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요약도 | |
사고 일자 | 2018년 4월 22일 밤 |
사고 유형 | 노면 결빙으로 인한 버스 추락 및 전복 |
사고 지점 |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 교량 부근 |
피해 차량 | 관광버스 2대 |
피해 인원 | 38명[1][2] |
사망자 | 36명(유커 32명, 주민 4명) |
부상자 | 2명 |
1. 개요
2018년 4월 22일 저녁 북한 황해북도 봉산군에서 중국인 단체 관광객과 상무 시찰단이 탄 버스가 교통사고를 당해 중국인 32명과 북한 주민 4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당한 사건.##2. 사건 이전
좌파 성향 사이트 '우여우즈샹'[3] 산하의 '싱훠여행사'[4]에서 중국의 6.25 전쟁 참전 65주년을 맞이하여 ‘항미원조[5] 전쟁 승리 65주년 중국 조선 방문 문화교류단’이라는 명칭의 북한 관광상품을 계획했다.싱훠여행사는 3월 9일부터 여행단 모집에 들어갔다. 여행 일정은 4월 18일부터 4월 24일까지 6박 7일, 관광상품 가격은 1인당 5,900위안(약 100만원)이었다. 사이트
이 여행에는 중국인 단체 관광객 27명과 상무 시찰단 17명이 참여했으며 2대의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단둥에서 집결해 열차 편으로 평양으로 간 여행단은 첫째날과 둘째날에는 평양에서 만수대, 천리마동상, 인민대회당, 김일성광장, 주체사상탑 등을 구경했고 남포에서 서해갑문과 고구려 고분 등을 둘러봤다. 셋째날에는 평안남도 회창군에 있는 중국인민지원군 열사능원을 방문해 6·25 당시 사망한 마오쩌둥의 아들 마오안잉(毛岸英) 묘소를 참배했으며 넷째날에는 개성을 방문하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3. 사고 당일
사고가 발생한 지역에서는 사고 당일 큰 비가 내렸다.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준비 인력 수송을 위한 도로단장 공사도 미뤄질 정도였다고 한다.사고 당일인 다섯째 날에는 원산을 방문해 둘러보고 오후에는 상감령지구를 방문해 원거리에서 상감령의 크고 낮은 봉우리들을 지켜봤다. 참고로 상감령지구는 당시 처음 개봉되었다. 이후 개성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버스가 모두 교통사고를 당했다. 낮은 기온과 당시에 내렸던 큰 비로 인해 도로가 얼어 있었다.
그 와중에 상무 시찰단이 탄 킹롱버스는 다리 아래로 추락하고 관광객이 탄 버스는 전복되어 크게 파괴되면서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버스는 폭발하지 않았다고 한다.
4. 반응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위생건강위원회는 베이징대 인민병원 등 4개 병원에서 흉부외과, 신경외과의 최고 전문의들을 23일 오전 의약품 및 의료 장비와 함께 북한에 급파했다. 4월 23일 오전 6시 30분 북한도 이 사건의 중대성을 깨달은 것인지 김정은은 북한 주재 중국대사관을 방문해 리진쥔(李進軍) 대사에게 "뜻하지 않은 불상사가 발생한것이 매우 가슴아프다. 혈육을 잃은 유가족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통절한 심정을 금할수 없다. 우리 인민들도 비극적인 이번 사고를 자기들이 당한 불행으로 여기고있다. 우리 당과 정부는 유가족들의 아픈 상처를 조금이라도 가셔주는 심정에서 후속조치들을 최대의 성의를 다하여 취할것."이라고 애도의 뜻을 밝혔으며 리진쥔 대사는 이에 대해 사의를 표했다.중국대사관에서 조문하는 김정은 |
23일 저녁 김정은은 병원을 찾아 부상자 치료 정형을 직접 파악했다. 부상자들을 찾아가 위로하고 환자들의 상태를 파악하면서 정부 병원의 의료성원들과 함께 앞으로의 치료 대책을 협의했다.
환자들을 위문하는 김정은 |
4월 25일, 김정은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영남, 내각총리 박봉주와 연명으로 시진핑, 리커창, 리잔수의 앞으로 위문전문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 경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총서기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습 근 평동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리 극 강동지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률 전 서동지 우리들은 지난 4월 22일 황해북도 봉산군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많은 중국관광객들이 사망한것과 관련하여 중국공산당과 중화인민공화국정부, 전체 중국인민과 피해자유가족들에게 가장 심심한 애도와 사과의 뜻을 표합니다. 우리 인민에 대한 친선의 정을 안고 찾아왔던 친근한 중국의 벗들이 우리 땅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게 된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며 조선로동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정부, 전체 조선인민은 이에 대하여 친혈육이 당한 피해로 여기고 당신들과 함께 깊은 슬픔에 잠겨있습니다. 중국동지들에게 그 어떤 말과 위로나 보상으로도 가실수 없는 아픔을 준데 대하여 깊이 속죄합니다. 하루빨리 슬픔의 이 시간들이 지나가고 아픔이 조금이라도 가셔질수 있도록 우리 당과 정부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것입니다. 조선로동당 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회 위원장 김 정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김 영 남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총리 박 봉 주 주체107(2018)년 4월 25일 평 양 |
이는 로동신문 1면에 게재되었으며 시신과 부상자를 후송하기 위해 전용열차 편성을 지시했고 4월 25일 밤에 직접 평양역으로 나가서 부상자들과 시신을 전송하였다. 평양역에서 김정은은 박봉주 총리, 측근 조용원 등 당정 간부들을 거느리고 리진쥔 대사를 다시 만나 애도와 사과의 뜻을 다시 표명하였으며 "자신과 우리 당과 정부가 이번 사고를 놓고 책임을 통절히 느끼고있다. 그 어떤 말과 위로나 보상으로도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아픔을 달랠수 없다는것을 잘 알지만 우리가 할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해 중국동지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고싶은 마음뿐."이라면서 위문전문 및 위문금을 전달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시신을 전송하는 김정은 |
김정은이 이렇게 사태 해결에 집중한 것에는 중국인의 피해가 상당한 것에 따른 도의적인 책임도 없진 않지만 그것보다는 외교적인 성격이 더 크다는 해석이 많았다. 마침 사고가 일어난 날을 전후해서 북한은 2018 제1차 남북정상회담, 2018년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있으며 바로 한달 전에는 김정은이 직접 중국을 국빈 방문하는 등 북한을 둘러싼 외교 정국이 급변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중국과의 외교 관계를 적절하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김정은이 직접 부상자를 위문하고 사과문을 발표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후 총참모장 리명수, 인민무력상 박영식, 총정치국장 김정각이 모두 경질되었는데 이에 관련한 책임을 졌다는 분석도 나왔다.
5. 마오신위 사망 논란
이 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유커 중에 마오쩌둥의 친손자인 인민해방군 육군 소장 마오신위가 있었다는 추측이 제기됐다. 이에 대하여 한때 암살설까지 나오기도 했지만 중국 정부에서 마오신위가 북한을 방문했다는 설 자체를 공식 부인하였다. 일단 중국 쪽에서도 마오신위 관련 뉴스는 일절 없었으며 마오신위도 그저 할아버지의 후광밖에 없고 딱히 중국공산당 내에서 지분을 가진 것도 없는 사람이라 암살당할 정치적 이유도 없다.마오신위에 대한 설명을 간단히 하면 마오쩌둥과 조강지처[6] 양카이후이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마오안칭이 인공수정으로 낳은 유일한 아들이다. 인공수정으로 낳은 이유는 마오안칭이 국민당의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조현병을 가지면서 폐인이 되었고 정상적인 성관계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마오신위는 2010년에 40세로 군 최연소 소장이 되었다. 물론, 능력이 아니라 국부인 마오쩌둥의 손자라서 얻은 자리이며 한 번도 실전부대를 지휘한 적은 없다. 군에서도 전사(戰史) 편찬과 같은 상징적인 역할만 맡았다. 어쨌든 정치적 위상은 거의 없으므로 암살설의 근거는 거의 없다.
그리고 사고 이후 마오신위가 공식 석상에 참여하면서 마오신위 사망설은 루머로 밝혀졌다.
[1] 중국인 단체 관광객 27명, 상무 시찰단 17명, 북한 주민 4명.[2] 베이징의 중국여유공사 직원들과 좌파 홈페이지 '홍가회'의 왕궈쥔 단장, 다이청 명예단장, 좌파 인터넷 사이트 '우여우즈샹(烏有之鄕)'의 편집장이자 싱훠(星火)여행사 사장인 댜오웨이밍, 마오쩌둥 관련 다큐멘터리영화 등을 감독한 중국 관영 CCTV 아이신 감독의 부친, 중국홍가(紅歌)회 회원, 6·25 참전 중국 장군들의 자녀 등 좌파 성향 인물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3] 2003년 베이징에서 만들어진 마오쩌둥을 신봉하고 중국의 개혁개방을 반대하는 좌파 성향의 인터넷 사이트다.[4] 공산주의 지배 체제를 유지하는 북한과 쿠바를 비롯해 러시아의 레닌 유적, 유럽 마르크스 유적 등을 탐방하는 여행상품을 팔고 있다.[5] 중국에서 중공군의 6.25 전쟁 참전을 일컫는 말. 미국에 대항해서 조선을 도왔다는 의미가 있다.[6] 부모가 억지로 혼인시킨 연상의 첫번째 아내 뤄이슈(1889~1910)가 있긴 하지만 마오쩌둥은 한 번도 그녀를 아내로 인정한 바 없다. 결국 마오쩌둥이 타지에서 유학하는 동안 홀로 시댁에서 시집살이를 하다가 병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