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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02:28:59

삼성 라이온즈/1982년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bordercolor=#074ca1><tablebgcolor=#074ca1> 파일:삼성 라이온즈 심볼(흰색).svg삼성 라이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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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시즌 페넌트레이스 성적
전기리그
순위 승률
2 26 0 14 0.650
후기리그
순위 승률
1 28 0 12 0.700

1. 팀 창단2. 정규 시즌
2.1. 사건 및 사고
3. 포스트시즌4. 선수별 개인 성적
4.1. 투수4.2. 타자
5. 수상 및 기록6. 둘러보기 틀

1. 팀 창단

1982년 2월 3일 정오 서울신라호텔에서 창단식이 열렸다. 삼성그룹의 창업 발상지인 대구경북 지역을 연고로 하고 삼성 관계자의 말을 빌면 신사도를 아는 중후함을 팀 이미지로 부각시키고 늠름한 사자의 기상으로 프로야구의 선구적인 팀이 되기위해 백수의 제왕인 사자를 팀의 상징으로 내세웠다. 대구를 연고로 창단됐기에 감독에는 대구지역 야구계의 아버지이자 경북고와 대구상고에서 무수한 우승을 일궈낸 서영무 중앙대 감독을 선임했고, 대구에서 라이벌로 통하는 경북고 출신과 대구상고 출신의 알력 싸움을 막기 위해 경북고 출신이며 당시 한일은행 감독이었던 임신근과 대구상고 출신이며 당시 한일은행 코치였던 우용득을 코치로 선임했다. 둘 다 서영무의 제자이기도 했다.

삼성은 6개 구단 중 가장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영입했고, 다른 구단보다 먼저 선수 선발을 끝냈다. 프로 출범을 앞두고 각 구단에서는 아마야구·실업선수들에게 등급을 매겨 그를 바탕으로 선수들의 연봉과 계약금을 정해 선수들과 입단 협상을 벌였는데, 삼성만 일정 등급 이상만의 선수와 교섭했기에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선수들은 외면당했다.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삼성의 경우엔 연고지에 워낙 뛰어난 선수가 많았다. 당시 대구·경북 출신 선수들은 1970년대 후반까지 고교야구를 이끌었던 주역들이었고 이들 중 다수가 대학야구나 실업야구에서도 그 명성을 유지했다. 그래서 당시 팀당 1~2명 정도만 S급 대우를 해줄 수 있었는데, 삼성만 S급 대우를 포기하고 배대웅, 이만수, 이선희, 정현발, 천보성, 황규봉 등 6명을 공평하게 A급 대우로 해주는 걸로 했다. 배대웅은 실업야구 시절 국가대표 2루수로 활약했고, 이선희는 실업야구 시절 이름난 일본 킬러였고, 정현발은 고교 시절부터 팀의 4번 타자를 맡아온 강타자였고, 황규봉은 고교 시절부터 줄곧 팀의 에이스를 맡아온 투수였고, 천보성은 은퇴한 상태였지만 당시에는 보통 20대 후반, 길어야 30세를 전후해 은퇴하는 게 당연하던 시절이었기에 은퇴한 것이지 선수로 뛰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이만수는 앞의 5명과 달리 대학선수였지만 그 역시 고교 시절부터 강타자로 이름을 날렸다. 이렇듯 삼성 소속 선수들이 다들 이름 있는 선수들이다 보니, 이후 1980년대 중후반까지는 신인 지명에서 주전을 차지 못할 게 뻔하니 삼성에 지명되고도 프로행을 마다하고 실업야구를 선택하는 선수도 있었다. 성준, 류중일과 함께 경북고 야구부 마지막 전성기의 일원이었던 권택재가 대표적인 예.

1981년 12월 말 당시 선수 선발을 끝냈을 때 있었던 26명 중 김용만[1], 김정태[2], 이삼열[3], 이수빈[4], 조호[5] 등 5명이 빠지고 1982년 2월에 있었던 2차 지명으로 장태수가 추가로 입단하면서[6] 최종적으로 다음 22명으로 창단됐다. 참고로 당시 포지션과 프로에서 포지션이 다소 차이가 있었다.

실업야구 출신 19명과 대졸 선수 3명으로, 대다수가 원 소속 팀의 주전은 기본이었고 국가대표 경험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 만약을 대비해 우용득, 임신근 두 코치를 선수로 등록시켰다.

이 선수들만으로도 국가대표팀에 나서도 될 만큼 막강한 전력을 구축했지만 동기 천보성과 달리 은퇴를 번복하지 않은 남우식, 일본프로야구 진출을 위해 그에 앞서 군 복무 중이었던 김시진,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실업팀에 잔류한 장효조 등 더 막강한 전력을 구축할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못한 아쉬움 또한 있었다.

2. 정규 시즌

3월 27일에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MBC 청룡과의 개막전 때 이만수가 프로야구 첫 안타와 홈런을 기록하며 앞서 갔으나 MBC에서 따라오며 7대7 동점이 되면서 연장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삼성에서는 선발 황규봉에 이어 이선희를 투입했으나, 이선희는 10회말 2사 만루 상황에서 이종도에게 끝내기 만루홈런을 맞았다. 개막전 패배를 시작으로 삼성은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시즌 초반에는 꽤나 고생했다.

6명의 투수 중 권영호, 이선희, 황규봉 세 명이 주로 등판하고 성낙수가 이 3명을 뒷받쳐주는 역할을 했다. 실업야구 시절 팀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한 송진호는 프로야구 개막전에도 좌익수로 선발 출장하는 등, 프로 원년에는 타자로 더 많이 나왔다. 박영진은 고교와 대학 시절 연이은 혹사로 이미 어깨가 망가진 상태여서 은퇴할 때까지 제대로 등판을 못했다.

유격수에는 4명이나 있었는데 타격만큼은 김재박 못지 않았던 함학수가 1루수로, 발 빠른 장태수가 중견수로 이동했다. 그리고 남은 실업야구 출신 서정환과 대졸 새내기 오대석이 주전 유격수를 두고 경쟁했는데, 애초에는 서정환이 주전으로 기용됐으나 타격에서 부진해 결국 오대석이 주전을 차지했다. 또한 오대석은 6월 12일 삼미 슈퍼스타즈전에서 프로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다.

전기리그 26승 14패로 2위, 후기리그 28승 12패로 1위를 차지했다. 총 54승 26패로 현재 같은 승률제 방식이라면 2위에 해당하는 성적이었다.

2.1. 사건 및 사고

구단 운영과 선수 관리 방법 등을 위해 4월 20일부터 23일까지 불과 4일간이었지만 나가시마 시게오요미우리 자이언츠 감독을 초빙해 해외구단과 처음으로 교류했다. 나가시마는 4월 22일 대구 MBC 청룡전에서도 시구를 했는데, 삼성이 대승을 거뒀다.

7월 2일에 지방 구장 중 최초로 야간 조명시설 공사가 끝나 7월 10일에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개장 후 처음으로 야간경기가 열렸다.

8월 26일에는 MBC 청룡과의 대구 경기에서 프로야구 첫 몰수경기가 있었다. 삼성이 5대2로 앞서 있던 2회말 1사 1,2루 상황에서 삼성 타자 정현발이 유격수 땅볼을 쳤다. 1루 주자 배대웅은 병살을 막기 위해서 2루수 김인식 쪽으로 거칠게 슬라이딩을 하면서 김인식과 충돌했다. 김인식은 화를 내며 배대웅의 얼굴을 때렸고, 곧바로 양팀 선수들이 몰려나왔다[11]. 심판들은 선수들을 떼놓은 후 김인식을 퇴장시켰다. 이에 백인천 MBC 감독은 원인 제공은 배대웅이 했는데 김인식만 퇴장시킨 것은 부당하다며 선수들을 철수시켰다. 주심의 경기 속행 요구에도 백인천은 계속 무시했고, 결국 몰수게임이 선언됐다. 삼성은 이 몰수승으로 3연승을 기록했고, 이를 발판으로 이후 9월 2일 대전 OB전까지 7연승을 하면서 후기리그 우승을 할 수 있었다.

3. 포스트시즌

포스트시즌
한국시리즈 성적
1 1 4
한국시리즈 패배

전기리그 우승팀인 OB 베어스코리안시리즈[12]가 열렸다. 자세한 경기 결과는 항목 참조.

1승 1무 3패로 삼성이 이미 구석에 몰린 6차전 때 선발로 등판한 이선희는 이미 연투로 지친 상황에서도 9회까지 역투했지만 9회초 1사 만루에서 김유동에게 만루홈런을 맞으며 무너졌다. 1승 1무 4패로 준우승에 머물렀다.

원래 이건희 삼성 회장은 삼성이 우승하면 이를 빌미로 전용 훈련장 건립 및 야구단에 대한 막대한 투자를 할 계획이었으나 한국시리즈 패배로 이러한 계획은 한동안 뒤로 미뤄졌고 당초 계획보다 야구단에 대한 기대 및 투자가 줄어들게 됐다. 하지만 최강팀으로 손꼽히던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좌절하면서 최강으로 꼽히던 팀이 반드시 우승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과 함께 프로야구가 인기를 끌게 됐다는 의견도 있다.

4. 선수별 개인 성적

4.1. 투수

이름 경기수 선발등판 이닝 세이브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 황규봉 47
(1위)
16 222⅓
(3위)
15
(공동 2위)
11 11
(1위)
2.47
(4위)
188 40 99
(4위)
14 성낙수 28 19 125 8
(10위)
3 2
(6위)
2.81
(5위)
119 29 56
11 박영진 6 1 8⅓ 0 0 1 8.64 16 5 3
17 송진호 1 0 3 0 0 0 6.00 3 2 2
이름 경기수 선발등판 이닝 세이브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27 권영호 32 21 178⅔
(6위)
15
(공동 2위)
5 2
(6위)
2.37
(3위)
139 59 72
(10위)
26 이선희 38
(6위)
22 167
(9위)
15
(공동 2위)
7 1 2.91
(7위)
152 82 73
(9위)

참고로 선발등판 경기 총합이 79경기, 승리 총합이 53경기로 한 경기가 빠져 있는데,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MBC와의 몰수게임 때문. 몰수게임에서 나온 기록은 공식 기록으로 치지 않는다.

4.2. 타자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22 이만수 78 270 .289 78 16
(6위)
1 13
(4위)
51
(공동 5위)
46 6
2 손상득 53 143 .238 34 3 2 2 16 21 8
23 박정환 51 120 .300 36 6 1 5 24 17 2
28 손상대 12 19 .211 4 0 0 0 2 1 1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2 함학수 73 261 .261 68 14 2 7 51
(공동 5위)
46 8
16 오대석 72 258 .283 73 15
(10위)
1 4 30 48
(7위)
14
3 배대웅 71 235 .230 54 9 0 5 27 30 7
29 김한근 64 193 .264 51 13 1 5 28 33 4
6 서정환 47 124 .202 25 1 1 2 19 18 9
7 천보성 36 90 .267 24 6 0 0 10 13 2
이름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 장태수 64 214 .336
(3위)
72 15
(10위)
3
(6위)
3 27 42 34
(4위)
10 허규옥 66 206 .291 60 11 2 3 22 41 27
(6위)
20 정현발 54 146 .288 42 9 1 5 26 31 4
8 정구왕 46 145 .283 41 1 2 0 17 14 16
17 송진호 35 80 .138 11 2 0 1 7 11 3
44 박찬 29 76 .289 22 4 0 1 8 12 2
18 김휘욱 34 64 .156 10 1 1 1 9 5 0
38 임신근[13] 2 3 .000 0 0 0 0 0 0 0

5. 수상 및 기록

6.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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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별 198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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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롯데 자이언츠 엠블럼(1975~1992).png 파일:삼미 슈퍼스타즈 엠블럼.png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1982~1988).svg
롯데 자이언츠
1982년
삼미 슈퍼스타즈
1982년
삼성 라이온즈
1982년
파일:해태 타이거즈 엠블럼(1982~1995).svg 파일:MBC 청룡 엠블럼(1982~1985).png 파일:OB 베어스 엠블럼.svg
해태 타이거즈
1982년
MBC 청룡
1982년
OB 베어스
1982년
}}}}}}}}}}}} ||





[1] 경북고, 건국대 출신 포수로 원래 롯데 자이언트 소속이었다. 해태 타이거즈의 창단 멤버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하게는 1982년 2월에 있었던 2차 지명으로 해태 타이거즈에 입단했다.[2] 대구상고, 건국대 출신 1루수로 원래 농협 소속이었다. 이후 1984년 신인지명에서 삼성이 1차 지명을 했지만 상무에 입대하면서 입단하지 않았고, 1986년 빙그레 이글스에 2차 지명을 받고 입단했으나 1987년에 은퇴했다.[3] 대구상고 출신 내야수로 원래 농협 소속이었다. 농협에 남았다가 1984년 OB 베어스에 코치 겸 선수로 프로야구계에 들어왔다.[4] 대구상고, 성균관대 출신 내야수로 원래 포철 소속이었다. 포철에 남아 1989년에 은퇴했다.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과는 동명이인이다.[5] 대구상고, 성균관대 출신 내야수로 원래 한국화장품 소속이었다. MBC 청룡의 창단 멤버로 알려져 있지만, 엄밀하게는 1982년 2월에 있었던 2차 지명으로 MBC 청룡에 입단했다.[6] 장태수를 비롯해 삼성은 대구상고, 영남대 출신인 제일은행의 투수 조규식과 부산상고 출신인 한일은행의 외야수 홍경태까지 3명을 지명했지만 장태수만 입단했다.[7] 원래 농협에서 박영진을 스카우트했었지만 박영진은 프로행을 선택했다.[8] 애초 선수 선발을 했을 때는 내야수로 분류됐다.[9] 1980년 은퇴해 롯데호텔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10] 1980년 은퇴했었다.[11] 사실 이 사건에는 소소한 반전이 있는데, 김인식은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지기 전에 바로 사과했고 배대웅도 사과를 받아줬다. 또한 김은식 작가의 인터뷰에서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본인들은 절친한 친구관계였고 일종의 쇼맨십 차원에서 서로간에 장난으로 한 행동인데 생각보다 일이 커지는 바람에 양 당사자 모두 당황했다고 한다.[12] 실업야구 시절부터 코리안시리즈라고 불렀던 전통이 이어진 건데, 1984년 초에 스포츠 대회 명칭을 우리말로 바꾸라는 체육부의 지침으로 그때부터 한국시리즈로 표기됐다. 따지고 보면 시리즈도 외국어인데[13] 투수코치 겸 선수로 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