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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14:51:00

빈지아 전투

Trận Bình Giã
Battle of Bình Giã / Battle of Binh Gia
빈지아 전투
베트남 전쟁
날짜
1964년 12월 28일~1965년 1월 1일
장소
프억뚜이 성 빈지아
교전 국가 및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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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공화국
남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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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남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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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남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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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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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틀: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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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응우옌반노(Nguyễn Văn N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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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프랭클린 엘러(Franklin P. El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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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쩐딘쑤(Trần Đình X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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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응우옌테쭈웬(Nguyễn Thế Truyệ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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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깃발|]] 타민캄(Tạ Minh Khâm)
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승리
병력 보병 4,300명 보병 1,800~2,000명
피해 남베트남군 201명 전사, 192명 이상 부상[1]
미군 4명 전사
다수의 헬리콥터 격추
32명 전사

1. 개요2. 배경3. 전투 전개4. 결과

1. 개요

빈지아 전투(Battle of Binh Gia, Trận Bình Giã)는 1964년 12월 28일부터 1965년 1월 1일까지 전개된 전투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전투다.

2. 배경

1960년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남베트남에서 결성된 이후 베트콩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전개해왔다. 베트콩은 1963년 압박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이후 남베트남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1963년 틱광득 승려의 분신자살과 그로 인한 남베트남 내부의 반응오딘지엠 민주화 시위가 있은 이후 그해 11월 응오딘지엠이 CIA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암살당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무너지고 난 이후 남베트남에선 응우옌반티에우가 집권하기 이전까지 대략 10차례의 쿠데타가 일어났으며, 이를 기회로 베트콩은 무장투쟁을 강화했다.

응오딘지엠 암살 이후 남베트남군과 관련지역 마을에 대한 베트콩의 공격은 단 2주만에 최소 400건을 넘을 정도였고, 당시 미국 추산으로 남베트남 농촌 지역의 최소 40% 이상이 베트콩 수중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심지어 남베트남 국민들 중 최소 50% 이상이 베트콩 수중에 있다는 추정치가 나올 정도였다. 1963년 압박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던 참전용사 레콴콩은 PBS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기도 했다.
응오딘지엠 정권이 전복되었을 당시 우리들은 아주 기뻐했습니다. 남베트남 전체가 해방될 날이 가까워졌다고 생각했죠. 따라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괴뢰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항복하고 우리 편으로 합류하는 괴뢰 군인들이 많아졌죠. 또한 우리 군대에 자원입대하는 젊은이들이 급증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선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부통령이던 린든 B. 존슨이 대통령이 됐다. 존슨은 16,900명이던 군사고문단의 숫자를 1964년에 23,000명으로 증강했다. 더 나아가 1964년 8월에는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에 이르렀다. 미군이 북베트남에 첫 북폭[2]을 감행한 이후 미국은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규모 지상부대를 보내야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런 도중에 1964년 10월에는 사이공 근처에 있던 비엔호아 공군기지가 공격을 받아 폭격기 5대가 파괴되고 나머지 항공기 및 헬기 수십 대가 파괴 및 손상을 입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전투는 더욱 격해졌고, 결국 12월 빈지아에선 대규모의 베트콩 부대가 미군의 지원을 받는 남베트남군과 교전을 벌였다.

3. 전투 전개

빈지아는 사이공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푸옥뚜이 성에 위치한 곳이었다.[3] 베트남 측 자료인 <항미전쟁의 종결>[4]에 따르면, 베트콩은 이 전투에 최소 2개 보병연대와 7군구 사령부 예하 2개 보병대대, 바리어성 제445중대, 비엔호아 포병부대 등 대규모의 병력과 수십 문의 박격포 그 외 전투지역 내 민간 유격대를 동원했다. 즉, 대대급 병력을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동원했던 것이다.[5] 이 당시 작전에 참여하는 병력이 내린 결의안은 다음과 같다.
적을 무력화시키고 전략촌 파괴를 위한 활동을 지원하며 육해공군을 통한 협동작전을 펼친다. 또한 군사 정치적 연계를 통해 적을 선동하고 규모별 단계별로 적을 격퇴한다. 혁명활도을 지속하기 위한 아군의 거점확대에 주력한다.

이 전투에서 베트콩의 목표는 남베트남 세력을 약화시킴과 함께 미국과 남베트남의 평정전략 작전을 무력화시키고 이들의 전략적 요충지를 파괴하는 한편 인민봉기를 이끌어 내어 이를 지원하고 유격대의 활동을 활성화시켜 아군의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즉, 전투에서 승리하여 베트콩의 거점을 확대하고 최종적으로 미국과 사이공 정권의 특수전을 무력화해 이들을 섬멸하는 것이 주 목표였던 것이다. 12월 28일 새벽 5시 쯤 베트콩은 빈지아 마을을 탈환했고, 65명 규모의 남베트남측 마을 민병대를 쉽게 제압했다. 다음날인 12월 29일 점심 무렵 남베트남군은 해병대(레인저 부대) 2개 중대를 헬리콥터로 투입했고, 28대의 무장헬기 및 이를 호위하는 헬기 50대를 동원했다. 이날 동원된 남베트남군 해병대는 베트콩의 매복 공격에 섬멸당했으며, 투입된 헬기 중 일부도 격추됐다. 앞서 언급한 베트남측 국방부 자료는 이 날의 전투가 베트콩의 대승이었다고 서술했으며, 실제로 PBS 다큐 또한 투입된 남베트남군 해병대가 궤멸당했다고 표현했다. 다음 날인 12월 30일은 그 당시 남베트남군은 해병대를 지원하기 위한 병력을 보냈고, 여기서 또 베트콩과 교전을 벌였다. 이 날도 헬기가 격추됐는데, 아래 다큐멘터리에 나온 인터뷰 내용을 보자.
오후 5시 경, 헬기 하나가 우리가 있는 곳을 맴돌았습니다. 바로 연대 사령부 위에서요. 제 연대장이 말했습니다. 헬기를 격추할 수 있겠나? 우린 연대장에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1분 후, 헬기는 폭발하여 화염에 휩싸였죠.
응우옌반통(Nguyen Van Tong)[6]

그 당시 남베트남군을 돕기 위해 전투에 참여한 미군의 증언도 한번 같이 들어보자.
갑자기 농장에서 예광탄이 날아오는게 보이더니, 헬기에 맞아 헬기는 격추당했죠. 다음 날 아침 거기 가서 생존자를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았죠.
필립 브레이디(Philip Brady)[7]

앞서 인용한 베트콩 참전용사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헬기가 추락한 곳에 가니, 미군 4명이 죽어 있었어요. 그때는 미군 고문단이 생명이 얼마나 비싼지 몰랐어요.

그 당시 남베트남군 해병대 장교로 참전한 이의 증언도 투입된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을 다큐멘터리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사이공에서 온 지휘관이 대대에게 지시했어요. 미군 4명 모두의 시신을 가져오라고 말입니다.
트란녹토안(Tran Ngoc Toan)[8]

미군 시신을 가져오기 위해 남베트남군은 다음날인 31일에 투입되었고, 베트콩과 교전을 벌였다. 이 날 투입된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이 발사하는 박격포탄 공세를 받았다. 베트콩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적잖은 남베트남군을 포위하여 공격했다. 이 날 교전에서 베트콩은 적잖은 남베트남군을 사살했다. 수치는 베트남측 자료와 미국 측 자료가 다르다. 베트남측 자료는 600명을 사살했다고 했으며, 미국측 자료는 남베트남군 해병대 426명 중 총 사상자가 사망 117명, 부상 71명, 실종 13명으로 집계했다. 어떤 수치든 결코 남베트남군 사상자가 매우 많았던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다음 날인 1965년 1월 1일 베트콩은 더 나아가 꼭띠엔 지역에서 매복하여 지나가는 남베트남군 차량 10대를 기습공격하여 완파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빈지아 전투는 베트콩의 대승으로 종결됐다.

4. 결과

빈지아 전투는 전쟁의 중요한 역사적 이정표였습니다. 미군이 참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1966년에 사이공에 들어갔을 겁니다.
응우옌반통(Nguyen Van Tong)
4일간 전개된 빈지아 전투에서 남베트남군은 베트콩에게 극심한 타격을 받고 참패했다. 베트남 국방부 자료인 <항미전쟁의 종결>을 보면, 이 전투를 통해 베트콩이 남베트남군 2개 대대 및 M-113기갑부대 그리고 기타 6개 대대의 병력 1,000명을 사살하고 293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군차량 45대 및 각종 항공기 56대를 격추시켰다고 나온다.[9] 일각에서는 이것을 과장이라고 지적할 수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베트남군의 사상자가 매우 많았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닐 시핸 기자가 집필한 존폴밴(John Paul Vann)의 전기 <A Bright Shining Lie>에서는 빈지아 전투 당시 투입된 남베트남군 해병대 병력 2/3이 사살·부상·포로가 되었다고 나온다. 그리고 전사한 남베트남군 장교가 35명이다. 닐 시핸은 전투에서 총 발생한 남베트남군 사상자가 최소 400명을 넘는다고 쓰고 있다.

PBS 다큐멘터리도 이 전투에서 남베트남군 200명이 죽었고, 또 다른 200명이 부상당했다고 언급했다. 베트남 위키백과에 인용된 Terry Burstall의 저서 <A Soldier Returns>에 따르면, 동원된 남베트남군 병력이 4,000명 정도고 남베트남군 전사자 201명, 부상자, 192명, 실종자 68명이다. 미군은 사망자 5명이고 부상자는 8명, 실종자는 3명으로 나온다. 또한, 헬리콥터 21대와 정찰기 1대가 격추된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에 이 당시 베트콩 전사자는 32명이었다. 어떤 자료를 가지고 추정하더라도 남베트남군이 참패한 전투였다.

빈지아 전투에서의 승리는 북베트남에 있는 호찌민과 레주언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대해 호찌민은 작은 디엔비엔푸(Little Dien Bien Phu)라 극찬했고, 레주언은 자신이 계획하고 있던 남부해방 전략이 잘 먹히고 있다는 확신을 더욱 가지게 됐다.고 한다. 빈지아 전투 이후 레주언은 남부해방전쟁이 급격히 진전됐다는 입장 또한 밝혔다. 1965년 빈지아 전투 이후 미군은 북폭을 강화하고 지상부대를 다낭에 상륙시켰다. 결국 베트콩은 미군을 상대로 오랜기간 전쟁을 치르게 된다.


[1] 사상자를 총 400명 이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2] 통킹만 사건 당시 미군은 F-4 팬텀기를 띄워 빈 지역을 폭격한 적이 있다. 그 과정에서 전투기 한 대가 격추되어 조종사 한 명이 북베트남군의 포로로 붙잡혔다.[3] 흥미롭게도 과거 북베트남에서 월남한 반공 난민 가톨릭 교도 6,000명이 사는 마을이기도 했다.[4] 2009년 대한민국 국방부에서 한글로 번역했다.[5] PBS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에서도 이 당시 베트콩이 동원한 병력이 대략 2,000명 정도라고 언급했다.[6] 전투 당시 베트콩 장교로 참전했다.[7] 미 해병대 고문이었다.[8] 그 당시 남베트남군 장교로 남베트남 측 웨스트포인트인 달랏 학교를 나온 인물이다. 현재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9] 관련 자료를 보면, 책에서는 단순히 빈지아 전투만 포함한 것이 아닌 쑤엔목 전투도 포함한 수치인 것으로 추정되며, 빈지아 전투 전 12월 초부터 빈지아 인근 지역에서 벌였던 충돌까지도 포함시킨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