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075~1076년에 일어난 북송 왕조와 베트남(대월) 리 왕조 간 일어났던 전쟁이다.2. 배경
베트남은 당이 망하고 오대십국의 혼란기를 틈타 독립을 선언하였는데, 십국 정권 중 하나였던 남한의 간섭을 뿌리치고 응오 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로 인해 중국의 영향이 베트남 사회 곳곳 깊숙이 침투해 있었던 데다가 베트남 토착 사회에도 중국과 연계된 세력이 많았다. 응오 왕조 성립 이래 1009년 리 왕조가 들어서기까지 베트남에는 12사군의 동란시대, 딘 왕조 시대, 전 레 왕조 시대 등의 격변이 있었다. 중국은 정치적 변천이 있을 때마다 베트남에 적극 간여하고자 했다. 오대십국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중국 전체를 통일한 북송 송태종이 베트남을 복속시키고자 하였으나 실패하였다.[1] 그 뒤로는 베트남 원정이 논해지지 않았고 송진종, 송인종 시대에도 이게 지속되었다. 당시 베트남과 북송 경계에서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는데, 이들 소수민족 때문이었다.[2] 광원주에는 금과 은이 많아 북송과 베트남이 이 곳으로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하였고 이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은 북송과 베트남의 압박을 받으며 양국을 공격했다.그러나 진종과 인종은 베트남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광원주의 농존복, 농지고 부자가 1040년 반란을 일으키고 이는 1053년 적청에 의해 평정되었다. 하지만 베트남에 대한 유화적인 정책은 송신종과 왕안석의 신법 시기에 일변했다.[3]3. 전개 과정
3.1. 리 왕조의 선공
북송은 1073년 이래로 광서 지역에 심기, 유이를 파견하여 베트남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는 한편 군사적 대비를 증강시켰고, 이에 위협을 느낀 베트남이 북송군을 선제공격하였다. 리 왕조는 1075년 두 갈래로 나뉘어 광서 지역을 침공하였는데, 한 부대는 해로를 통해 흠주와 염주로 진격하고 다른 부대는 육로를 통해 옹주를 공격했다.리 왕조의 군대는 왕안석의 신법에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한다는 것을 구실로 삼았다.[4] 리 왕조의 군대가 옹주[5]로 진격하나 북송군의 방비는 빈약했고 병사의 수는 2,800명이었다. 12월에 베트남 군대가 옹주를 포위한 이래 북송의 군대가 이에 맞섰으나 1076년 정월 23일 함락당하고 만다. 그 이후 흠주와 염주를 함락시킨 뒤 참혹한 살육, 약탈을 자행하는 등 북송 측에 막심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북송 왕조는 징벌 및 이 기회를 틈타 베트남을 정복하여 도로 중국에 편입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전면적인 베트남 원정을 일으키게 된다.
3.2. 북송군의 반격
1075년 12월 북송 정권은 각지에서 군대를 차출하여 베트남 정벌군을 편성하였고, 곽규와 연달이 출전하였다.[6][7] 그 뒤 점성 및 진랍 지역에 사자를 파견하여 베트남 전선에서 공동 전선을 구축하고자 하였으나,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8] 그렇게 모집한 군대가 1076년 진군하자 리 왕조의 광원주 관찰사 유기가 항복한 뒤 이어 인근 소수민족들이 투항했다. 이어 1077년 사령관 곽규의 군대도 베트남 영역에 진입하였다. 리 왕조는 코끼리 부대를 앞세우고 저항하나 북송군은 화살을 발사하고 코끼리 코를 베어 가며 전투를 벌이자 리 왕조의 부대는 버티지 못하고 물러난다.3.3. 부양 강에서의 최후의 전투
곽규의 군대가 1076년 12월 21일 부양강에 도착하였고 리 왕조는 모든 배들을 강 남쪽에 집결시켜 정박해 두었다. 북송군은 강을 건널 수 없는 상태였는데, 북송 측의 연달이라는 장수가 선봉을 자청하였고 자신이 소규모 부대로 전투를 벌였다가 계속 달아남으로써 리 왕조 측을 유인하겠다고 했고, 최후의 전투 부양강 전투가 벌어졌다.여기서 중국 측 기록과 베트남 측 기록이 다르다.
중국 측 기록은 모두 대승을 거두었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데, 홍진태자가 전사할 정도로 대패를 당했다는 기록과 적이 대패하여 강에 떨어져 죽은 자가 많아 강물이 3일 간 흐르지 않았고, 1000여 명을 참하는 대승을 거둔 데다가 수많은 적의 장수들이 살해되거나 체포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 기록이었다. 반면 베트남 측 기록에서는 리트엉끼엣이 송군이 지친 걸 알고 밤에 강을 건너 습격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고 송의 전사자가 10에 5,6이 되었고 광원주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 뒤 북송군이 부량강 전투 이후 베트남에 대한 공격을 중단했고 곽규는 철군 전 이렇게 한탄했다.[9]
나는 결국 적의 소굴을 뒤엎고 이건덕을 포로로 잡지 못한 채 되돌아간다. 이는 하늘의 뜻이다. 내 일신으로 모든 전쟁의 책임을 지고 10여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싶다.
이후 리왕조가 국경지대의 5개주를 송나라에 할양한 것으로 보아 일단 전투자체는 송나라가 승리했지만 피해가 극심했고 더이상의 전쟁은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4. 전투 이후
베트남 측이 북송에 강화를 요청했다. 베트남은 접경 지역 5개 주[10]를 할양하겠다는 것을 약속한다. 북송은 이 5개의 주를 할양받아 이 5개의 주에 대한 통치 및 내지화를 진행시켜 나가지만 현지의 습속 및 풍토가 익숙하지 않은 데다가 관리가 너무 힘들었다. 게다가 1077년 여름 이래 지속적으로 리 왕조의 침공을 받았는데, 기랑 현과 광랑 현이 점령당하였음에도 북송 정권에서는 5개주를 유지할지 말지에 대해 고민하다가 리 왕조가 5개주를 반환할 것을 요청하자 결국 북송 정권에서 승인하게 되었고, 1079년 이 지역을 반환하게 된다.5. 기타
신종 시대 광서 일대에 군사력이 집중되자 과거 시험에 여러 차례 낙방한 것에 불만을 품은 서백상이 리 왕조의 황제에게 호응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篇》에 따르면, 희녕(熙寧) 연간 교지국의 국력이 강해지자, 송나라 조정에서는 심기(沈起), 유이(劉彝) 등을 파견하여 서남쪽을 관리하며, 군대를 정비하고 군량을 결집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남 지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송나라의 군사 활동은 염주(廉州)[11] 출신의 서생 서백상(徐伯祥)의 주목을 끌게 하였다.
서백상은 10년이 넘도록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으나, 계속 낙방하였다. 서백상은 나이도 들어가면서 과거 시험을 사실상 포기하였다. 서백상은 허송세월과 헛공부에 울분과 원한이 쌓여갔다. 서백상은, 송나라 황제나 관리들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믿고 있었다.
서백상은 북송과 교지국의 관계가 일촉즉발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에게 송나라에 대한 복수의 기회가 왔음을 직감하였다.
송나라의 관가[12]가 나를 중용하지 않겠다면, 이제 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겠다. 너희들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해도,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있을 것이다.
서백상은 붓을 들어 교지국의 왕에게 한 통의 서신을 보냈다. 사마광(司馬光)의 《속수기문/涑水記聞》 등 여러 기록에는 서백상의 서신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다. (교지국) 대왕의 조상들은 민(閩)[13] 지방에서 오셨고, 대왕의 대신들은 대부분 중원(中原)에서 왔습니다. 소인이 외람되게 서신을 드리는 것은, 중원의 황제[14]가 소인을 중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소인은 대왕을 위하여 모든 힘을 다할 것이옵니다. 현재 두 나라의 형세는 매우 긴장되어 있는데, 대왕께서 먼저 손을 쓰시는 것이 유리할 것으로 생각되며, 소인은 송나라 쪽에서 호응하도록 하겠습니다.
몇 글자 되지 않는 편지 한 통에 이건덕은 크게 고무되었다. 당시 리 왕조의 군대는 매우 강하였다. 리 왕조의 이건덕은 대신들을 불러 송나라를 토벌하는 일을 상의하고 출병을 결정하였다. 전쟁 이후 이건덕은 자신의 책임을 덜기 위하여, 서백상을 송나라 측에 넘겨주고자 하였다. 그는 서백상의 편지를 물증으로 송나라 측에 제출한 뒤 곽규는 편지를 보자마자 즉시 송나라 지방관에게 전달하고 서백상을 체포하였다. 그 이후 서백상은 자신의 죄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1] 총사령관 후인보가 전사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보았다.[2] 대표적으로 광원주 일대의 농씨 세력[3] 이 때는 왕안석과 송신종이 대외 정벌을 통해 공업을 이루고 송의 국세를 떨치고자 하였다.[4] 청묘법과 묘역법으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하고자 한다고 선전했다.[5] 현 광서자치구 난닝.[6] 서북의 정병 10만, 광서, 형호, 광동, 하북 지역에서 군대를 동원했는데, 여기서 광서에서는 현지에서 차출했다고 한다.[7] 연달은 곽규의 부장으로 출전하게 되었다.[8] 점성이 이에 응해 베트남을 공격했으나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9] 이 당시 곽규의 부대는 더위와 풍토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대다수였던 데다가 살아남은 자들도 모두 지쳐 있었다고 한다.[10] 소무주, 사량주, 문주, 양주, 광원주.[11] 오늘날 광서 합포[12] 송나라 때 황제에 대한 호칭이다.[13] 복건성 지역[14] 송 신종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