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길리우스 Vergilius | |
본명 | 푸블리우스 웨르길리우스[1] 마로 Publius Vergilius Maro |
영어명 | 버질 Virgil / Vergil |
출생 | 기원전 70년 10월 15일 |
로마 공화국 갈리아 키살피나 만투아 근처 | |
사망 | 기원전 19년 9월 21일 (향년 50세) |
로마 제국 브린디시 | |
직업 | 시인 |
장르 | 서사시, 교훈시, 파스토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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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 호라티우스와 함께 역대 최고의 라틴어 문학가라고 불리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여러 작품이 그의 이름으로 전해지지만, 현재로서는 〈농경시〉, 〈전원시〉, 〈아이네이스〉 등 세 작품만이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라고 인정받는다. 특히 〈아이네이스〉는 당대 로마를 넘어 유럽 문학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된다.[2]
2. 생애
기원전 70년 북부 이탈리아에서 태어났는데, 베르길리우스의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 또는 옹기장이였다고 전한다. 기원전 55년에 성인식을 치르고는 형제들과 함께 다른 젊은이들처럼 로마 대도시 상급학교로 가서 정치, 법률, 수사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등을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베르길리우스는 법정에 한번 서 보았지만, 수줍은 성격 탓에 제대로 변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날로 문학으로 진로를 바꾸어 평생 문학에 투신하기로 마음 먹고 평생 장대한 서사시를 쓰기를 꿈꾸었다.그의 이름을 로마 전역에 알린 초기작 〈전원시〉는 목자들이 읊는 이상적 상상세계, 현실의 불행에 대한 상투적인 비탄이 결합되어 언어적인 유려함이 뛰어나다고 평가받는다. 기존의 시들보다 더 이상화된 세계를 노래하였고, 특히 베르길리우스는 목가적인 세계와 현실세계를 최대한 밀접하게 하려 노력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승전 이후 군인들이 주인들을 내쫓고 땅을 차지하는 세태에 빗대어 목자들이 슬픔을 노래하거나, 안토니우스와 소 옥타비아의 결혼에서 태어날 아기를 기대하며 구세주가 될 아기의 탄생을 노래했는데, 여기서 말한 '구세주가 될 아기'는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암시하는 예언이라고 이해되기도 했다. 주인들이 내쫓긴다는 내용은 베르길리우스 자신이 직접 땅을 빼앗긴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나중에 연줄을 통해 되찾았다고 한다.[3]
그 다음 작품 〈농경시〉를 쓰기 시작할 무렵에는 폴리오에게 후원을 받았으나, 완성할 즈음에는 아우구스투스와 친밀해지면서 대표적인 문예 후원자인 마이케나스로부터 후원받았다. 〈농경시〉는 열심히 노력하면 이탈리아의 땅은 보답을 준다는 내용으로, 시적 아름다움은 물론 긴 전쟁으로 피폐해진 농토를 재건하고 도시를 편하게 하려는 당시의 정치상황과 시골 출신인 베르길리우스 자신이 느끼던 안타까움이 함께 담겼다. 〈농경시〉를 두고 세네카는 '농부보다는 독자들의 즐거움을 위해 쓰여진 책'이라고 평했으며, 잦은 퇴고를 통해 치밀하게 언어를 다듬은 흔적이 엿보인다. 이 무렵 베르길리우스는 로마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받으며, 아우구스투스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다.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 탁월하다고 느낀 후원자 마이케나스와 아우구스투스 등은 로마를 위한 로마 역사를 다루는 장대한 서사시를 써 보라고 격려하며 권유하고, 베르길리우스는 이에 고무받아 〈아이네이스〉를 쓰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후 베르길리우스는 11년 동안 〈아이네이스〉 창작에 매달렸는데, 작품의 완성을 위해 3년을 더 〈아이네이스〉에 바치기로 하고 그리스 지방으로 답사 여행을 떠났지만, 메가라에서 열병을 얻어 이탈리아로 귀국하고는 곧 죽었다. 그 탓에 〈아이네이스〉는 미완으로 남았다. 베르길리우스는 죽기 전에 미완성 작품인 〈아이네이스〉를 불태워 달라고 부탁했으나, 아우구스투스가 이 같은 위대한 작품은 미완성 상태로도 충분하다고 하여 세상에 남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베르길리우스가 살아있을 적에 이미 2, 4, 6권의 낭독을 들었다)
퇴고에 몰두하던 수줍은 시인의 작품은, 라틴어가 닿을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평가받으며 후세에 널리 알려졌다. 또한 건전하고 보수적인 가치관을 대변하는 그의 작품은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각지의 학교에서 교과서로 쓰였으며, 로마가 그리스도교 사회가 된 뒤에도 〈전원시〉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 찬미한 것이라 여겼고, 〈아이네이스〉 역시 신의 소명에 전적으로 충실한 아이네아스가 갖은 고난과 역경에 부딪혀 괴로워하면서도 꿋꿋이 이겨내는 모습이 그리스도교적 덕목을 반영한다 하여 변함없이 애송되고 필사되었다.
3. 여담
- 루크레티우스의 영향으로 초기 작풍은 에피쿠로스적이었는데, 후기로 갈수록 스토아적으로 변했다.
- 베르길리우스는 즉흥으로 운율이 살아있는 시를 써낼 만큼 재능이 대단했지만, 창작에 진지하게 몰두할 때에는 산문으로 작품의 얼개를 먼저 쓴 다음 천천히 시간을 들여 운문으로 정리하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아이네이스〉가 바로 이런 과정을 거친 결과물.
- 로마의 직계 후예인 이탈리아뿐 아니라 영문학, 불문학, 독문학 등 라틴어의 영향력이 닿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나 베르길리우스의 영향력이 드리웠다. 대표적으로 다음 사례들을 거론할 수 있겠다.
- 라틴어 문장가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아우구스티누스는 학생 시절 베르길리우스를 무척 즐겨 읽었다고 한다.
-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 지옥에서 연옥, 천국의 문 앞까지 단테를 인도하는 역할로 등장한다.
-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서도 베르길리우스를 지나가듯 언급하며 그에 대해 찬사를 남긴다.비발도가 나서 말했다. "죽은 그리소스토모가 남긴 저 종이 뭉치를 그의 유언에 따라 다 태워버린다는 건 너무 가혹하고 모진 처사가 아닙니까?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비이성적으로 유언한 것인데 모든 걸 그대로 따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만일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가 만투아 출신의 시성(詩聖)이 남긴 유언에 따라 그의 원고를 모두 없애버렸다면 큰일 났을 겁니다. 암브로시오, 이미 친구의 육신은 땅에 묻었으나 저 종이 뭉치는 망각 속으로 보내지 마십시오."…ㅡ 〈돈키호테 1〉, 박철 역, 시공사, 2015, p.179
-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절부터 베르길리우스 점(Sortes Vergilianae)이라는 책점이 널리 유행했다고 한다. 〈아이네이스〉를 펼쳐 곧장 눈에 보이는 문장으로 자신의 미래를 점치는 것인데, 이는 〈아이네이스〉가 인생을 아우를 만큼 다채로운 언어를 구사함을 방증하기도 한다. 영국의 찰스 1세도 잉글랜드 내전에 시달리던 와중에 운세를 점쳤다고 하는데, 디도가 아이네이스에게 저주를 내리는 흉흉한 부분 "…그때 그는 사나운 백성들과 싸워 전쟁에 시달리며…"[4]를 읽었다고 한다(...)
- 게임 Limbus Company의 등장인물, 베르길리우스의 모티브가 되었다.
- 데빌 메이 크라이 시리즈의 등장인물인 버질이 이 인물의 영어명에서 이름을 따왔다.
4. 관련 문서
- 베르길리우스의 파리
- 신곡
- 아이네이스
- 버질 (Vergil: 베르길리우스에서 따온 이름으로 남자 이름으로 많이 쓰인다)
[1] 고전 라틴어 기준. 교회 라틴어론 베르질리우스. 한국에서 라틴어 인명을 표기할 때 쓰이는 관행적 표기는 고전 라틴어와 교회 라틴어가 섞인 것이다.[2] 시집 〈아펜딕스 베르길리아나〉(Appendix Vergiliana)도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라고 알려졌으나, 현재는 그 일부만이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이라고 여긴다.[3] 베르길리우스는 크레모나에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카이사르 내전 당시에는 크레모나는 카이사르에 붙었지만 브루투스의 내전 당시 브루투스에 붙었다. 하지만 브루투스가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연합군에게 패배했고 그에 대한 대가로 크레모나의 영지들은 몰수되어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우스 군단병들에게 분배되었다.[4] 〈아이네이스〉 4권 615행, 김남우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