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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15:48:12

설국열차(영화)/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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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2. 의미와 상징의 해석3. 기타

1. 개요

영화의 여러 부분이 많이 편집되었는데 설명하는 부분들이 대부분이었다고. 여러가지 어른의 사정[1]으로 삭제되었는데, 영화에 설명하는 부분이 사라지다보니 의문점이 너무 많아졌다. 예를 들어 영화만 본 사람은 7인의 반란 때 맨 앞에 있는 이누이트 여자가 남궁민수의 아내이자 요나의 어머니라는 사실절대로 알 수 없고[2] 인터뷰를 들은 사람만 알 수 있는 정보.[3] 또한 요나의 청각에 대한 설명도 삭제돼서 요나한테 초능력이 있는 건 너무 황당하지 않냐는 의견도 보였다. 이런 부분은 아무리 영화를 꼼꼼히 본 사람도 알 수 없는 사항이기에 무식해서 이해를 못한다는 말이 무색해져 버렸다. 그래서인지 이 문서에서도 정확한 이야기 보다는 추측이 많다.

그런 일들로 인해 추측이 많은 만큼 영화의 해석 역시 다양하다. 의미의 부여와 상징의 해석에 따라 각자가 받아들인 영화의 내용이 각기 다를 수 있다. 특히 설국열차에 대한 해석은 SNS의 짧은 글부터 학위 논문, 대학교수 수준에서의 학술적인 연구까지 수도 없이 다양하다.[4]

봉준호 감독의 전작 괴물에서는 송강호와 아이가 살아남고 고아성이 죽었는데, 설국열차에서는 고아성과 아이가 살아남고 송강호가 죽었다. 언젠간 송강호와 고아성이 살아남고 아이가 죽겠지 마지막에 등장하는 것이 굳이 북극곰인 이유는 지구온난화로 피해를 보는 생명체의 대표격으로 인식된 것이 북극곰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어서 북극곰은 최상위 포식자이기 때문에 북극곰이 있다는 말은 그 하위 생태계의 먹이 사슬도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피폐하게 보면 얼어죽은 인간들 시체 파먹으면서 살아남은 녀석일 수도 있지만 넘어가자 감독의 관점에서 이 영화는 해피엔딩이라고. 오프닝 테마의 제목은 This is the End, 엔딩 테마의 제목은 This is the Beginning이다. 인류 멸망 후의 새로운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만든 듯 하다.

열차는 영화 개봉 전에도 나왔듯이 하나의 독자적인 체제를, 꼬리칸에서 머리칸까지는 계급 사회를 의미한다. 커티스의 혁명은 여태껏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난 지배 권력에 대한 반항적 혁명과 변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단순히 '지배자'를 없애려는 시도는 실패하거나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월포드가 커티스에게 자리를 넘겨주려는 것처럼 새로운 독재자의 출현을 불러올 뿐이다. 이 악순환을 끝내기 위해선 남궁민수처럼 아예 기존의 세계에서 '탈출'하는 수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독재 정부는 이것을 알고 있고 끊임없는 세뇌(교육 칸에서 틀어준 월포드 영상)와 위협(7인의 반란의 결말)을 통해 탈출하려는 희망을 빼앗아 버린다. 즉, 상식이 되어 버린 기존의 틀을 깨어야만이 위의 악순환을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같은 탈출은 불가능에 가깝다. 영화 속에서도 혁명의 핵심적인 인물인 커티스 역시 옆문을 따자는 남궁민수에게 '얼어 죽으려고 그러냐'라고 응수함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 '밖에 나가면 죽는다'라는 논리를 당연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렇게 보면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혁명, 반란을 진행하면서도 이에 대해 각기 다른 가치관을 드러주는 캐릭터가 된다. 전자가 체제 내에서의 자리 바꿈만을 지향한다면, 후자는 체제 자체의 해체를 꾀하는 것.

2. 의미와 상징의 해석

관객에 따라서는 결말을 비극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아무리 생명체가 살 수 있을 정도로 온도가 올라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아무 것도 없는 설원에서 북극곰과 같은 맹수들 틈바구니를 헤치며 어린 아이 두 명이 스스로 생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 이런 해석을 따르자면 이 영화는 '기존의 틀을 깨어봐야 남는 건 죽음밖에 없으니 굳이 애쓰지 말고 현실에 맞춰서 살아가라'라는 굉장히 보수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가 된다. 물론 이를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저런 메시지를 던지고 싶었다면 왜 아이 두 명을 살렸으며, 왜 혁명이 소재로 쓰였는지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애초에 주제란 끊임없이 작품에 대해 고민해 보아야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사실과 별개로 아시아인 아이와 흑인 아이 두 명이 북극곰을 바라보며 끝을 맺음으로써 전해지는 메세지도 생각해봐야한다.

감독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도록 편집한 부분도 있으니 이러한 해석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다. 이런 면은 감독이 이를 유도하였다고 보는 것이 좋다. 예술적 성격을 담으려는 감독의 전기를 고려하여 보면 더더욱 명확히 보이며, 오늘날의 문예사조에서는 대부분 해석의 여지를 다양하게 열어두는 작품을 추구한다. 다만 그래서 그런지 영화가 전체적으로 너무 많은 의미를 지니게 되어 논란이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보는 사람이 현실주의자라면 '배드엔딩'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고 이상주의자라면 '해피엔딩'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어린아이 두 명이 러시아 동토지역에서 살아남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5] 기차 전량이 불타거나 추락했으므로 생존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한 상태. 이런식으로 따지면 인류는 멸망했다는 결말이 된다.[6] 단, 이상주의자라면 희망을 보았을 수도 있다. 살아남았다는 것에 의의를 둔다면 말이다. 영화의 기법상으로는 감독이 죽이지 않았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라는 기대를 심어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개체수가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면 몇몇이 살아 있더라도 멸종한 것으로 본다.[7]

실용적으로 본다면 설국열차에서 벗어나려는 것이 당연했다. 엔진은 영원하다고 윌포드는 거짓말을 했지만 부품들은 점점 사라져가고 있었다. 작중 거듭 언급된 것처럼 폐쇄된 생태계는 끊임없이 인위적 조작을 필요로 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또한 기차가 필요했던 이유인 '빙하기'도 점점 끝나갔다. 결국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언젠가 열차에서 빠져나왔어야 했던 것이다. 애초에 생태계의 균형을 위해 1월과 7월에만 초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부터[8] 설국열차에서는 인위적인 생태계의 조작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마지막에 일정기간마다 꾸준히 혁명을 유도해서 생태균형을 맞춘다는 윌포드의 주장과 동일한 선상에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구조주의적으로 본다면, 영화의 중심은 차량의 선두에 있는 운행부에 있다. 차량의 끝에 있는 인물들은 중심적인 권한, 즉 열차의 운행권에 다가서려고 하는 인물들이며 지배자가 되기를 희망한다. 또 기존의 지배구조로부터 지배권력을 탈환하고자한다. 개중에 일부의 정신이상자(남궁민수와 그 딸 요나)등이 난입하여 난동을 피우고 결국 다수가 피해를 보는 결말을 맞이하는 영화이다.

시각적 모티프에 근거한 영화 기법을 중심으로 본다면 직선을 통해 의미를 파악할 수도 있다. 열차라는 직선적 기법은 앞 칸의 지배적 시선과 뒷칸의 시선을 대비시켜준다. 또 직진이라는 직선 운동을 하면서도 열차는 지구 표면을 순환하고 있다. 이는 작중 뒷칸의 인물들이 끊임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지만, 결국 생태계의 순환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는 윌포드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한편 레딧의 한 사용자는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했는데, 사람이 살 수 없는 차가운 세상을 1년에 한바퀴씩 도는 열차는 바로 1년에 한번씩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 작은 공간 안에서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계급을 정하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일들을 저질러가지만, 결국 인류가 살아남는 방법은 그곳을 탈출하는 것이라는 내용은 인류의 역사, 그리고 현실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와 관련하여 실제로 영화에서 나아가는 순서는 지구의 발전단계와 닮아있다는 학설도 있다. 식량(곤충)칸을 거치고 식수 보급 구간을 거치면 식물원과 수족관, 육식용 식재료를 담당하는 정육구간(동물), 윌포드의 신화를 교육하는 유아기간, 제일 앞 칸 근처의 클럽 등 지구의 역사와도 일정 부분 일치한다.

포스트구조주의[9]의 관점을 상당히 잘 대변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면 중심(지배적인 권력, 윌포드가 있는 열차의 앞 칸)과 주변(피지배적인 인물들)이 대립하고 중심에 들어가기위한 권력 투쟁과 이러한 권력 투쟁의 순환구조가 영화의 주된 내용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궁민수는 이러한 것들을 관찰하고 이에 동조하기보다는 이러한 구조로부터 벗어나려는 인물으로 나타난다.[10] 단순한 정신이상자일 수도 있겠지만 그를 정신이상자로 규정한 것부터가 열차내부의 질서였고 결국 남궁민수의 의도대로 되는 결말을 고려한다면 포스트 구조주의적 해석에 더욱 무게가 실린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생되어 작품을 산업자본주의에 대한 회고와 공산주의 이념이 포함된 것으로 보거나 아나키즘적 영화로 보는 관점도 있다.

산업혁명 이후에 확연하게 분리된 자본가 계급(지배자)과 노동자(피지배자) 사이의 갈등이 진행되고 있음을 영화가 전체적으로 보여준다. 윌포드의 이름을 보면 '포드', 즉 거대 자본기업에 대한 암시가 내포되어 있고, 열차 뒷칸의 사람들을 그 자본가에게 지배받는 사람들이다. 메이슨의 경우에는 원래 노동자계급이었다가 기득권이 된 사람이기에[11] 오히려 표면적으로는 윌포드보다 피지배 계급에게 더욱 잔인한 모습을 보인다. 남궁민수는 설정상 '한국인'으로, 어찌보면 영화 내에서 아무하고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는 19세기 경제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해석된다. 마르크스도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지만 주변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또한 첫 번째 칸에서 부족한 부품들을 아이들의 노동으로 채워나간다는 설정도 현대의 아동노동착취와 관련하여 시장경제를 비판한다고 생각될 수 있다.

정치신학적인 관점에서는 윌포드를 비롯한 앞 칸의 정치적 지배자들이 신을 대행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스스로의 신화를 유아기의 아이들에게 교육하며, 신을 자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열차 내에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한 인물이라는 윌포드에 대한 설명을 강조하는 것은 창조주에 대한 신화적인 설명과 일치한다. 이와 같은 정치적 의미의 을 창출하려는 움직임은 정치신학에서 비판하는 실제 사회의 모습과 닮은 구석이 많다. 작중 등장하는 부활절 달걀 배급은 '종교를 가장한 탄압'으로도 해석된다. 이를 확실시하는 것이 커티스가 윌포드에 의해 엔진실에 들어가서 회유당하고 난 뒤, 불을 요구하는 요나를 제지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구도에서 엔진실의 조명이 비추는 커티스가 마치 기독교의 성인처럼 후광을 가진것으로 묘사된다. 요나가 커티스의 이 모습에 ‘아 윌포드에게 설득당했구나’라는 추론을 굉장히 빠르게 내린다.

한가지 흔히 놓치는 중요한 부분이 있는대, 바로 "반권력 또한 권력이다."란 주제다. 길리엄과 윌포드가 사실 한 통속으로, 윌포드라는 권력과 길리엄이라는 반권력이 사실 둘이 한몸이었다. 다르게 말하면, 펜은 칼보다 강하지만, 문제는 누가 그 펜을 쥐고 있냐는 것.

3. 기타

영화 내에서 밝혀지진 않지만 은근히 성소수자가 많이 나오는 것일 수도 있는 작품. 일례로 길리엄과 그레이가 동성애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감독의 언급이 있었으며 경호대장 프랑코도 게이일 가능성이 있다.

열차 창 밖으로 보여진 얼어버린 7인 중, 최선두의 '앞 칸 청소부였는데 이누이트인' 여자는 나중에 밝혀진 설정으로 남궁민수의 아내이자 요나의 어머니일 가능성이 크다. 작중에서는 대거 생략된 각종 설정 중 하나이기 때문에 영화만 봐서는 전혀 이것을 추측하거나 알아낼 방법이 없으므로 크게 상관은 없지만. 눈에 대해 이것저것 말하곤 했다는 남궁민수의 설명은 지금껏 바깥의 눈을 관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열차를 탈출할 결심을 하게 된 계기를 설명해준다.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는 작위적일 정도로 전형적인 할리우드 스테레오타입인 경우가 많다. 젊은 백인남성 주인공 커티스, 모성애가 강한 흑인 어머니인 타냐, 기묘한 아시아인 소녀 요나, 강하고 과묵한 악의 간부 프랑코 등. 결말을 생각하면 이런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웅담을 비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감독 발언에 의하면 터널을 통과하는 기차는 남성기여성기를 생각하고 만들었다는 듯(...). 다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와 관련해서 2013년에 "설사 봉준호 감독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고 해도 그것은 '그런 식의 해석에 대한 한발 앞선 희화화'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라고 분석한 바 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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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관객들이 더 많은 생각을 갖게 하기 위해 삭제, 예산문제로 삭제, 러닝타임 축소를 위해 삭제 등[2] 해당 부분의 설명이 짤렸다.[3] 남궁민수가 눈을 자세히 관찰한 이유가 바로 이누이트 아내에게 눈 관찰 능력을 배웠기 때문. 영화 내적으로는 이누이트 이야기를 남궁민수가 요나에게 해주고 눈 관찰이나 밖으로 나가려는 태도 등을 통해 둘이 비교적 가까운 사이였다고 간접적으로 추측 할 수는 있다.[4] 이는 예술영화와 상업영화를 구분하지 않고 문화산업 전체에 해당할 수 있는 말이다. 게임도 포함된다. 여러 해석을 참고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하여 보는 시도는 영화를 비롯한 여러 문화를 향유하는 좋은 방법이다.[5] 굳이 따지자면 의외로 설국열차(영화) 제작진은 아니지만 그 모티브가 된 설국열차 원작자 말에 의하면 북극곰을 마주하고도 살아남았다.는게 정설이긴 하다.[6] 물론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고작 나중에 밝혀진 커티스와 남궁민수는 죽었다. 이거 하나뿐이기에 다른 칸에서는 극적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애초 결말부터가 사실상 열린 결말이기에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불명이다. 극도의 혹한이 17년이나 지속되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지만 열차에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 중에도 소수의 생존자들이 있을 수도 있다.[7] 이 때의 개체수 비율을 수십억 대비 설국열차 내부 인원수로 잡는다면 설국열차의 정상 운행을 고려하여도 작중 인류는 멸망한 수준이라고 볼 수도 있다. 사실 인류라는 종 그 자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최소 남자건 여자건 10여명 이상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기에 만일 설국열차에서 20~40명 이상의 사람이 살아남지 못했다면 인류는 완전히 멸망한다. 그것도 최소 숫자지 천단위에서 만단위 정도는 있어야 문제없이 존속한다. 안 그러면 대대로 근친혼 하다 자멸한다.[8] 이게 기차 내 2인자인 총리에게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에서 심각함이 더 드러난다. 즉 꼬리칸 사람들의 빈곤함은 물자를 머리칸에서 독차지하는 것도 있지만 머리칸조차 충분히 누리지 못할 정도로 물자가 부족한 것 역시도 이유 중 하나다. 그러니까 머리칸 사람들이 정말로 한달에 한번씩 모든 사람까지 초밥을 먹여주고 싶어도 없어서 못하는 상황이다. 결국 꼬리칸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설령 혁명이 커티스가 본래 생각했던대로 성공했어도 머리칸 사람들처럼 잘먹고 잘살기는 불가능하고 여전히 제한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관리하며 먹고 살 수 밖에 없다. 아니면 남은 자원들을 다 끌어 모아서 죽을 각오를 하고 기온이 조금이라도 올라갔기를 바라며 열차를 나오던가.[9] 중심과 주변을 구분하려는 구조주의에서 벗어나고자하는 문예사조, 주로 주변적인 것들(성 소수자, 아동, 여성, 장애인 등)에 대한 일방적 억압을 비판하려는 경향이 강하다.[10] 앞이나 뒤가 아닌 으로 빠져나가려하니...[11] 작중 그녀가 취하는 손동작 등에서 볼 수 있다.[12] 덧붙여 "이런 해석은 틀렸다기보다는 무익한 것이다. 마르크스에 대한 오용이 글쓴이 자신을 답답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데 그친다면, 프로이트에 대한 오용은 글쓴이만이 아니라 프로이트 조차 바보처럼 보이게 만든다는 점에서 그 해악이 더 크다."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