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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2 20:29:51

살라미스의 에피파니우스

살라미스 주교
에피파니우스
Epiphanius | Ἐπιφάνιος
파일:agepifcy2.jpg
<colbgcolor=#CD853F,#2f3639><colcolor=#ffffff,#ffffff> 이명 팔레스타인의 예언자 (Oracle of Palestine)
키프로스의 주교 (Bishop of Cyprus)
출생 310년-320년
로마 제국 시리아 팔레스티나
사망 403년
해상[1]
직업 주교, 수도자
종교 기독교
성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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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D853F,#CD853F><colcolor=#ffffff,#ffffff> 성인명 에피파니오(가톨릭)
에피파니오스(정교회)
상징물 오모포리온, 두루마리
축일 5월 12일(가톨릭, 정교회)
5월 25일(콥트 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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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오리게네스주의 논쟁과 말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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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주교이자 수도자.

가톨릭,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콥트 정교회에서 성인이자 사막교부로 공경받고 있으며, 정통 신앙의 강력한 옹호자로 명성을 떨쳤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80가지 이단을 요약하여 정리한 『파나리온』이 있다.

성상파괴주의자들이 에피파니우스로부터 인용한 것 중 실제로 그가 쓴 것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그가 교회에서 성상을 쓰는 것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던 것은 분명하다.

2. 생애

에피파니우스는 로마니오테 유대계[2] 그리스도교 가문에서 태어났거나,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어느 쪽이든 간에 로마 제국 치하의 시리아 팔레스티나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고, 이집트에서 압바 힐라리온의 제자로 교육받았으며, 그곳에서 발렌티누스파 영지주의자들과 접촉한 적이 있다. 그리고는 아직 청년이었던 333년경 팔레스티나로 돌아와 아드[3]라는 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이후 사제품을 받았고, 자신이 세운 수도원의 원장으로 30년 동안 살면서 공부했으며 많은 기술과 지식을 얻었다. 히브리어, 시리아어, 이집트어, 그리스어, 라틴어를 포함한 여러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능력을 얻어 히에로니무스는 그를 펜타글로소스[4]라 불렀고, 팔레스타인 수도주의의 창시자로 여겼다.

학식에 대한 명성 덕분에 그는 키프로스의 살라미스 주교로 서품되었고, 죽는 날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또한 키프로스 교회의 대주교이기도 했다. 거의 40년 동안 주교로 봉사했으며, 다양한 이단에 맞서 싸우기 위해 널리 여행을 다녔다. 376년에는 안티오키아에서 열린 시노드에 참석하여 아폴리나리우스주의 이단에 맞서 삼위일체론에 대한 논쟁을 벌였다. 이때 동방 교회의 지지를 받은 안티오키아의 멜레티우스 주교보다 로마의 지지를 받은 파울리누스 주교의 입장을 옹호했다. 382년에는 로마 공의회에 참석하여 다시 한 번 파울리누스의 대의를 지지했다.

2.1. 오리게네스주의 논쟁과 말년

394년 또는 395년 에피파니우스가 팔레스티나를 방문했을 때 예루살렘에서 교회축성 축일 설교를 하던 중 갑자기 오리게네스의 추종자들을 격렬히 공격하고 예루살렘의 주교 요한 2세에게 오리게네스의 저서를 비난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팔레스티나를 여행할 때 기도하러 성당에 들어갔다가 그리스도성인의 이미지가 그려진 커튼을 보고 찢어버린 적이 있다고도 언급했다. 그는 요한 2세에게 그러한 성상은 “우리 종교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은 루피누스와 요한 2세가 히에로니무스와 에피파니우스를 상대로 벌인 분쟁에서 갈등의 씨앗이 된 사건이다. 게다가 에피파니우스는 베들레헴에 있는 히에로니무스의 수도원에 사제를 안수하여 요한 2세의 관할권을 침범함으로써 이 갈등에 더욱 불을 지폈다. 이 분쟁은 390년대에도 계속되었고, 특히 루피누스와 히에로니무스가 서로를 공격하는 문학 작품에서 두드러졌다.

399년, 처음에 요한 2세를 지지했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테오필루스가 견해를 바꾸고 이집트의 오리게네스파 수도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하면서 논쟁은 다른 차원을 띠게 됐다. 이 박해의 결과로 소위 '키 큰 형제들'[5]로 불리는 네 명의 수도자들이 팔레스티나로 피신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건너가 지원을 요청하고 논쟁을 확산시켰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그 수도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루스 주교는 이 사건을 정적 크리소스토무스를 무너뜨릴 기회로 보고, 402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의회를 소집해 오리게네스파에 반대하는 자신의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초대했다. 바로 그들 중 한 명이 80세가 다 된 에피파니우스였고,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나 테오필루스에 의해 박해받는 수도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황제에게 호소하던 크리소스토무스에 대항하여 자신이 테오필루스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피파니우스는 살라미스로 돌아갔지만, 403년 살라미스로 향하던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1] 海上[2]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 공동체[3] 예루살렘가자 지구 사이[4] Pentaglossos, 5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5] Tall Brot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