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Rotten Boroughs, Pocket Boroughs부패 선거구, 포켓 선거구, 지명 선거구
19세기까지 영국의 하원에 존재했던 대표하는 주민이 거의 없는 선거구. 유권자가 아주 적기 때문에 후보자가 약간의 금권이나 영향력만으로도 의원 자리를 아주 손쉽게 얻을 수 있었고 재선되기도, 후계자에게 물려주기도 수월했기 때문에 부패 선거구라 불린 것이다.
이러한 선거구 중에는 유권자의 대부분이 특정 집안의 직접 지배 하에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 정도까지 되면 명목상으로만 하원의원일 뿐 사실상의 귀족 작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러한 선거구는 포켓 선거구라고 불렸으며 선거구가 정치인 사이에서 거래되는 등 의원직을 사유화하는 방법으로 이용되었다.
선거구를 유리하게 '조작'하는 게리맨더링과는 조금 다르지만 불공평하게 짜여진 선거구를 '악용'한다는 점에서는 통하는 면이 있다.
2. 발생 원인
한마디로 줄이면 선거구 개혁을 500년 넘게 하지 않아서 그렇다. 19세기는 표의 등가성이나 선거구 획정, 아니 그 이전에 선거구 같은 개념들 자체가 명확하지 않았을 시대였다. 심지어 영국의 의회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발생하고 자리잡기 이전인 13세기부터 존재해 왔기 때문에 의원이나 선거구의 구성에 있어 민주적인 고려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1832년 이전 영국 하원의 의원 선출 원칙은 무려 1297년에 정해진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영국을 구성하는 통상적인 주(shire, county)[1]에서 선출되는 2명의 기사 이외에 자치도시(borough)마다 1~4명의 시민을 대표로 의회에 보내도록 되어 있었는데 부패 선거구의 원문이 rotton 'borough'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대부분의 문제가 이 borough에서 발생했다.
borough라는 것은 헨리 2세 이래 왕실 칙허(royal charter)을 받아 여러가지 중세적인 특권을 인정받은 자치 마을(town)인데, 한국으로 따지면 특례시, 특별자치시쯤 된다고 보면 된다. 문제는 왕이 칙허를 거둬가지 않는 한 마을이 폐허가 되더라도 의원 선출 권리는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 19세기 영국은 인클로저 운동과 산업혁명으로 인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격렬하게 이동하면서 수많은 borough들이 유령마을로 몰락했으나 여전히 의원 선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맨체스터 같은 신흥 공업 도시는 인구가 15만이 넘는데도 불구하고 광역 농촌 선거구인 county에 포함되어 있을 뿐이어서 사실상 투표권이 없는 상태였다.[2]
게다가 지방자치가 유서깊은 영국답게 borough에서 어떤 방식으로 의원을 뽑을지에 대해서는 완벽히 '알아서 정하라'는 식이었기 때문에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투표권이 주어져서 더더욱 유력자가 쉽게 선출되는 시스템이었다. 대체로 거주 유무가 아닌 부동산 소유권에 투표권이 얹어지는 식이었는데 그래서 그냥 땅을 다 사버리면 의원 자리가 덤으로 튀어나오는 구조가 많았으며 여러 부패 선거구에 땅을 사 놓았으면 1인이 여러 부패 선거구에서 향응을 받으며 표를 행사하는 것도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은 비밀 선거가 보장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부패 선거구가 될 정도로 작은 사회에서 유력자가 아닌 후보를 뽑는다는 것은 아주 후환이 두려운 일이었다.
3. 시대상
영국의 정치적 자유를 찬양하면서 이 나라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푸른 공원에 안내되어, 채소는 잔뜩 자라지만 주민은 도무지 없는 이 빈터가 두 명의 대표를 의회에 보낸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겁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상공업이 발달한 도시로 안내되어, 거기는 인구는 조밀하지만 단 한 명의 의원도 선출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한층 더 놀라 자빠질 것이다.
당시의 영국 평론
1831년 총선 시점에서 658명의 하원 의원 가운데 152명이 유권자 100명 이하의 선거구에서 선출되었으며 그 중 88명은 유권자 15명 이하의 선거구 출신이었다.당시의 영국 평론
부패 선거구는 주로 과거부터 정치적 중심지였던 남부 잉글랜드에 많았기 때문에 1831년 기준으로 인구 300만을 조금 넘는 남부 10주는 부패 선거구의 도움으로 하원에서 236석을 차지한 반면 400만에 가까운 북부 6주는 불과 68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불평등한 상황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1776년 존 윌크스는 당시 영국 의회의 세력분포를 분석한 결과 254석만 확보하면 의회(하원)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데 이 254석은 불과 5,723명에 의해 선출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5,723명만 잡으면 영국 전체를 휘두를 수 있었다는 말. 이 254명의 의원이 대표하는 유권자는 평균 23명에 불과했다.
공개적으로 런던 타임즈 신문에 의원직 판매 광고가 올라오기도 했다. 체스터필드 경이라는 귀족은 자기 아들을 위해 2,500 파운드라는 낮은 가격으로 하원 의원직을 사려다 웃음거리가 되기도 했으나 낮은 가격이 문제였을 뿐, 의원직을 매매하는 행위 자체는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보수적인 농촌 귀족들을 대표하는 토리당이 휘그당보다 부패 선거구로 이득을 많이 봤다. 그래서 1832년의 선거법 개정안이 통과되자 토리당은 이를 정치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휘그당에게 보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대 영국 총리 로버트 월폴은 휘그당이지만 포켓 선거구 출신이다(Castle Rising이라는 곳)
3.1. 유명한 부패 선거구들
- Old Sarum: 이미 13세기에 대성당이 솔즈베리로 이전하는 바람에 폐허가 되었지만 600년(!)간 꾸준히 2명의 의원을 선출해 온 염치없는 곳이다. 1831년 기준으로 올드 새럼에는 11명의 유권자가 등록되어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다른 곳에 사는 지주였으므로 실제로는 단 한명의 유권자도 거주하지 않았다. 피트 가문의 텃밭이기도 해서 영국의 명재상 대(大) 윌리엄 피트와 그의 아버지를 배출한 영광스러운(...) 부패 선거구다. 심지어 피트 가문은 1801년에 이 선거구를 6만 파운드에 팔아치워 뽕을 뽑아 먹었다.
- Castle Rising: 로버트 월폴이 당선된 것으로 유명한 선거구로, 이 선거구는 폐허는 아니지만 'burgage borough'라고 해서 선거권이 burgage tenement라고 불리는 롱하우스[3]의 소유권에 달려 있는 특성이 있었다. 덕분에 돈만 있으면 손쉽게 선거권을 매수할 수 있는 부패 선거구로 분류된다.
- Appleby: 소(小) 윌리엄 피트가 당선된 선거구로, 위의 Castle Rising과 같은 burgage borough였으며 게다가 모든 유권자가 유력한 두 지역 가문 중 하나에 속해있기에 누가 당선될지 쑥덕거려서 정할 수 있는 부패 선거구였다. 정작 소 피트는 여기서 당선되어 놓고 선거구 개혁을 주장한 바 있다.
- Dunwich: 해안선 침식으로 14세기에 이미 마을의 대부분이 바다 밑에 가라앉아 버렸지만 여전히 2명의 의원을 배출한 걸작 선거구. 유권자들은 물에 잠긴 마을 위치에 배를 띄워 놓고(...) 투표를 했다고 한다.
- Looe: 콘월에 위치한 유권자 50명의 항구마을에 불과한데 이걸 또 West Looe와 East Looe로 나눠서 4명을 뽑아댄 곳이다. 이는 영국의 심장인 시티 오브 런던과 같은 수의 대표를 선출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 웨슬리가 맹비난했다. 콘월 지역에는 부패 선거구가 유난히 많았는데 이는 튜더 왕조 시절에 콘월 공작령이 있어 왕실 영향력이 강했던 콘월 지역에다가 마구잡이로 왕실 칙허를 뿌려대서 왕당파 의원을 늘리기 위한 수작을 부렸기 때문이다. 이런 선거구들은 애초에 인구가 붐볐던 시절조차도 없는 시골 마을들에 불과해 시작부터 완벽하게 부패한 선거구였다. 덕분에 깡촌에 불과한 콘월 지역의 의원 수는 스코틀랜드보다 1명 적을 정도로 과도했다.
- Gatton: 최소 유권자로 유명했던 곳. 유권자가 가장 적었을 때 이곳의 유권자는 단 7명이었으며, 선거를 했는데 총 투표수가 2표인 경우도 있었다. 인도에서 큰 돈을 번 사업가가 이 선거구를 매수했으며, 나중에 이를 토리당에다 17만 파운드에 다시 팔아치운 기록이 있다.
- Beeralston: 최연소 의원으로 유명했던 곳. Christopher Monck이라는 의원이 13세에 당선된 기록이 있다. 의회 내 7개의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왕성하게 활동했다는데 믿거나 말거나다.
- Grampound: 당시 '가장 부패한 선거구'로 유명했던 곳. 유권자들이 300기니[4]를 받고 투표했다고 자랑을 해서 소문이 자자해진 바람에 1832년의 선거법 개정이 있기 10년도 전인 1821년에 특별법이 통과되어 선거구가 미리 박살났다.
- Amersham: 1308년 이후 의원 선출의 권리가 있다는 것조차 망각해 버린 동네인데 한 변호사가 오래된 법전을 살펴보더니 마을에 의원을 선출할 권리가 있음을 확인하고 300년만에 선거를 벌여서 스스로를 당선시켰다.
4. 해소
1770년대에 이미 소(小) 윌리엄 피트가 선거구 개정을 제안한 바 있으나 번번이 거절되다가 프랑스 대혁명이 터지는 바람에 반(反)개혁 분위기가 우세해져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부패 선거구의 정리는 1832년 찰스 그레이가 선거법 개정안(the Reform Act)을 통과시키면서 비로소 시작될 수 있었다.이 법안도 당연히 기득권층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지만 토리당 내부의 분열과 배신에 힘입어 간신히 하원을 통과될 수 있었다. 하원을 통과한 뒤에도 상원에서의 법안 거부와 찰스 그레이 본인의 실각 때문에 법안이 좌초 직전에 몰렸으나 버밍엄, 브리스톨을 위시한 신흥 공업도시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150만 파운드의 돈이 영란은행에서 빠져나가는 뱅크런 상황까지 일어났으며 특히 브리스톨은 도시가 사흘동안 폭도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렇게까지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통과될 것 같지 않던 선거법 개정안이 단 한 표 차이로 간신히 최종 통과되었다. 존 칼크래프트라는 의원이 마음을 바꾼 것이 결정적이었는데, 그는 선거법 개정 통과 이후 너무 욕을 먹은 나머지 자살했다. 당시 선거법 개정이 얼마나 첨예한 이슈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이 법안 덕택에 인구 2000명 이하의 56개 부패 선거구가 폐지되었고, 4000명 이하의 36개 선거구는 2명이 아닌 1명의 의원을 선출하도록 축소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신흥 도시 선거구에 의석이 신설되었다. 덕분에 유권자의 수는 50만명 이하에서 80만명까지 상승했다.
1832년의 선거구 개정으로 인한 잉글랜드의 선거구 변화를 보여주는 지도.
네모: 현행 유지
검은 세모: 선거구 완전 폐지
흰색 세모: 선출 의원 1석으로 삭감
흰색 원: 1석 신거구 신설
검은 원: 2석 선거구 신설
콘월을 위시한 남부 잉글랜드 지역에서 대량의 부패 선거구가 폐지되었고 중/북부 잉글랜드 및 런던 근교 지역에서는 다수의 선거구가 추가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선거법 개정이 모든 문제점을 한방에 해결한 것은 아니고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다. 일단 모든 과소 선거구를 폐지하지 못했기에 표의 등가성 문제가 완벽히 해결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버킹엄과 리즈는 각각 349명과 4,772명의 유권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대표하는 의원의 수는 같았으므로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10:1이 넘는 선거구 간 인구 편차가 여전히 존재했다.
의회의 구성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과반수의 하원 의원이 농촌 선거구에서 왔으며, 대부분은 토지 소유자였다.
유권자의 기준을 약간 완화해 주긴 했지만 보통 선거의 달성이 목표는 아니었고 이루어지지도 않았다. 이 시기를 전후로 영국에서는 보통선거를 요구하는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났으며 영국의 모든 성인 남녀가 공평하게 1표씩을 행사하게 된 것은 100년 후인 1928년의 일이 된다.
어쨌든 1832년의 선거법 개정은 앞으로 선거구 간 인구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방향성을 처음으로 제시해 주었으며 1867년의 개정으로 유권자 1만명 이하의 선거구가 모두 폐지되며 1885년의 개정으로 1만 5천명 이하의 선거구가 폐지되어 인근 선거구에 통합되면서 말도 안 되는 과소 선거구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