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비비아노 사피라인 (Bibiano Zapirain) |
생년월일 | 1919년 12월 2일 |
사망년월일 | 2000년 12월 2일 (향년 81세) |
국적 | 우루과이 |
출신지 | 토마스 고멘소로 |
포지션 | 아웃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
신체조건 | 불명 |
소속팀 | 아르티가스 스포르티보 (1937-1938) GE 바제 (1939)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40-1946)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46-1948)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48-1950) 쿠쿠타 데포르티보 (1951-1952)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1952) 로욜라 SC (1953) 쿠쿠타 데포르티보 (1953-1961) 아틀레티코 부카라망가 (1961) |
국가대표 | 21경기 5골 (1942-19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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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루과이의 전 축구 선수2. 생애[1]
2.1. 선수 생활
2.1.1. 클럽
사피라인은 1937년부터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39년에 잠시 브라질 클럽 GE 바제(GE Bagé)에서 뛰다 1940년부터 우루과이의 명문 나시오날에 입단했다. 사피라인은 기존 포워드진과 호흡을 맞추며 입단 시즌에 리그 우승을 맛보았다.이후 나시오날은 3시즌 연속으로 더 우승을 차지했고 사피라인은 1946년, 새로운 도전을 위해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팀을 옮겼다. 당시 인테르는 남미 선수들을 많이 영입하고 있었고 사피라인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브레시아 칼초를 상대로 인테르 데뷔전을 치렀고 첫 시즌에 33경기에 나가 7골을 넣었다. 두 번째 시즌의 사피라인은 25경기 출전, 11골을 기록했고 1948년 4월 14일의 데르비 델라 마돈니나를 끝으로 이탈리아 생활을 정리했다.
1948년, 다시 나시오날로 돌아온 사피라인은 1950년에 한번 더 리그 타이틀을 따고 1951년에 우루과이 선수들을 사 모으던 쿠쿠타 데포르티보로 갔다.[2] 쿠쿠타에서 첫 해에 22골을 넣은 사피라인은 잠시 나시오날로 복귀해서 그의 마지막 리그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나시오날에서 사피라인이 남긴 기록은 190경기 117골이었다.
1953년, 사피라인은 베네수엘라의 로욜라 SC(Loyola SC)에서 상반기를 보내고 다시 쿠쿠타에 돌아갔다. 그는 40이 넘어서도 계속 쿠쿠타에서 현역으로 뛰다가 1961년에 아틀레티코 부카라망가에서 긴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2.1.2. 국가대표
사피라인은 1942년 자국에서 열린 남아메리카 챔피언십에서 우루과이 대표팀 데뷔전을 치렀다. 우루과이가 칠레를 6대1로 이긴 경기가 그의 데뷔전이었고 사피라인은 팀의 4번째 골이자 자신의 국가대표팀 데뷔골을 넣었다. 이후 그는 대회의 모든 경기에 출전해 3골을 넣었는데 최고의 골은 아르헨티나와의 대회 최종전에서 나왔다. 우루과이는 사피라인이 후반 12분에 넣은 선제 결승골로 아르헨티나를 1대0으로 꺾었고 같이 5승씩을 거뒀던 양팀의 대회 성적이 갈린 순간이었다.사피라인은 1946년까지 우루과이 대표팀에서 활약했지만 이후에는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인테르 이적 이후엔 국대와 멀어졌다.
2.2. 이후
축구 선수 생활을 마친 사피라인은 계속 콜롬비아에서 거주했고 2000년에 보고타에서 영면에 들었다.3. 플레이 스타일 & 평가
사피라인은 뛰어난 체력과 세련된 기술력을 겸비한 선수였다. 그는 속도가 빨랐고 강력하고 정밀한 슈팅을 구사할 수 있어서 먼 거리에서도 골문을 노릴 수 있었다. 사피라인은 또한 좋은 시야를 가지고 있어서 더 나은 위치에 있는 팀원에게 정확한 패스를 할 수 있었기에 많은 어시스트도 기록했다. 그는 센터 포워드가 헤더를 노리기 쉽게 크로스할 수 있었으며 코너링에도 능했다.4. 수상
4.1. 선수
4.1.1. 클럽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6회: 1940, 1941, 1942, 1943, 1950, 1952(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 우루과이 프리메라 디비시온 준우승 3회: 1944, 1945, 1949(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
4.1.2. 국가대표
- 남아메리카 챔피언십 우승 1회: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