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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11 20:52:53

빌헬름 1세(하바이에른 공작)

파일:빌헬름 1세(하바이에른 공작).jpg
이름 빌헬름 1세 폰 바이에른
Wilhelm I. von Bayern
출생 1330년 5월 12일
신성 로마 제국 프랑크푸르트
사망 1389년 4월 (향년 58세)
에노 백국 케누아
아버지 루트비히 4세
어머니 에노의 마르그리트 2세
형제 마르가레테, 안나, 엘리자베트, 루트비히 6세, 알브레히트 1세, 오토 5세, 베아트릭스, 아그네스, 루트비히
아내 랭커스터의 모드, 카타리나 게리트 부센드르(정부)
자녀 모드, 엘리자베트 폰 바이에른(사생아)
직위 하바이에른 공작, 에노, 질란트, 홀란트 백작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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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바이에른 공작, 에노, 질란트, 홀란트 백작. 하바이에른 공작으로서는 '빌헬름 1세'이고, 에노 백작으로서 기욤 3세, 질란트, 홀란트 백작으로서는 기욤 5세이다.

2. 생애

1330년 5월 12일 신성 로마 제국프랑크푸르트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루트비히 4세는 바이에른 공작이었고, 1314년부터 로마 왕, 1328년부터 신성 로마 황제를 칭했다. 어머니인 에노의 마르그리트 2세는 에노 백작 기욤 1세 드 에노의 딸이었다. 형제로 마르가레테[1], 안나[2], 루트비히 6세[3], 엘리자베트[4], 아그네스[5], 알브레히트 1세, 오토 5세[6], 베아트릭스[7], 루트비히[8]가 있었다.

1345년 9월 26일, 에노 백작 기욤 2세 드 에노가 프리슬란트 원정을 떠났다가 워렌스 전투에서 프리지아인들에게 참패해 자녀를 낳지 못한 채 목숨을 잃었다. 이후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작 작위와 영지를 물려받았다. 1346년 9월 7일, 루트비히 4세는 마르그리트의 둘째 아들 빌헬름이 어머니가 사망할 경우 어머니를 계승해야 하며, 빌헬름이 자식 없이 죽으면 마르그리트의 셋째 아들 알브레히트가 어머니의 뒤를 잇게 했다. 그 대신 장남 루트비히는 저지대 국가 상속을 포기하게 했다. 1347년 10월 루트비히 4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빌헬름과 그의 형제들은 신성 로마 제국 황위를 노렸지만, 대다수 제후들이 카를 4세를 지지하자 1350년 2월 카를 4세를 새로운 로마왕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제국 예복을 넘겨줬다.

빌헬름은 1347년부터 1349년까지 다섯 형제와 함께 바이에른과 다른 지역의 비텔스바흐 영지를 통치했다. 1349년 란츠베르크 조약으로 비텔스바흐 영토가 분할된 후, 그는 슈테판 2세, 알브레히트 1세와 함께 하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1353년 레겐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된 후, 빌헬름은 알브레히트 1세와 함께 슈트라우빙-홀란트 부분 공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이 공국은 하바이에른, 홀란트, 질란트, 에노 및 프리슬란트의 슈트라우빙거 렌첸으로 구성되었다. 빌헬름은 북부 지역을 관리했고 남동생 알브레히트는 슈트라우빙거를 다스렸다.

1348년 1월 5일, 어머니 마르그리트는 빌헬름 1세에게 에노 백작위와 홀란트와 질란트 백국의 정부와 프리슬란트 통치권을 넘겨줬으며, 뉴 질란트의 자치권에 대한 아들 오토의 주장을 확인했다. 이때 그녀는 빌헬름으로부터 얀간 10,000골더의 연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나 빌헬름 1세는 자기 영지에서 반항하는 귀족들과 전쟁을 치르느라 수입을 제대로 거두지 못했고, 이에 따라 마르그리트에게 줘야 할 연금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 이 때문에 모자간의 관계는 점점 악화했다. 1350년 3월, 마르그리트는 에노로 돌아온 뒤 빌헬름 1세와 대립하던 귀족들의 추대로 에노 여백작에 복위했다.

1350년 5월 25일, 빌헬름 1세는 이에 대응해 도르드레흐트, 엘프트, 라이덴, 하를렘, 암스테르담, 알크마르 등 수많은 도시를 기반으로 한 대구파와 동맹을 맺었다. 같은 해 9월 5일에는 마르그리트를 지원하는 후크 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는 어머니와 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아, 9월27일 게르트루이덴베르크에서 열린 영지 회의에서 자신에게 양도된 영지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고 추종자들이 자신에게 했던 충성 맹세에서 풀려나게 해줄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 대신, 그는 마르그리트가 관리하는 땅의 상속자가 되는 것에 만족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약속은 유야무야 처리되었고, 이후 마르그리트를 지지하는 후크 파와 빌헬름 1세를 지지하는 대구 파간의 전쟁이 발발했다.

1351년 1월 20일, 마르그리트는 분쟁의 지속을 피하고자 아들 빌헬름 1세에게 연간 2,000길더의 수입을 지불할 테니 질란트의 행정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양보는 합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연대기 작가 요한 폰 베케에 따르면, 마르그리트는 자신에게 맞서는 빌헬름 1세에게 극도로 분노해 아들을 잡으면 몸을 절단하겠다고 외쳤다. 그 이야기를 절해들은 빌헬름 1세는 자기가 어머니를 잡으면 적절하게 대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이후 마르그리트는 장남 루트비히의 지원을 받았고, 질란트 귀족 대부분의 지지를 확보했으며, 도르드레흐트 시민들에게 항구에서 상품을 하역하고 특정 기간 동안 판매용으로 전시할 권리를 인정해주고 그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또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지지도 확보했다. 그녀는 프랑스 국왕 장 2세를 안심시키기 위해 1351년 5월 6일 자신이 프랑스에 대항해 잉글뢘드와 손잡은 게 아니라고 선언했다.

1351년 6월 10일, 잉글랜드군의 지원을 받은 후크파가 대구파를 상대로 비레 인근에서 소규모 해전을 벌여 격퇴했다. 이에 대구파는 1351년 7월 4일 비레 인근 해안에서 재차 해전을 벌여 후크파를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이때 잉글랜드 지원군 지도자는 살해되었고, 마르그리트를 지지하는 많은 귀족이 전사하거나 생포되었다. 빌헬름 1세는 1년 안에 후크파에 귀속되었던 도시 및 마을 17개를 공략하거나 항복하도록 강요했다. 내전이 갈수록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마르그리트는 1351년 9월 에드워드 3세의 지원을 받기 위해 런던으로 향했다. 에드워드 3세는 초기에는 마르기르트를 추종하는 후크파를 지원했지만, 나중엔 입장을 바꿔 1352년 랭커스터 공작 그로스몬트의 헨리의 딸인 레스터 여백작 모드를 빌헬름 1세와 결혼시키고 자기편으로 회유했다.

결국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지 못한 마르그리트는 1354년 12월 7일 삼촌 장 드 보몽과 사촌이자 리니 영주인 발레랑 2세 뤽상부르리니의 중재에 따라 빌헬름 1세와 화해했다. 이날 두 사람 외에도 에노와 저지대 국가의 몇몇 성직자 및 귀족들이 몽스에 모였고, 두 당사자 간의 화해가 승인되었다. 빌헬름 1세는 그녀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했고, 마르그리트는 빌헬름 1세를 용서하기로 했다. 또한 마르그리트는 홀란트, 질란트 및 프리슬란트에 대한 아들의 주권을 받아들였고, 빌헬름은 마르그리트가 에노 여백작으로 칭하는 것을 인정하고 일회성 퇴직금 40,000길더와 연간 연금 7,000길더를 지불하겠다고 했으며, 마르그리트가 죽은 후 빌헬름 1세가 에노에서 그녀의 뒤를 잇기로 했다.

1356년 6월 23일 어머니 마르그리트가 사망한 뒤, 빌헬름 1세가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작에 취임했다. 그는 플란데런 백작 루이 2세 드 플란데런과 브라반트 여공작 잔 드 브라반트의 전쟁을 지켜보다가 1357년 6월 양자가 아트 평화 협약을 맺을 때 중재했다. 1357년 가을 잉글랜드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뒤 심각한 정신질환을 보인 끝에 그의 기사 중 한 명인 제러드 반 웥터린지(Gerard van Wateringe)를 살해했다. 이 정신 질환이 일시적인 것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자, 남동생 알브레히트 1세가 섭정으로서 그의 영지를 도맡았다.

그 후 빌헬름 1세는 "de Dolle hertog(미친 공작)"이라는 별명으로 일컬어졌고, 헤이그 성에 구금되었다가 1358년 아트 성으로 옮겨졌고, 나중엔 케누아 성에 이송되었다. 아내 모드는 1361년 랭커스터 가문의 유산을 요구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갔다가 이듬해 그곳에서 사망했다. 빌헬름은 1361~1362녀에 레스터 백작이 되었으나 이름 뿐이었다. 그는 1389년 4월까지 케누아에 억류되었다가 사망했고, 발랑시엔의 미노아트 교회에 안장되었다. 알브레히트 1세는 그가 죽은 뒤에야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작의 직함을 맡았다. 빌헬름 1세는 생전에 아내 모드와의 사이에서 1356년 딸 모드를 낳았지만 유아기에 사망했고, 정부 카타리나 게리트 부센드르(Catharina Gerrits Busendr, 1332 ~ 1370)와의 사이에서 로에베스타인의 영주 얀 반 헤르베이넨의 아내가 된 사생아 엘리자베트 폰 바이에른을 낳았다.


[1] 1325 ~ 1374, 슬라보이나 공작 슈테판과 초혼, 호헬로헤의 게를라흐와 재혼.[2] 1326 ~ 1361, 하바이에른 공작 요한 1세의 부인[3] 1328 ~ 1365, 상바이에른 공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4] 1329 ~ 1402, 베로나 영주 칸그란데 2세 델라 스칼라와 초혼, 뷔르템베르크 백작 울리히와 재혼.[5] 1335 ~ 1352, 건강이 좋지 않아 수녀가 되었다[6] 1340 ~ 1379, 상바이에른 공작, 브란덴부르크 선제후[7] 1344 ~ 1359, 스웨덴 공작 에리크 12세의 부인[8] 1347 ~ 1348, 요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