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원나라의 장수.2. 생애
1286년 6월에 중서성 평장성사가 되었고 일본으로 징발해 아비시카가 바닷가 근처의 주민에게 일본 원정을 위해 배를 만들어 징발할 것을 건의하면서 세토칸 등은 4년 동안 100만 섬의 해변에 실으려고 했지만, 그 양에 미치지 못해 84만 석 날랐다.1287년 10월에 요양행상서성평장사를 지내고 쿠빌라이 칸을 따라 나얀, 카다안 투투겐을 공격해 여러 차례 격파했으며, 1290년에 카다안이 고려로 도망가자 세토칸은 12월 12일경 체리테무르, 타추와 함께 1만 3천 명을 거느리고 고려로 갔다.
1291년 2월에 세토칸은 고려의 청주까지 갔으며, 4월 17일에 개경에 도착했고 충렬왕이 연회를 베풀려고 하자 "강남(중국)에서 운송한 군량도 도착하지 않았는데, 만일 적이 나타나 양식이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냐"고 하고, 홍자번에게는 "당신이 상국이므로 전곡에 관한 것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니, 필요한 곳에서 마땅히 지급해달라"고 하자 충렬왕이 "내고에 비축한 물자가 있으니 지급할 수 있을 것"이라고 둘러댔다.
5월에 연기현에서 고려군과 함께 카다안의 군사를 격파했으며, 원성공주를 알현하고 포로 남녀 50구와 양마 5필을 바쳤다. 세토칸의 군대는 군령이 엄숙하고 사졸들이 군령을 잘 따라 지나가는 지역에 함부로 침범하는 것이 없었으며, 적들이 연기에 주둔한 것을 듣고 행군해 불의에 기습해 2번 싸워 적을 격파한 것이 모두 그의 힘이었다고 한다.
충렬왕이 잔치를 베풀고자 했지만 세토칸은 "명령을 받아 일을 마쳤으니 더 이상 머물 수 없다"면서 바로 원나라로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