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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06 22:03:03

보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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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시가지 한가운데의 바시르 이브라힘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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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심에서 바라본 신도심 신도심 일대

1. 개요

아랍어 بو سعادة
베르베르어 ⴱⵓ ⵙⵄⴰⴷⴰ
영어, 프랑스어 Bou Saada

알제리 북부의 도시. 음실라에서 서남쪽으로 50km, 젤파에서 동북쪽으로 80km, 비스크라에서 서쪽으로 100km 떨어진 협곡에 위치한다. 인구는 14만명이고, 사막으로 향하는 관문 도시이다. 지명은 아버지를 뜻하는 보우 (아부 / 부)와 사다 (행복)의 복합어다. 아부다비의 경우처럼 아랍에서 아버지나 어머니 (움 / 움무)가 붙은 지명은 함께 오는 물질이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1] 따라서 보우사다는 '행복이 깃든 곳'이란 의미이다. 동남쪽의 이웃 도시 벤 수루르는 '즐거움의 아들'이란 뜻으로 비슷한 느낌이다. 다만 역사적으로는 라구아트, 비스크라와 함께 19세기 프랑스의 침공 당시 가장 가혹히 학살을 겪었고 현재도 공군기지와 감옥이 위치하여 과거와 달리 관광이 침체된 상태로 남아있다.

시가지는 두 암석 산지 사이를 흐르는 와디 보우사다를 따라 형성되어 있고, 수직에 가까운 바위산과 대추야자 숲이 조화를 이룬다. 역사적으로도 구도심인 크사르의 복잡한 골목과 남쪽의 깔끔한 근대 시가지가 조화되어 있고, 나스레딘 디네 박물관과 성채와 엘 아티크 모스크 등 사원들이 주요 볼거리이다. 전통적으로 장신구, 철제품, 카펫 등을 생산하고 파는 유목민들의 시장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보우사디 칼이 유명했고, 현재까지도 특산품이다. 해발 1,330m의 고지대에 위치한 덕에, 비록 사막기후라 여름에 덥지만 겨울에는 0도 대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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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사르 (구도심)의 고즈넉한 모습 19세기의 보우사다

일대에는 선사시대 바위 그림이 보이고, 누미디아 시절에는 사냥터로 쓰였다. 그러다 15세기 슬리마니 벤 라베아와 시디 타메우르 벤 아흐메드 엘 파시 등이 본격적으로 와디 부사다 서안의 대추야자 숲을 끼고 도시를 건립하였다. 근대 이전 보우 사다는 유목민들의 정박지였고, 과 양모 등이 거래되었다. 다만 17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 산하 알제 총독령의 과도한 징세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나며 점차 쇠퇴하였다. 그러던 19세기 중반 프랑스의 침공 속에서 현지 부족들은 엘 아므리 벤 셰이헵의 지휘 하에 자차스 연맹을 결성해 저항하였다. 다만 1849년 엘 아므리는 프랑스와 싸우다 전사하여 조상인 시디 타메우르가 세운 엘 네클라 모스크에 안장되었다. 이후 도시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격렬한 저항에 대한 본보기로 어린이와 노약자까지 대거 학살하는[2] 만행을 저질렀다. 보우 사다의 참극은 오아시스를 건너 각지에 알려졌고, 라구아트에서 되풀이되었다.

2.1. 프랑스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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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슬림 복장의 나스레딘 디네 프랑스 시절 크사르 서쪽 언덕에 세워진 성채와 시계탑

이후 프랑스 당국은 기존 도시 (크사르) 남쪽에 새로운 시가지를 세웠고, 셰이크 벤차비라의 2차 저항 역시 진압한 후 군대를 주둔시켰다. 식민 당국은 현지인들을 등용하면서도 기존 부족 문화를 말살하려 주력하였고, 1871년 북쪽의 모크라니 반란 후에는 현지인들의 땅을 몰수하였다. 동시에 유럽계 정착민들을 유치하려 노력했으나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20세기 들어 보우사다는 알제리의 관광지 중 하나로 개발되어 바위산의 경관과 옛 크사르, 남쪽 엘 하멜의 아이트 아베스 왕국 시절 건립된 수피 라흐마니야 수도원 (자위야) 등을 보려는 여행객들을 유치하였다. 1930년대에 절정에 달한 관광업은 1940년대 2차 대전 들어 격감하였고, 1945년에는 역병까지 덮쳐 치명타를 맞았다. 역병 당시 부유했던 벤라므리 가문의 마클루피, 엘 아므리 형제가 사재를 털어 약을 구매하여 주민들에게 보급하는 의로운 모습을 보였다.

암울했던 프랑스와 원한이 많은 도시지만, 진심으로 현지인들의 존경을 얻은 프랑스인이 있었다. 1861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오리엔타릴스트 화가 알퐁스 에티엥 디네는 1884년 보우사다를 방문한 후 일대에 매력을 느꼈고, 여러 미술 대회에서 우승한 자금으로 1903년 시내에 집을 사서 매년 270일 가량 거주하였다. 마그레브 문화에 매료된 그는 10년 후 아예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이름도 나스렛딘 디네로 개명하고 아내와 함께 핫즈(메카 순례)까지 다녀왔다. 그의 진심에 감명한 현지인들은 1929년 12월 디네가 파리에서 사망하자 이듬해 1월 자체적인 장례를 거행하였고, 이때 무려 5천의 인파가 모였다 한다. 그가 30년 가까이 살았던 구도심 서쪽의 옛 집은 현재 나스레딘 디네 박물관으로 남아있다.

2.2. 현대

알제리 독립전쟁 시기 보우사다의 현지인들은 FLN (민족해방전선)과 원로 정치인 메살리 하지를 따르는 파벌로 나뉘었다. 프랑스는 후자의 대표인 모하메드 벨루니스를 후원하다가 1958년 그를 숙청하였다. 다만 프랑스 지배의 종식과 알제리의 독립 후에도 보우사다는 이름처럼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1970년대 부활의 조짐을 보이던 관광 산업은 1990년대 알제리 내전으로 재차 침체되었고, 전쟁 도중 무장 조직이 나스레딘 박물관에 방화하여 전소시키기도 하였다. 박물관은 전후에 복구되었다. 또한 전후에도 알제리 정부는 보우사다에 감옥을 세우고 북쪽 10km 지점에 있던 공항을 공군기지로 전환하는 등 관광업 부흥을 원하던 주민들의 염원을 무시하는 정책으로 불만을 사고 있다.

3.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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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개의 하라 (구역)와 라흐바 (광장)으로 이루어진 크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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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렛딘 디네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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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아티크 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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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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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에서 보기 드문 물레방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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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디 보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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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르다다 산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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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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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산지


[1] 아부다비는 '사슴이 있는 곳'이란 뜻이 된다. 같은 나라인 움 알쿠와인은 철이 있는 곳이란 뜻이다.[2] 엄마가 보는 앞에서 아이를 성벽에 찧어 죽이고, 이에 엄마가 죽여달라 청하자 역시 죽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