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북한의 정치인.2. 생애
1923년 5월 22일, 만주에서 태어났다. 1928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설이 돌았는데 북한에서 발표한 자료가 공개되면서 낭설로 밝혀졌다. 김일성의 빨치산 대원의 아들로 아버지는 국내진공작전 중에 국경경비대에게 발각되어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북한에서 2024년에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백범수 본인이 1933년에 왕우구유격구 아동단원으로 합류하여 싸운 빨치산 출신이다. 물론 부모도 모두 빨치산 출신이라고 한다. 김일성이 백범수를 어려서부터 총애하여 곁에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쳤다고 한다.한국에 알려지기로는 이후 김일성종합대학을 거쳐 1955년 조선로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에 배치되었다. 이후 1959년 책임지도원으로 승진, 1965년 조직지도부 부부장까지 올랐다고 하는데, 북한에서 공개한 이력에 따르면 1963년 당중앙위원회 지도원에 임명되었다.
1967년 10월, 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남한 쪽의 기록은 매우 파편적인데, 1970년대 국회 보고서에 따르면 1968년 9월에 황해남도 책임비서에 임명, 1970년 7월에 갑자기 중장계급을 달고 군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북한 자료에 따르면 1968년에 황해남도당 책임비서에 임명된 것은 사실인데 당시까지만 해도 농업 전문가도 아니어서 백범수 본인도 당황했다고 한다. 이는 김일성, 김정일이 아동단원 출신인 백범수를 신뢰하여 농업도인 황해남도를 장악하기 위해 파견한 것이라고 한다.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1973년에 조선인민군 3군단 정치위원으로 나타났다고 하는데 북한 자료에 따르면 1974년 정무원 사무국 당위원회 책임비서를 지냈고 1977년에 황해남도 책임비서에 다시 임명되었다.
1980년 10월, 6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1986년 12월, 8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88년 2월 2일, 황남 책임비서에서 해임되어 중앙위원회 농업부장으로 이동했다. 아무래도 문성술의 후임으로 보인다. 1989년 10월, 정무원 농업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90년 5월, 9기 최고인민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탈락하였으나 대의원에 선출, 정무원 농업위원장에도 유임되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1990년 10월 30일, 제1부위원장 김원진에게 농업위원장 자리를 물려주고 해임, 11월, 자신이 오랫동안 맡았던 황해남도 책임비서 겸 인민위원장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1991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2차 회의에서 중앙인민위원에 보선되었다.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을 지냈다. 사망 직전인 1995년 4월까지도 이런저런 행사를 다녔으나 몸이 안좋아졌는지 1995년 9월 15일 23시에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와 중앙인민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다년간 도당책임비서 겸 도인민위원회 위원장의 중책을 지니고 당대렬을 조직사상적으로 공고히 하며 인민대중을 당의 두리에 묶어세우고 인민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정력적으로 사업하였다. 동지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과 혁명위업에 끝없이 충실하였다."라고 좋게 말해주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고난의 행군과 심화조 사건으로 온 나라가 뒤집히는 상황 속에서 나름 잘 퇴장한 셈이 되었다. 이후 후임 책임비서로 김운기가 신속하게 임명되었다.
3. 참고문헌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