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송인석 |
생년월일 | 1978년 8월 14일 ([age(1978-08-14)]세) |
출생지 | 대전광역시 |
학력 | 진잠중 - 대전중앙고 - 서울시립대 |
혈액형 | A형 |
포지션 | 레프트 |
신체 | 196cm, 90kg |
소속 구단 | 현대자동차서비스/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2001 ~ 2011) 화성시청 배구단(2011 ~ 2013) |
V-리그 챔피언 결정전 우승 | ||
2006 | 20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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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배구인.현대캐피탈의 리즈 시절을 이끈 멤버 중 한 명으로, 포지션은 레프트, 별명은 송스타였다. 마지막으로 활동했던 서울시립대학교(서울특별시청) 출신의 배구 선수였다.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송인석은 대전중앙고등학교 1학년부터 배구를 시작했으며 포지션은 센터였다. 배구 명문 대전중앙고 소속이었지만, 늦깎이였기 때문에 미완의 상태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성균관대학교 등의 스카웃 제의가 오지 않아 1997년, 서울시립대학교에 입학했다.[1]한때 1989년 대통령배 3차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박삼용, 서남원, 이성희 등 한국의 1989년 유니버시아드 우승을 이끈 멤버를 배출하기도 한 서울시립대학교지만, 창단 당시나 그때나 스카웃에는 한계가 있어서 타교들이 일찌감치 다 스카웃해버리고 나면 남아 있는 갈 곳 없어진 선수들을 데려다 키우던 2진급 학교였다. 송인석 본인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당시 서울특별시청 배구단의 최종옥 감독은 늦깎이 치고는 기본기가 갖춰져 발전 가능성이 높은데다 잠재성이 높은 그를 눈여겨보고 서울시립대학교 2학년 때부터 그를 레프트 공격수로 전향시켰다.
이것은 뜻밖에도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위 언급하듯 고교 최고의 선수 스카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항상 중요한 순간 거포 부재로 무너졌던 서울시립대학교는 196cm의 아마도 학교 역사상 최장신 날개 공격수인 송인석이 주포 역할을 하면서 어느 정도 결정력을 갖추게 되었고, 세터 이동엽과 대각의 만능 레프트 정승용이 활약해 주면서 실업팀을 상대로도 선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특히 같은 시기 강만수 감독이 이끌던 현대캐피탈은 이동엽의 현란한 토스웍과 송인석, 정승용의 활약 때문에 시립대에게 엄청나게 고전했었다.
2.2.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 시절
현대캐피탈이 강만수 감독 때 서울시청에 고전한 악연 때문인지 강만수 감독은 송인석과 정승용을 높이 평가했고, 그 덕에 송인석은 2001년, 2차 2순위로 현대캐피탈에 입단했다. 강만수 감독은 196cm의 장신에 서울시청의 토탈배구에 맞게 수비력도 어느 정도 갖춘 만능 플레이어로 송인석을 높게 평가했다.강만수 감독 시절에는 주포로서 기회를 얻었지만, 송만덕 감독이 취임하자 모교 한양대 출신을 더 중용한 덕에 주전에서 밀려나게 된다. 송만덕 감독이 사임하고 김호철 감독이 취임했을 때 외국인 선수 시스템이 정착하여 송인석은 공격력을 중시한 김호철 감독의 팀 컬러에 맞게 숀 루니의 대각을 받치는 수비형 레프트 역할을 주문받았다. 불같은 김호철 감독과는 달리 조용하고 내성적인 타입인 송인석은 달라진 팀 컬러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송인석과 오정록으로 수비 안정에 성공하면서 숀 루니를 중심으로 한 현대캐피탈의 V리그 2연속 우승에 조연 역할을 충실히 했다.
2007~2008 시즌 숀 루니가 러시아 리그로 떠난 뒤 제대로 대체자를 구하지 못한 현캐는 용병이 없는 순수 국내 선수들로만 경기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때 송인석은 다시 박철우와 함께 좌우쌍포 역할을 맡게 된다. 처음에는 예상대로 고전했으나 특유의 집중력을 발휘하며 3위까지 올라오는 저력을 발휘했다. 시즌 중 영입한 호드리구까지 복근 부상으로 주저앉으면서 사실상 국내 선수로만 경기를 하게 된 07~08 시즌에 송인석은 정규리그 전 경기에 출전하여 총 462득점(공격성공 403점, 서브에이스 22점, 블로킹 37점)을 올렸고 공격성공률도 47.92%를 기록하였다. 수비에서도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며 리시브성공률 63.88%, 세트평균 1.67개의 디그를 성공하였다.
07~08 시즌 본인 최고의 한해를 보냈지만, 08~09 시즌은 개막 직전 연습 경기에서 어깨부상을 당해 전력에서 이탈했고 어깨 부상 이후 쭉 하락세를 타면서 이전과 같은 만능 공격수의 위력을 잃고 현캐팬들에게 심하게 까였다. 이 시절 현캐는 문성민이 가세했지만 외국인 선수에서 재미를 보진 못했고 오정록이 부상으로 은퇴한 이후 제대로 수비가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팀의 살림꾼 역할을 했던 송인석의 부진이 경기력 하락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던 것.
송인석은 2009년 2월 7일, 천안시의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NH농협 08~09 시즌 V-리그 수원 KEPCO 빅스톰과의 경기에서 역대 프로배구 통산 세 번째로 1, 500점을 돌파하였지만, 이 때의 본인은 더 이상 팀의 중심이 아니었다. 결국 2010~2011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하여 V-리그를 떠났다.
3. V-리그 은퇴 이후, 심판으로 변신
사진 좌측부터 前 현대 - 한전 - 대한항공 센터 신경수, 송인석 본인, 前 KGC인삼공사 센터 김은영, 前 대한항공 라이트 김민욱[2] |
V-리그에서 물러난 이후 실업리그 팀 화성시청에서 잠시 활동하였다. 현역 선수 생활을 완전히 정리한 뒤에는 KOVO 심판으로 전향했다. 목표는 국제심판이라고 한다.
이후 2016년 9월 22일, 청주에서 열린 코보컵 남자부 A조 삼성화재 vs 신협상무와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주심을 맡으며 주심 데뷔전을 치렀다. 이 경기는 코보컵 첫경기 개막전이었다. 이어 23일 여자부 현대건설 vs GS칼텍스의 경기에서는 선심도 맡았다. 2016-17 시즌 개막 후에는 주로 부심을 보다가 11월 5일, 한국전력과 OK저축은행과의 경기에서 처음으로 주심을 맡았다. 이후 꾸준히 심판 생활을 거듭하여 현재는 V-리그의 대표적인 심판으로 자리잡았다.
뒤늦게 유입되어 현캐 시절의 송인석을 잘 모르는 요즘 신규 팬들에게도 리그 심판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송인석이 지금도 유명한 이유는 스타 플레이어 출신 심판보다는 그냥 심판 송인석으로 이름을 날린다는 것이 함정. 부심을 맡을 때는 논란이 드문데, 주심만 맡았다 하면 판정 시비가 걸리는 일이 다반사다.[3] 그래서 송인석은 제발 부심만 하라고 이따금 볼멘소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