쓸 수 있는 말, 쓰고 싶은 말, 그리고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말은 많다. 한정된 지면에 그 일부분을 쓰도록 하겠다.
막대한 유산의 상속을 둘러싸고 대저택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 명탐정의 추리가 밝혀내는 기발한 트릭과 뜻밖의 범인. 치기가 넘치고 소수의 호사가들이나 즐겼던 그런 추리소설에 혁명을 일으킨 사람은 마쓰모토 세이초였다. 쇼와 30년대(쇼와 30년은 1955년이다) 전반, 마쓰모토 세이초의 등장으로 현실성과 사회성이 가미되어 추리소설은 그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독자를 얻었다. 이 탈피를 두고 ‘추리소설이 시민권을 얻었다’는 표현을 썼으며 ‘마쓰모토 세이초 이전’, ‘마쓰모토 세이초 이후’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그로부터 30여 년. 나는 지금 ‘아야츠지 유키토 이후’라는 말을 제창하고 싶다.
데뷔작 『십각관의 살인』의 첫머리에서 그는 등장인물을 통해 이런 말을 한다.
“그러므로 한때 일본을 풍미했던 ‘사회파’ 식의 리얼리즘은 이제 고리타분해. 원룸 아파트에서 아가씨가 살해된다, 형사는 발이 닳도록 용의자를 추적한다, 드디어 형사는 아가씨의 회사 상사를 체포한다, 이런 이야기는 좀 그만두었으면 좋겠어. 뇌물과 정계의 내막과 현대사회의 왜곡이 낳은 비극 따위는 이제 보기도 싫어. 시대착오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역시 미스터리에 걸맞은 것은 명탐정, 대저택, 괴이한 사람들, 피비린내 나는 참극, 불가능 범죄의 실현, 깜짝 놀랄 트릭…….”
이것은 아주 한쪽으로 치우친 본격 추리소설 팬의 의견일 뿐, 아야츠지 작가의 생각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화자를 통해 작가가 내동댕이친 기존의 미스터리에 대한 불만의 표명과 노골적인 도발이라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그가 ‘십각관’을 지금 썼다면 이 부분에서 조금 더 원만한 표현을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십각관’을 세상에 내보냈을 때, 상황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다. 본격 추리소설은 몰락한 구가의 양상을 나타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꼴사납고 유치하고 시대에 뒤쳐졌다는 인식이 대세였다(지금도 사정은 다를 바 없다는 견해도 있지만). 멸종을 기다리는 공룡 취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첫머리의 도발은 필연이었다. 좋아하는 것을 쓰고, 쓰고 싶은 것을 쓰기 위해 그는 바람을 거스르며 출범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십각관’은 담당 편집자이자 신본격의 선구자인 우야마 히데오 씨 자신의 예상조차 뛰어넘어 본격을 갈망하던 독자에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며 증쇄를 거듭해야 했다. 아야츠지 작가는 이 책 『수차관의 살인』을 비롯해 『미로관의 살인』까지 관 시리즈를 연이어 발표했다. 화려하고 정교하며 치밀한 아야츠지 식 미스터리는 확실하게 팬을 늘려갔다. 1990년의 대작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은 주간문춘의 연간 베스트 10 투표에서 1위를 차지했고, 아깝게도 수상은 놓쳤지만 같은 해 추리작가협회상 후보작에 선정되었다. 그것은 아야츠지 유키토라는 아주 드문 재능의 승리였고, 동시에 일찍이 리얼리즘이라는 이름 앞에 밀려난 본격 추리소설의 복권이기도 했다. 이후 몇몇 젊은 작가가 ‘신본격파’로서 뒤를 이어 추리소설계의 새로운 동향으로 발전했지만, 아야츠지 작가는 타의추종을 불허하고 지금도 선두를 달리고 있다. ‘아야츠지 이후’가 시작된 것이다.
바람을 거스르며 출항해 난파할 것이 뻔해 보이던 그가 성공했다는 것은 시대를 역행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제 와서 낡아빠진 본격 미스터리를 쓰다니’, ‘저래서는 신본격이 아니라 헌본격이다’ 운운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제 와서 본격을 쓰는 자세 그 자체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을 하기는 어렵다. 다만 그런 사고방식은 ‘인류는 꾸준히 노력해서 계속 전진해왔다. 앞으로도 부단한 노력을 통해 더 나은 미래로 향해야 한다. 거기에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라는 요즘 완전히 쇠퇴한 역사관과 똑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몹시 불확실하고 교만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이 그들의 사상이자 신앙이라면 서로 다른 가치관이 존재한다고 인식하고 헤어질 수밖에 없다(다만 그들의 가치관은 종종 편견에 사로잡힌다). 인류 문명은 뒤로 돌아가지 못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말았지만, 추리소설(또는 문학, 아니면 감히 예술이라고 해도 되리라)에 그런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본격’이라는 호칭은 다분히 편의적이라서 어쩌면 ‘신인의 본격’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지도 모른다(지금까지 본격을 읽은 적이 없는 독자에게는 새롭겠지만). 하지만 ‘헌본격’이라는 호칭은, 어설픈 별명을 붙이고 흐뭇해하는 것처럼 천박하고 역시 무의미하다. 일부러 그렇게 바꿔 말하려는 행위 그 자체에다 아무 생각도 없느냐는 말을 던져주고 싶을 정도다. 항간의 복고 붐과 ‘이른바 신본격’ 무브먼트가 똑같은 현상이라는 인식이 어디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다. 패션의 다양화가 진행된 끝에 ‘옛것은 신선해 보여서 멋지다’고 많은 사람이 뒤를 돌아본 것이 복고 붐이리라. 추리소설의 세계는 전제가 되는 상황이 다르다. 추리소설 역시 다양하기는 하지만, 과잉이 아니라 과소의 문제가 있었다. 난숙이 아니라 미숙의 문제가 있었다(1년 동안 출판되는 자칭 국산 추리소설의 종수는 증가를 거듭해 지금은 5백종이 넘었지만, 그 수는 많은 팬들에게 그저 공허하게 울려 퍼지리라). 헌본격? 과거의 그리운 추리소설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이 몇 만 명이나 되고, 그들이 신인의 신간에 기뻐했다는 말인가? 추리소설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추리소설을 읽고 싶다. 나는 아야츠지 식 미스터리가 독자들 사이에 잠재된 그런 욕구에 부응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추리소설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들만큼 그런 추리소설을 쓰고 싶은 사람도 적지 않았으리라. ‘아야츠지 이후’에 데뷔한 수많은 신본격파 신인의 존재가 그 증거다. 되풀이해 말하지만 다 추리소설의 과소가 원인이었다. 아까 ‘십각관’에서 인용한 문구에 나 역시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일찍이 자주 들어 지긋지긋하게 느껴지던 말이 있다. “나는 ‘추리’소설이 아니라 추리‘소설’을 쓰고 싶다.” 물론 훌륭한 일이라는 것은 잘 안다. 다만 “나는 일단 ‘추리’소설을 쓰겠다”고 말하는 작가가 오랫동안 없어서 너무나 지긋지긋했던 것이다(뭐, 굳이 그런 설명을 할 필요 없이 작품으로 보여주면 되지만). 하지만 지금은 아야츠지 유키토가 있다.
아야츠지 작가와 신본격에 대해 자세히 논할 만한 지면은 없다.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고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수차관의 살인』은 1988년 2월에 발표된 ‘십각관’에 이은 아야츠지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바깥세상으로부터 고립된 저택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이 모티브다. 탐정 역할을 맡은 주인공도 같지만 무엇보다 ‘뜻밖의 공통점’은 저택의 설계자가 나카무라 세이지라는 점이리라. 이른바 저택에서 일어나는 연쇄살인물을 주제로 한 저택 시리즈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이 쓰였지만, 무대인 저택의 설계자가 똑같다는 설정은 지금까지 없었다. 기괴한 수수께끼의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저택에서 잇달아 참극이 발생하는 이 시리즈는 10부작이 될 거라고 한다. 시리즈를 읽어나가다 보면 각 사건의 배후에 다른 종류의 정체 모를 사악한 뭔가가 숨어 있다는 고혹적인 수수께끼가 독자를 기분 좋게 매료시킬 것이다. 시리즈 완결은 아직 멀었지만, 그 마지막에 아야츠지 작가는 과연 어떤 장치를 준비할까? 이 시리즈에 홀린 당신은 지금 캄캄한 함정 속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어떤 곳에 떨어질지는 짐작할 수 없다.
수차관, 외벽과 탑이 있는 고성 같은 저택. 환상적인 풍경화가 걸린 회랑. 폭풍우 속에서 삐걱거리며 돌아가는 수차 세 대. 휠체어를 타고 다니고 가면을 쓴 저택 주인. 그의 아내이자 저택에 갇혀 지내는 미소녀. 모두 현실성에 대한 안티테제다. 평범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개그가 될 수밖에 없는 이런 요소를 잘 사용하여 그는 ‘본격 추리소설’을 그려냈다. 과거와 현재가 환상적으로 교차하는 가운데, 밀실 속의 인간증발을 비롯한 기괴한 사건과 참극이 발생한다. 그 중에는 기존의 본격물에서 사용된 아이디어 와 트릭의 변종(실로 교묘한)도 포함되어 있으며 작가가 복선을 공정하게 깔아둔 덕분에 몇몇 부분에서 독자가 진상을 꿰뚫어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모두 다 꿰뚫어보기는 정말로 어려울 것이다. 결국 독자는 고금동서의 추리소설에 정통할 뿐 아니라 그 수법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아는 그의 뛰어난 재주에 희롱당하며 잇달아 나타나는 갖가지 수수께끼에 잔뜩 취한 채 읽어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이윽고 고대하면서도 늦게 오기를 바랐던 결말이 찾아온다. 바로 그때 독자를 취하게 만든 수수께끼는 아주 깔끔하게 풀리고, 거대한 문이 닫히듯이 이야기는 끝을 맞이한다.
여기서 종종 본격 추리소설에 대한 편견이 생긴다. 취기가 가신 후의 허무함이 싫다는 것이다. 다 읽은 한 권의 추리소설. 그것은 빈칸을 다 채운 십자말풀이와 똑같다. 환멸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런 말을 해주고 싶다. 한편으로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니냐고 딴전을 부리는 사람도 있다. 나는 그 어느 쪽에도 찬성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야츠지 작가 역시 마찬가지다. ‘논리와 감성, 과학과 신비의 공범 관계가 만들어낸 환상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 항상 논리와 과학의 명확한 승리로 끝난다면 본격 추리소설은 쇠퇴를 면할 수 없다. 비극을 그려 두 가지 요소를 항상 가까스로 무승부로 만들어야 본격 추리소설의 꿈은 이어지는 것이다.
지금 그것에 관해 자세히 논할 여유는 없다. 그러므로 『수차관의 살인』을 당신이 어떻게 읽었는지 잠깐 생각해주기 바란다. 앞으로 읽으실 분도 계실 테니 밝히지는 않겠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서 작가가 부린 재주는 단순히 덤 삼아 집어넣은 여흥이 아니라는 것만 써두겠다. 비슷한 재주를 부려서 이야기를 매듭지은 작가가 없지는 않다. 거장의 고전적인 명작에도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아야츠지 작가의 재주에 제일 큰 감명을 받았다(거장의 전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는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저택에서 일어난 살인’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이미 풀린 수수께끼는 등 뒤의 깊고 짙은 수수께끼에 이어져 있는 것이다. 또한 괴상한 모습을 한 저택 열 채가 모두 모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비밀이 밝혀지더라도 그 앞에는 더욱 농밀한(그리고 분명 아름다운) 어둠이 펼쳐질 것이 틀림없다.
지금은 아직 읽지 않은 독자도 결국 그의 걸작 『키리고에 저택 살인사건』을 손에 들리라. 여기서 그는 은밀하게 이런 메시지를 보낸다.
- 인공적인 수수께끼는 순수하고 단순한 추리만으로 깔끔하게 풀어낼 수 있다. 하지만 어둠은 얼마든지 있다.
‘신본격’의 내일은 모른다. 붐조차 아닌 이런 것은 기껏해야 한때의 무브먼트다. 결국은 진짜만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살아남은 아야츠지 유키토는 마지막까지 본격 추리소설을 계속 쓰리라. 화려하고 정교하고 치밀하면서 깊은 어둠을 짊어진, 추리소설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추리소설을.

1992년 3월
아리스가와 아리스
신장개정판 해설
수차는 지금도 돌아간다
『수차관의 살인』이 고단샤 노블스의 책으로 발표된 지 20년이 지났다. 그리고 문고화된 지 16년 만에 신장개정판이 나왔다. 나는 예전의 문고판에 해설을 썼는데, 그 후의 생각 등을 써달라는 의뢰가 들어왔기 때문에 다시 ‘수차관’ 권말에 내키는 대로 쓴 글을 덧붙이게 되었다. 잠시만 함께 해주기를 바란다.
예전 해설에서 아야츠지 작가와 나의 공통점을 자세히 적었다. 당시부터 ‘해설 좀 써줄래?’, ‘알았어’로 통하는 사이였지만, 알고 지낸 지 3년째까지는 그저 친하게 지내는 동업자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만나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혹시 다른 일로 먹고 살게 된다고 해도 친분을 유지하고픈 친구가 되었다. 최근에 그가 나를 맹우로 지칭하는 문장을 몇 번인가 읽었는데, 그는 내게 맹우이자 외우畏友다. ……그래서 앞으로는 아야츠지 작가라는 딱딱한 호칭은 그만두고 아야츠지 씨라고 하겠다.
1999년 10월에 방영된 ‘안락의자 탐정 등장(마이니치 방송)’의 원안을 공동으로 쓴 것이 교우가 깊어진 가장 큰 계기이다. 이것은 간사이 지방 방송국의 심야 방송에서 기획한 현상 퀴즈 드라마로, 완성될 때까지의 경위는 에세이집 『아야츠지 유키토 2001-2006』에 자세히 나와 있다. 평이 좋았기 때문에 시리즈로 만들었는데(2008년 10월에 제7탄 방송 예정) 그때마다 둘 중 하나의 집에 가서 밤새 아이디어를 다듬었다. 내용은 정통적인 범인 맞히기로, 재미와 논리적인 결론,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했기 때문에 일로서는 정신적인 부담이 컸다. 파트너가 있어도 꼭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아서, 막다른 길에 몰린 끝에 둘 다 머리에 쥐가 날 뻔한 적도 많았지만 그런 만큼 유대감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평소는 혼자 창작활동을 하는 만큼 공동으로 작업을 하는 데서 생기는 연대감은 아주 컸다. 뿐만 아니라 브레인스토밍 과정에서 서로의 본격 미스터리 가치관을 맞부딪쳐서 아주 좋은 자극을 얻을 수 있었다. ‘본격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간단하게 대답하기는 어렵지만 정의를 따지지 않고 맞부딪칠 때 생각지도 못한 것이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수차관의 살인』 후기에서 ‘본격 미스터리란 무엇인가?’라는 논쟁을 언급하면서 (굳이 애매한 표현으로) ‘분위기’라고 대답한 아야츠지 씨는 역시 그 문제에 민감하다. 본격=분위기론에 대해 16년 전 문고판 후기에서는 ‘순수한 본격 미스터리를 고집하는 사람이 보면 격노할 만한 의견’일지도 모르지만, ‘현재도 기본적으로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고’ 정적인 이론을 내세우는 바람에 속박되어 ‘도리어 재미있는 소설을 쓸 수 없을까 봐’ 두렵다고 말했다. 그런 태도를 취하면서 창작 속에서 ‘본격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직면했을 때 그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요전에 어떻게 작업할지 상의하기 위해 만났을 때 이런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의 범인은 목적을 달성하면 경찰에 붙잡혀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설정에 대해 내가 ‘그건 아니다. 본격 미스터리의 범인은 그런 식으로는 범행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딱 잘라 말하자(그 자리에서 떠오른 생각일 뿐 나 자신이 반드시 실천하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아야츠지 씨는 ‘본격 미스터리에 어긋나나? 재미있는걸!’이라고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뜨거운 본격 미스터리 논쟁이 벌어지지는 않았지만(그렇게 샛길로 빠지면 마감날까지 일을 끝낼 수 없다), 생각할 힌트가 하나 손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요즘 그는 자신의 호러 체질을 자주 자각하는 듯하지만, 그래도 ‘본격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가 항상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걸 보니 역시 뼛속까지 ‘본격의 혼을 지닌 작가’다.
의견이 어긋날 때도 많다. 그래도 분위기가 결코 험악해지지 않는 것은 그가 신사이고, 내가 아야츠지 씨의 재능에 경의를 표하기 때문이다. ‘본격의 혼을 지닌 작가’인 그는 묘안이 떠올라서 이야기를 할 때 정말로 기쁜 듯이 눈을 반짝인다. 한편 나는 속으로는 자신이 있어도 ‘이런 건 어떨까’하고 조금 망설이며 이야기를 꺼낸다(그런 기분이 든다.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일지 말지 한 발 먼저 가르쳐주는 것은 역시 그의 눈이다. ‘재미있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빛이 난다.
아야츠지 씨가 쓰는 소설은 아주 교묘하고 사람의 뒤통수를 치기 때문에 마음을 놓을 수 없지만, 아야츠지 씨 본인은 겉과 속이 똑같은 사람이라서 기쁨이 깃든 그 눈을 보면 정말로 마음이 놓인다.
다만 합작이란 창작자로서 알몸을 드러내는 셈이나 같아서 무서울 때도 없지는 않다. 최신작에 대해 협의할 때의 일이다. 내가 제시한 아이디어를 들은 그가 ‘아리스가와 씨라면 이걸로 쓰겠지?’(‘쓸 수 있겠지?’였는지도 모르겠다)라고 물었다. ‘쓰고말고. 이 부분에 환상미를 더하고 숲의 묘사에 힘을 기울일 거야’라고 대답하면서 한순간 오싹했다. 그의 말투에 비꼬는 느낌은 전혀 없었지만, 아야츠지 유키토라면 쓰지 않는다, 쓸 수 없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이 소재는 아직 미적지근해. 생각이 짧았어’라고 마음을 고쳐먹었고, ‘그는 나보다 한 발짝 더 파고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고서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덧붙여 아야츠지 씨가 멋진 아이디어를 제공해준 덕분에 겨우 그 소재를 써먹을 수 있었다. 나 혼자였다면 며칠 동안 끙끙대도 떠오르지 않았을 수법이었다. 그 아이디어가 더해진 순간 작품 전체의 격이 높아진 것만 같았다. 합작의 묘미이다.
세상에는 ‘나는 이 세상 누구보다 작가 아야츠지 유키토와 그가 쓴 작품을 사랑한다’고 소리 높여 말하고 싶은 팬도 많이 계시리라. 미안하다. 어른스럽지 못하지만 ‘아리스가와 아리스는 그의 팬으로서 그와 함께 본격 미스터리를 쓰고 있다’고 자랑하고 싶다. 미스터리 작가가 된 덕분에 최고의 위치를 꽉 움켜쥘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런 파트너십 속에서 바라보았을 때, 아야츠지 유키토가 본격 미스터리에 쏟아 붓는 애정과 열정은 데뷔한 이래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본격 미스터리를 창조하는 능력 역시 전혀 쇠퇴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사실을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다니 역시 행복이다.
『수차관의 살인』에 대해서도 쓰겠다.
열렬한 팬을 수많이 거느린 관 시리즈 중에서 이 작품의 평가가 어떻고, 얼마나 인기가 있는지 나는 모른다. 걸작이 한데 모인 만큼, 관 시리즈의 개별적인 작품마다 ‘이 작품이 제일 좋다’는 팬들이 있는 모양이니 까. 나는 『시계관의 살인』 다음으로 이 작품을 좋아한다(‘시계관’은 걸작이 아니라 대걸작이다).
데뷔작 『십각관의 살인』은 충격적이었다. 우리나라 본격 미스터리 역사의 이정표와 같은 명작이라고 불러야 할 작품인 데다, ‘십각관’ 덕분에 관 시리즈가 탄생했으니 제일 처음 말해두고 싶다. 하지만 책이 나왔을 때 바로 읽은 나는 아야츠지 유키토라는 신인을 덮어놓고 ‘신용’하지는 않았다. 작가 본인에게 이야기한 적이 있으니 거침없이 쓰겠다. ‘십각관’의 임팩트가 너무나 강했기 때문에 비비 꼬인 눈으로 ‘요행 아닐까? 이거 하나로 끝날 작가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것이다(무례하게도).
기대와 불안을 품고 두 번째 작품에 주목했다. 바로 그 작품이 ‘수차관’이다. 다 읽고 나자 비관적인 내 예상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십각관’은 요행이 아니었다. 거대한 트릭과 미스디렉션으로 깜짝 놀라게 만드는 작품은 즐겁기는 하지만, 그런 작품은 ‘그 작가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애 최고이자 마지막 아이디어’의 결정체일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이리저리 복선을 깔고 크고 작은 다양한 트릭을 배치해 짜 맞추는 묘미를 선사하는 작품은 요행으로는 쓸 수 없다. 멜로디는 누구나 입으로 흥얼거려서 만들 수 있지만, 아마추어에게 대위법에 입각한 오케스트라는 무리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수차관’을 다 읽었을 때 나는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작품 전체를 감싼 고딕 취미에도 감탄했다. 이것은 ‘십각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요소다. 또다시 어설픈 비유를 하자면, 내가 선반에 늘어놓고 감상하기만 하던 골동품 램프를 아야츠지 씨가 실제로 잘 사용해서 놀랐다. 고성 같은 서양식 저택, 가면을 쓴 저택 주인, 어쩐지 기분 나쁜 집사. 그런 요소는 ‘역시 현대를 무대로 본격을 쓰면 작품 속에 집어넣기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쓰는 사람에게 기량이 있으면 아무 문제도 아니었다. 한 방 먹었다.
그런 연유로 ‘수차관’은 내게 ‘십각관’보다 나으면 나았지 절대 못하지는 않은 충격적인 작품이다. 고단샤 노블스판의 띠지에 적힌 문구는 바로 ‘향기가 넘치는 신본격 추리 제2탄!’.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지금도 이어지는 신본격이라는 호칭의 시작이다. 그러니 그런 의미에서도 기념해야 할 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저자의 말’에는 “폐쇄된 ‘정적’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돌아가는 세 대의 수차. 저택은 이 수차의 힘으로 시간의 수면에 떠오른 ‘배’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시간의 흐름은 종종 강의 흐름에 비유되는데, 이 ‘배’는 조금 기묘하다. 어디로도 향하지 않고 그저 시간의 수면에 떠올라 있을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것을 본격 미스터리의 비유라고 받아들이면 바로 이해가 간다. 시대의 흐름에 떠내려가지 않고 머물러 있어야 아름다운 저택은 저택일 수 있다. 떠내려가지 않고 버티기 위해 작가와 독자 모두 모이라고 호소하기 위해 세 대의 수차로 저택을 상징한 것이리라. 수차는 지금도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1] 《수차관의 살인사건》이란 제목으로 출판[2] 다만 유리에 본인이 수차관 안에서만 살아서 결혼의 개념을 잘 모르기 때문에, 혼인 신고는 올렸지만 사실 그냥 동거인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