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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제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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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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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1. 앙주 파벌의 부상과 아라스 조약 (1432~1436)
1.1. 라니쉬르마른 공방전 (1432)1.2. 몽타르지 습격 (1433)1.3. 생세느리 포위전 (1433)1.4. 앙 포위전 (1434)1.5. 코탕탱 반란 (1434)1.6. 졔르베루아 전투 (1435)1.7. 아라스 조약 (1435)1.8. 파리 포위전 (1436)1.9. 칼레 포위전 (1436)
2. 오를레앙 칙령과 최후의 승자 (1437~1448)
2.1. 몽트뢰유 포위전 (1437)2.2. 부르봉 파벌 결성 (1438)2.3. 오를레앙 칙령 (1439)2.4. 프라그리 반란 (1440)2.5. 아르플뢰르 포위전 (1440)2.6. 퐁투아즈 포위전 (1441)2.7. 타르타 포위전 (1442)2.8. 디에프 포위전 (1443)2.9. 투르 조약 (1444)2.10. 루피 르 샤토 칙령 (1445)2.11. 노르망디 총독 교체 (1446)2.12. 메인 양도 실패 (1447)2.13. 메인 양도 (1448)
3. 보르도에서 시작해 보르도에서 끝나다 (1449~1453)
3.1. 푸제르 습격 (1449)3.2. 베르뇌유 포위전 (1449)3.3. 루앙 포위전 (1449)3.4. 발로뉴 포위전 (1450)3.5. 포미니 전투 (1450)3.6. 서퍽 공작 납치 살해 (1450)3.7. 잭 케이드의 난 (1450)3.8. 블랑크포르 전투 (1450)3.9. 보르도 포위전 (1451)3.10. 보르도 습격 (1452)3.11. 카스티용 전투 (1453)3.12. 보르도 포위전 (1453)
4. 후일담 (1454~)
4.1. 장미전쟁의 시작 (1455)4.2. 잔 다르크 명예회복 재판 (1456)4.3.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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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앙주 파벌의 부상과 아라스 조약 (1432~1436)

"짐과 그대에게 어떤 영예를 주겠는가, 이 기념비를 파괴하고, 베드퍼드의 유해를 땅에서 끄집어내어 짐의 아버지와 그대의 선조들이 모든 힘, 권력, 그리고 친구들을 동원해도 살아생전에 한 발짝도 물러서게 하지 못했던 그를 모독하는 것이? 그는 힘, 지혜, 정책으로 프랑스 왕국의 주요 영토들과 이 고귀하고 이름난 노르망디 공국을 전부 지켜냈다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의 영혼을 거두시길. 그리고 살아있을 때 우리 중 가장 거만한 자들도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을 그의 육신이 이제 편히 쉬게 놔두세."
에드워드 홀의 연대기

1.1. 라니쉬르마른 공방전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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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2년 2월 3일, 프랑스군 원수 장 드 부삭이 지휘하는 600여 명의 습격대가 루앙 성을 기습해 점령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의 신속한 반격으로 10일 만에 성채가 탈환되었고, 장 드 부삭과 일부 병사들은 탈출했지만 나머지는 대부분 전사하고 105명이 포로로 잡힌다.

2월 19일, 렌 조약으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알랑송 공작의 오랜 분쟁이 끝났다. 알랑송 공작은 1424년 베르뇌유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에 포로로 잡힌 뒤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브르타뉴 공작에게 토지를 저당 잡혔었는데, 풀려난 뒤 자기가 바가지를 썼다며 불만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 조약으로 브르타뉴 공작의 동생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샤를 7세의 화해도 이루어졌다. 이를 기점으로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의 권력은 쇠락하고 리슈몽의 동맹이자 샤를 7세의 장모인 앙주 공작부인 아라곤의 욜란다와 그녀의 아들인 앙주의 샤를이 궁정에서 점점 더 영향력 있는 인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로버트 윌러비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생세느리를 포위했다.

3월 23일, 프랑스군이 샤르트르를 습격해 점령했다. 이후 '오를레앙의 사생아' 장 드 뒤누아는 샤르트르를 군사 기지로 개발하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출격하는 습격대의 활약으로 보스 지방에서 파리 시로의 곡물 공급이 거의 차단되었다.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파리 시민들은 베드퍼드 공작에게 라니를 탈환해 마른 강의 수운을 확보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5월 1일 새벽, 솔즈베리 백작의 사생아 존 몬테규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생세느리를 구원하러 행군 중이던 프랑스군을 보몽 인근에서 기습해 전멸시켰다. 하지만 곧바로 강 반대편에서 행군 중이던 다른 프랑스군 부대가 강을 건너 잉글랜드군을 기습해 대승을 거두고 포로들을 모두 구출한다. 생세느리를 포위한 잉글랜드군도 이 소식을 듣고는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5월 중순, 잉글랜드군이 라니쉬르마른을 포위하고 도시 성벽을 공격했지만 치열한 전투 끝에 막대한 사상자만 남기고 격퇴당했다. 베드퍼드 공작은 직접 공격을 포기하고 도시를 굶겨 죽이기로 결정한다.

5월 24일, 장 드 부삭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라니 포위군 진영을 습격해 포병대에게 큰 피해를 입힌 뒤 도시 안으로 보급품을 전달했다.

얼마 뒤, 알랑송 공작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라글을 점령했다.

8월 10일, 장 드 부삭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라니 포위군과 대치하며 시선을 끄는 사이 100여 명의 분견대가 반대편에서 소떼와 보급수레를 끌고 도시로 향했다. 성문 근처에서 벌어진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망을 뚫고 보급품이 전달되었다. 베드퍼드 공작은 최후의 수단으로 다시 도시 성벽을 공격했지만, 곧 장 드 부삭이 다시 지원군을 이끌고 돌아오고 있다는 소식에 포위를 풀고 퇴각한다.

11월, 베드퍼드 공작의 아내인 부르고뉴의 안이 병사했다.

1.2. 몽타르지 습격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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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3년 2월, 칼레 주둔군이 임금채불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베드퍼드 공작은 밀린 임금을 지급하겠다며 반란군을 속여서 항복을 받아낸 뒤 반란 지도자 4명을 처형하고 전체 주둔군의 약 절반을 도시에서 추방한다.

4월, 베드퍼드 공작이 룩셈부르크의 자퀘타와 재혼했다. 이후 베드퍼드 공작은 전비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잉글랜드로 떠났다. 그동안 프랑스에 남은 잉글랜드 지휘관들은 부르고뉴 공작이 동맹을 파기하고 샤를 7세와 화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부르고뉴 공작의 영토를 방어하는 데 주력했다.

6월 27일, 잉글랜드군 분견대가 몽타르지를 기습해 점령했다. 곧 프랑스군이 도시를 탈환하지만, 성채를 공격하던 중 잉글랜드 지원군이 접근하자 도시 성벽을 파괴하고 퇴각한다.

같은 시기, 샤토랑동에 집결한 3000명 이상의 잉글랜드와 부르고뉴 연합군이 센강 상류로 진격했다. 아룬델 백작과 헌팅던 백작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은 2주 만에 노장, 브리, 트루아 등 수많은 도시를 탈환했고,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상스 인근까지 행군하며 거의 모든 거점을 탈환했다. 부르고뉴군 또한 뮤시, 아발롱, 샤블리, 피에르페르튀, 마이, 크라방 등 수십 곳의 도시와 요새들을 탈환한 뒤 원정을 마쳤다.

1.3. 생세느리 포위전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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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아룬델 백작은 알랑송과 메인 지방에서 곧바로 새로운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잉글랜드군은 9월에 봉물랭을, 11월에는 생세느리를 점령하고 성벽을 철저히 파괴한 뒤 시예르기욤을 포위했다.

9월 말, 파리 시에서 또다시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어 주모자 6명이 처형되었다.

12월,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라 이르가 센 강과 마른 강 이북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파리로 향하는 식량 수송대를 무차별적으로 공격하고 잉글랜드의 문장을 소지했거나 영어를 말하는 포로는 전부 처형하기 시작했다. 부르고뉴와 메인에서의 연합군의 성공적인 반격에도 불구하고 파리 시의 상황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1.4. 앙 포위전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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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년 1월, 건설노동자 출신 지휘관 샤를 데즈마레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솜강 하구의 요충지인 생발레리를 점령했다.

3월 12일, 시예르기욤이 결국 잉글랜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5월 말, 존 탈보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크레이를 포위했다.

7월 말,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콩피에뉴에 입성했다. 이에 탈보트는 크레이 포위를 풀고 보베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파리로 퇴각한다. 리슈몽은 곧장 북쪽으로 진격해 솜강의 요충지인 앙을 손쉽게 점령한다. 앙의 방어시설은 강력했지만 그동안의 무리한 군사작전으로 한계까지 감축된 주둔군은 결국 성벽을 방어하지 못했다.

8월 1일, 부르고뉴 공작의 사촌 느베르의 장이 지휘하는 부르고뉴군이 생발레리를 탈환했다. 그러나 앙이 하루만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인내심이 한계에 이른 부르고뉴 공작은 앙을 돌려받는 대가로 5만 살뤼를 배상금으로 제안하며, 샤를 7세에게 종전 협상을 전제로 한 휴전을 제안한다.

1.5. 코탕탱 반란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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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년 8월 초, 잉글랜드 병사들이 캉 남쪽의 작은 마을인 생피에르를 약탈하다가 주민들의 반격에 쫓겨났다. 곧 리처드 베너블스라는 잉글랜드인 향사가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와 보복으로 주민 10명을 죽였다. 이에 놀란 주변 마을 주민들이 빅이라는 이름의 마을로 모여들자, 베너블스와 병사들은 이들을 기습하고 도망치는 사람들까지 추격해 1000여 명을 죽였다.

10월경, 피에르 샹트피라는 이름의 향사와 그밖의 지역 귀족들이 이끄는 수만 명의 농민 반란군이 코탕탱 반도 전역에서 봉기했다. 반란군은 알랑송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들의 지휘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고, 공작은 이에 300명의 지원군을 보냈다.

11월, 베너블스와 부하들은 곧바로 캉의 바이이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베너블스는 베드퍼드 공작의 지시에 따라 특별히 교수척장분지형에 처해졌다.

1435년 1월, 코탕탱 반란군이 캉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르망에 머무르고 있었던 존 파스톨프가 1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군을 기습해 400명 이상을 죽였다. 사기가 떨어진 반란군은 다음날 대부분 탈영하고 5000여 명만 남았다. 이에 반란군은 캉 포위공격을 포기하고 아브랑슈로 향한다.

1월 말, 반란군은 결국 아브랑슈 인근에서 알랑송 공작과 합류했지만 그때까지 탈영으로 너무 많은 병력을 잃었다. 결국 반란군은 아브랑슈 포위공격도 포기하고 푸제르로 후퇴한 뒤 그곳에서 해산된다.

1.6. 졔르베루아 전투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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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말, 샤를 데즈마레가 지휘하는 프랑스군 300여명이 블랑슈타크 여울목을 건너 솜강 하구의 요충지 르 시를 점령했다. 이는 르 크로투아의 안전과 솜 강의 수운에 큰 위협이 되었다. 베드퍼드 공작은 아룬델 백작에게 즉시 도시를 탈환하라고 지시한다.

5월 8일, 구르네 성에 도착한 아룬델 백작은 작전을 변경해 제르베루아를 기습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 제르베루아로 향하는 도중에 라 이르가 이끄는 기병대에게 역으로 기습당했다. 아룬델 백작은 언덕 위로 후퇴해 방어 진영을 구축했으나, 프랑스군은 우선 도보로 공격해 언덕을 점령한 뒤 기병이 돌격해 마무리했다. 아룬델 백작은 포탄에 맞아 다리에 부상을 입은 채 포로로 잡혔고,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지만 한 달 뒤인 6월 12일 보베에서 사망한다.

5월 말, 잉글랜드군의 관심이 북쪽에서 활개를 치는 습격대에 집중된 사이, 장 드 뒤누아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샤르트르에서 출격해 베르뇌유와 우덩을 점령했다.

같은 시기, 부르고뉴 공작은 프랑스와의 평화 협상을 정당화하고 잉글랜드의 협상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웨스트민스터로 사절을 보냈다. 그는 트루아 조약이 오랜 내분과 전쟁을 해결하지 못한 것을 비판하고, 대부분의 프랑스인이 샤를 7세를 국왕으로 여기고 있다며 전쟁의 무익함을 강조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인들이 평화 협상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트루아 조약에서 맹세한 자신의 의무가 이행된 것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6월 1일 새벽, 400여 명의 프랑스군이 생드니를 기습해 점령했다. 이틀 뒤 라 이르와 포통 드 생트레유 등 쟁쟁한 지휘관들이 이끄는 부대들이 합류하면서 생드니 주둔군은 1500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이들은 매일 파리 시의 교외까지 습격을 나가며 도시 전체에 공황을 퍼트렸다.

1.7. 아라스 조약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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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5년 7월 31일, 프랑스, 잉글랜드, 부르고뉴의 대표들이 모두 아라스에 모였다. 처음으로 논의된 쟁점은 헨리 6세의 왕위 주장이었다. 프랑스 측은 왕위 주장 포기와 전쟁 피해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으며, 잉글랜드 측은 이를 거부하고 장기 휴전을 제안했다. 그렇게 한 달 동안 교착 상태가 계속되었다.

8월 24일, 파리 시에 집결한 잉글랜드군 5000여 명이 생드니를 포위했다. 이에 장 드 뒤누아가 샤르트르에서 4000여 명의 구원군을 이끌고 북상했지만 결국 센 강의 저지선을 돌파하지 못했다.

8월 말, 잉글랜드측은 프랑스 왕위에 대한 양보를 최종적으로 거부했다. 잉글랜드 대표단이 부르고뉴와의 동맹을 유지하는 데 주력하면서 트루아 조약의 타당성에 대한 논쟁이 이어졌다.

9월 6일 잉글랜드 대표단이 아라스를 떠났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은 샤를 7세와 화해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

9월 14일, 베드퍼드 공작이 사망했다.

9월 20일, 아라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샤를 7세는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의 아버지인 용맹공 장을 암살한 것을 영토로 배상하고, 아버지의 원수에게 신서를 하는 일을 면할 수 있도록 필리프의 평생 동안 부르고뉴 공국을 프랑스 국왕의 관할권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전쟁 중에 행해진 모든 행위에 대한 사면과 잉글랜드의 보복으로부터의 보호 등을 약속했다.

하지만 샤를 7세 자신, 그리고 그의 궁정을 지배하고 있는 브르타뉴인들과 앙주 파벌은 부르고뉴 공작을 실제로 용서하지 않았다. 암살자들을 처벌하고 몽트뢰유에 용맹공 장의 추모비를 세우겠다는 약속은 전혀 이행되지 않았으며 평생동안 약속된 자치권에도 빈번히 간섭해 공작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아라스 조약이 체결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르고뉴 공작의 고문들 중 선견지명이 있는 이들은 샤를 7세가 잉글랜드를 몰아내고 프랑스 영토를 모두 되찾은 뒤에는 부르고뉴가 다음 타겟이 될 것이라고 미리 경고했다.

9월 25일 새벽, 뒤누아가 지휘하는 생드니 구원군이 망트를 기습했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바로 그날 밤 묄랑을 기습해 점령한다. 생드니를 구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지만 프랑스군이 묄랑을 점령함으로써 파리 시의 봉쇄가 완성되었다.

10월 4일, 결국 잉글랜드군이 생드니를 탈환했다. 잉글랜드로서는 기념할 만한 승리였지만, 그 대가로 묄랑이 함락된 데다가 때마침 아라스 조약의 소식이 전해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10월 24일, 잉글랜드군이 묄랑을 포위했다.

11월 16일, 샤를 데즈마레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다에프를 점령했다. 이로써 잉글랜드는 노르망디의 통신과 상업 통제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이를 계기로 꼬 지방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나 상황이 더 악화되었다.

12월 27일, 프랑스군이 주민들의 호응으로 아르플뢰르를 점령했다. 아르플뢰르는 군사적, 상업적 요충지였기에 잉글랜드에 큰 타격이었다. 한편 노르망디 전역에 반란이 확산되어 잉글랜드의 통제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1.8. 파리 포위전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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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6년 1월 초, 꼬 반란군이 센강 하구의 요충지 탕카르빌을 점령했다. 하지만 꼬드벡에서 대패하고 반란군이 와해된다.

1436년 2월, 프랑스군이 뱅센과 퐁투아즈를 점령하면서 파리 시의 봉쇄망이 더 강하게 조였다. 파리가 쉽게 함락될 것이라고 생각한 샤를 7세와 그의 고문들은 파리 시민들에 대한 사면령을 미리 준비하고 리슈몽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군이 결국 묄랑 포위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3월 초, 부르고뉴 공작은 칼레를 공격하기 위해 플랑드르의 주요 도시들을 설득했다. 공작의 주장은 칼레 주둔군이 지역 안보를 위협하고 잉글랜드가 양모 시장을 독점하여 플랑드르의 이익을 해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플랑드르 도시들은 처음에는 양모 수입에 미칠 영향 때문에 주저했지만 결국 설득되었다. 헨트 시는 15000명의 민병대를 파견하리라 약속했고, 브뤼허와 이퍼르에서 추가로 15000명을 약속했다.

4월 13일, 리슈몽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파리에 입성했다. 파리 시민들은 샤를 7세에게 신속하게 충성을 맹세했다. 잉글랜드 주둔군은 바스티유 요새로 후퇴한 후 항복 협상을 시작해, 안전을 보장받고 파리에서 추방된다.

샤를 7세는 가장 먼저 잉글랜드 정부와 부르고뉴 공작에 의해 임명된 고위 관료들을 전부 교체했다. 하급 관료들도 1418년 이후 임명된 이들은 상당수가 해임되었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는 부르고뉴군의 칼레 포위를 저지하기 위해 선제공격에 나섰다. 에드먼드 보퍼트가 이끄는 습격대가 칼레에서 출격해 수많은 마을을 불태우고 수천 마리의 소를 약탈했으며 집결 장소로 향하는 민병대를 기습해 학살했다. 작전의 결과에 만족한 추밀원은 에드먼드 보퍼트를 가터 기사로 임명한다.

5월 15일, 샤를 7세는 부르주와 푸아티에의 정부를 파리로 이전할 준비를 하면서, 파리의 주요 행정 기관들의 운영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1.9. 칼레 포위전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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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9일, 부르고뉴군이 칼레를 포위했다. 부르고뉴군은 처음에 뉴넘브리지에 진을 쳤지만 잉글랜드군이 포격을 가하자 물러났다. 잉글랜드군은 포격과 수공으로 포위군의 기동과 포병대 배치를 방해했다. 도시를 점령하기 위한 시도는 대부분 효과가 없었으며 첫날에 단 한 번의 공격만 있었다.

7월 25일, 부르고뉴 함대가 칼레에 도착했다. 이들은 우선 벽돌과 돌로 가득 채운 배 6척을 항구의 입구에서 침몰시켜 항구를 봉쇄하려 했다. 하지만 칼레 주둔군이 대포로 반격을 가하자 허둥지둥하다가 썰물 때 물이 빠지는 위치에 배를 격침시켰고, 잉글랜드인들은 항구 입구를 막은 잔해들을 손쉽게 철거할 수 있었다. 마침 풍랑이 일기 시작했고, 글로스터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 함대가 샌드위치에서 곧 출항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부르고뉴 함대는 플랑드르로 철수한다.

7월 29일, 계속되는 작전 실패로 사기가 추락한 부르고뉴군은 결국 칼레 포위 공격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8월 중순, 원래는 칼레의 포위를 풀기 위해 소집된 1만명 이상의 잉글랜드군이 칼레에 집결했다. 반역죄를 저지른 부르고뉴 공작의 영지와 작위를 몰수한다는 포고문이 헨리 6세의 이름으로 선포된 뒤, 잉글랜드군이 무방비 상태인 플랑드르로 진격해 수많은 소도시와 농촌에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결국 잉글랜드와의 전쟁은 저지대에 대한 부르고뉴의 통제력을 약화시켰다. 홀란트와 브라반트는 잉글랜드산 직물 수입으로 이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고뉴 공작의 정책으로 손해만 입었다. 반면 직물 산업이 더 발달한 플랑드르 도시들은 잉글랜드산 양모 수입이 끊겨서 고통받았지만 직물 수입 금지는 지지했다. 하지만 칼레에서의 패배와 그 여파 때문에 이제 플랑드르의 주요 도시들마저 부르고뉴 공작에게 잉글랜드와 화해하라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9월, 헨트 시민들이 칼레에서 시행되었던 포위 전략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며 부르고뉴 공작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브뤼허에서는 시장 점령, 총파업, 그리고 조합장들에 의한 시민 정부 설립으로까지 상황이 악화되었다.

12월, 화려한 의식과 함께 부르주와 푸아티에의 프랑스 정부가 파리로 이전되었다.

2. 오를레앙 칙령과 최후의 승자 (1437~1448)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은 상기한 왕의 신하로서, 왕의 명령에 따라 그의 보호와 안전통행권 아래 외국으로 여행을 떠났고, 상기한 시간과 장소에서 상기한 공작이 그들에게 상기한 지역으로의 안전통행권에 대해 통지하고 공개적으로 보여주고 읽은 후, 상기한 왕과 왕국에 대한 반역자이자 적으로서 중범죄와 반역 혐의로 붙잡혔다. 그들은 그를 죄수로서 구금하고, 상기한 왕의 안전통행권을 무시하고, 그들이 상기한 왕을 알지 못하지만 잉글랜드의 왕권을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상기한 왕권은 곧 상기한 왕국의 공동체이며, 왕국의 공동체는 곧 왕국의 왕권이라고 말했다.
1450년 6월 30일, 서퍽 공작을 납치 살해한 선원들에 대한 대배심 기소장

2.1. 몽트뢰유 포위전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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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퍼드 공작의 후임으로 요크 공작 리처드가 임명되었다. 요크 공작이 루앙에서 행정 업무에 집중하는 동안, 존 탈보트가 노르망디의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1437년 2월, 탈보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퐁투아즈를 점령했다. 하지만 탕카르빌과 페캉 등 꼬 지방의 주요 거점들을 공략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실패했다.

4월, 베지에에서 열린 삼부회에서 랑그독 대표들은 3년 기한으로 상품세 징수를 승인했다. 하지만 기한이 지난 뒤에도 이 상품세는 정기적인 세금으로 정착된다.

8월, 프랑스는 몽타르지, 샤토랑동, 느무르, 몽트뢰유 등 파리 남쪽의 잉글랜드 거점들을 청소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전략적 요충지인 몽트뢰유의 공성에는 4500명 이상의 병력과 포병대가 투입되었다.

요크 공작의 몽트뢰유 구원 시도는 실패했고, 10월까지 샤토랑동, 느무르, 몽트뢰유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몽트뢰유에서 포로로 잡힌 잉글랜드 병사들은 전쟁 포로로 대우받았지만 프랑스 출신은 반역자로서 처형되었다. 이제 오직 몽타르지만이 이 지역에서 잉글랜드의 전초 기지로 남게 되었다. 겨울의 시작과 재정적 제약으로 모와 크레이를 목표로 한 다음 작전은 중단되었다.

요크 공작은 노르망디에서 정부와 군대의 규율을 어느 정도 재건했지만 절망적인 전황을 뒤집지는 못했다. 공작은 결국 11월에 임기 연장을 거부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간다.

2.2. 부르봉 파벌 결성 (1438)

파일:Charles_Ier_d'Orléans.jpg

1438년 12월, 샤를 7세는 그동안 귀족들에게 수여된 보조금을 대부분 취소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지위에 비해 재산이 적으며 왕실의 보조금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던 부르봉 공작이 이에 반발했고, 잔 다르크와 어울리던 시절부터 샤를 7세와 사사건건 대립해왔던 알랑송 공작, 그리고 이복형인 오를레앙 공작을 잉글랜드의 포로 신세에서 해방할 의무를 가진 장 드 뒤누아 등과 연합해 반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 부르봉 파벌은 우선 오를레앙 공작을 해방해 파벌로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에게 잉글랜드와의 평화 협상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잉글랜드측은 앙주 파벌이 가진 힘을 과대평가했고, 부르봉 파벌을 키워서 프랑스에 아르마냑과 부르고뉴의 내전을 재현할 수 있다는 희망회로를 돌리며 오를레앙 공작의 해방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글로스터 공작은 헨리 5세의 유언을 상기시키며 강하게 반대했다. 이때부터 헨리 보퍼트 추기경의 정치적 후계자인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과 글로스터 공작의 대립이 가시화되었다.

하지만 샤를 7세가 부르봉 파벌의 음모를 빠르게 간파하고 랑그독에서 군대를 소집하자 부르봉 파벌은 곧바로 항복했다. 결국 브르타뉴 공작 대신 부르고뉴 공작의 중재로 평화 협상이 진행된다.

2.3. 오를레앙 칙령 (1439)

파일:hyw1439.png

1439년 7월 20일,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5000명이 모를 포위했다.

9월 15일, 아성에서 농성하던 주둔군이 결국 항복하면서 모 시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는 부르고뉴와 평화 조약을 맺고 양모 수출을 재개했다. 하지만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평화 협상은 여전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11월 초, 리슈몽을 비롯한 여러 지휘관들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메인에서 공세를 개시해 생트슈잔을 비롯한 많은 거점을 탈환했다.

11월 2일, 오를레앙 칙령이 발표되었다. 이 칙령에서 샤를 7세는 군대에 규율을 확립하고 용병 도적단의 약탈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용병들과 직업군인을 국왕군에 통합하고 귀족들의 군권을 제한했다.

11월 30일, 프랑스군이 아브랑슈를 포위했다. 하지만 도싯 백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이끄는 구원군의 기습으로 포위군은 수많은 보급품과 대포를 잃고 패주한다.

2.4. 프라그리 반란 (1440)

파일:Illustration of the Praguerie, manuscript by Martial d'Auvergne, circa 1484.jpg

1440년 4월, 투렌과 니오르에서 부르봉 파벌의 주도로 '프라그리'의 반란이 일어났다. 프라그리란 프라하의 후스파 봉기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반란의 주된 목표는 샤를 7세의 궁정에서 앙주 파벌을 축출하는 것이었지만 직접적인 원인은 작년에 발표된 오를레앙 칙령이었다.

부르봉 파벌은 처음엔 샤를 7세를 납치하고 앙주 파벌의 지도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궁정의 보안이 엄중해서 곧 포기했다. 이후에는 왕세자 루이를 섭정으로 내세우고, 세금 감면을 약속하며 도시 세력을 포섭하고, 용병들을 동원해 국왕을 압박한다는 더 세련된 계획이 나왔다. 그러나 이 계획은 국왕에게 누설되었다.

샤를 7세와 리슈몽이 이끄는 브르타뉴군이 로슈에서 반란군에 맞서자 부르봉 공작은 오베르뉴로 도망쳤다. 이후 샤를 7세는 포병대를 보강한 뒤 생메상과 멜을 탈환했고, 이에 알랑송 공작과 왕세자 루이도 오베르뉴로 도망친다.

2.5. 아르플뢰르 포위전 (1440)

파일:hyw1440.png

1440년 7월 2일, 글로스터 공작과 보퍼트 파벌의 대립으로 적절한 인물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요크 공작이 다시 노르망디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요크 공작은 임무에 실패해도 문책받지 않을 권리를 요구한다.

한편 가스코뉴에서는 헌팅던 백작 존 홀랜드가 총독으로 임명되어 타르타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노르망디 방어가 더 시급하다는 정부의 판단에 따라 대부분의 군대가 노르망디로 재배치되었다. 헌팅던 백작도 부관인 토머스 램프스턴을 세네샬로 임명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간다.

8월 8일, 잉글랜드군이 아르플뢰르를 포위했다. 구원군과 함께 포위군 진영을 공격하거나 해상봉쇄를 뚫고 보급품을 전달하려는 시도는 모두 실패했고, 결국 10월 28일 잉글랜드가 아르플뢰르를 탈환한다. 하지만 프랑스군도 잉글랜드의 노르망디 방비가 약해진 틈을 노려 콩슈와 루비에를 점령했다.

8월 31일, 토머스 램프스턴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타르타를 포위했다.

10월, 오를레앙 공작 샤를이 오랜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었다.

2.6. 퐁투아즈 포위전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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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1년 1월, 토마스 램프스턴과 알브레 영주가 합의에 도달했다. 타르타와 그 주변 지역은 알브레의 네 번째 아들에게 주어지며, 이 아이는 헨리 6세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20년의 휴전이 제안되었고, 만약 샤를 7세가 3개월 이내에 구원군을 이끌고 타르타에 도착한다면 협정은 무효가 될 것이라는 조건이 붙었다. 이 협정은 가스코뉴 남부에서 잉글랜드의 통제를 강화할 위험이 있어 샤를 7세로서는 당장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샤를 7세는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것을 약속했고, 타르타의 항복 날짜는 1442년 6월 24일로 연기되었다.

5월, 샤를 7세가 직접 이끄는 프랑스군이 우아즈강에서 공세를 시작해 10월까지 크레이, 에브뢰, 퐁투아즈를 차례대로 탈환했다.

7월, 글로스터 공작의 아내인 앨리너 카범과 가신들이 헨리 6세의 죽음과 추밀원 의원들의 처형을 예측하기 위해 흑마술을 사용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가신들은 유죄 판결을 받은 뒤 화형당했고, 앨리너는 참회했지만 결혼이 무효화되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글로스터 공작 역시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에서 배제된다.

11월, 잉글랜드 추밀원은 노르망디를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칼레만이라도 지킬 방법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2.7. 타르타 포위전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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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2년 2월, 느베르에서 프랑스 대귀족들의 회의가 열렸다. 샤를 7세는 직접 참석하지 않고 상서인 르노 드 샤르트르를 대신 보냈다. 대귀족들은 국왕의 권력 독점을 비판하며 감세를 요구했지만, 샤를 7세는 귀족들의 우려를 일축하며 자신이 선택한 통치 방식과 조세 체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잉글랜드와의 평화 협상에 관해서는 주권을 양도할 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같은 시기, 존 탈보트가 7년 만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슈루즈베리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6월, 탈보트가 지휘하는 4000여 명의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 남동부로 공세를 시작했다. 하지만 뒤누아 등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반격에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난다.

같은 시기, 샤를 7세는 1만에서 2만 사이의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가스코뉴로 향했다. 이 원정의 목표는 타르타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보르도와 바욘을 점령하는 것이었다.

6월 24일 프랑스군이 타르타를 간단히 점령했다. 곧 생세베르를 점령하고 주둔군 수백과 주민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어서 아두르강의 요충지인 닥스까지 점령했다. 하지만 바욘은 너무 멀어서 보급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바욘 공격을 포기하고 아쟁으로 후퇴한 뒤 보르도로 향했다.

8월 24일, 잉글랜드군이 닥스를 기습해 탈환했다. 생세베르의 주민들이 이 소식을 듣고 프랑스 주둔군을 도시에서 쫓아냈다.

8월, 브르타뉴 공작 장 5세가 사망했다.

9월, 프랑스군이 가론 강 하류의 요충지 렁공을 점령했다. 하지만 잉글랜드군은 다른 요충지인 생마케르와 라 레올에서 여전히 수운을 통제하고 있었다.

10월 초, 잉글랜드군이 렁공을 탈환했다.

같은 시기, 프랑스군이 라 레올을 포위 공격해 도시를 점령하고 아성에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11월 2일,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디에프를 포위했다.

12월 7일, 2개월에 걸친 치열한 포위공격 끝에 아성의 주둔군이 항복하면서 프랑스군이 라 레올을 점령했다. 하지만 물자 부족과 혹독한 날씨에 시달린 프랑스 군대는 작전을 중단하고 철수한다.

그러나 이 원정으로 프랑스의 힘을 목격한 지역 귀족들은 잉글랜드를 버리고 샤를 7세에게 충성하기 시작했다. 지역의 유력 귀족인 알브레, 푸아 백작, 아르마냑 백작이 전향하면서 가스코뉴 남부에서 잉글랜드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2.8. 디에프 포위전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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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 4월, 보퍼트 추기경의 조카인 서머싯 백작 존 보퍼트가 서머싯 공작으로 승진하고 메인과 앙주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암울한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보퍼트 추기경이 제안한 대담한 작전을 위한 준비였다. 지금 잉글랜드가 처한 딜레마는 루앙과 보르도가 동시에 위협받고 있는데 둘 다 지키기에는 자원이 부족하고, 둘 중 하나를 포기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일한 해결책은 가스코뉴에 있는 프랑스 주력군을 앙주나 푸아투로 끌어들여 야전으로 격멸하고 휴전을 강요하는 것뿐이라는 논리였다. 상당히 그럴듯한 명분이었지만 당대의 많은 사람들은 원정을 계획한 진정한 목적이 추기경의 조카를 밀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믿었다.

8월 초, 서머싯 공작이 이끄는 원정군 4500명이 솔렌트에서 출항해 라 우그 해안에 상륙했다. 일주일 뒤, 아브랑슈에서 지원군이 합류해 병력이 6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 원정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요크 공작이 지키는 노르망디와 루앙에 가해지는 압력을 완화하는 것이었지만, 서머싯은 시작부터 요크 공작과 갈등을 빚었다. 서머싯 공작의 병사들은 노르망디 곳곳에서 총독의 허락도 없이 물자를 징발하며 행패를 부렸고, 이후 완성된 87페이지에 달하는 조사위원회 보고서는 서머싯의 군대가 저지른 무수한 갈취와 폭력 행위를 자세히 기록했다.

게다가 서머싯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샤를 7세와 가스코뉴 원정군이 원정을 중단하고 북부 프랑스로 돌아온 뒤였다. 노르망디의 방패가 되어 프랑스군을 루아르 이남으로 유인하겠다는 서머싯의 주장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8월 15일, 장 드 뒤누아와 왕세자 루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디에프를 포위한 잉글랜드군을 공격해 전멸시켰다.

9월 중순, 서머싯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갑자기 앙제 인근에 나타났다. 잉글랜드군은 대포도 없이 도시를 포위하고는 주변 지역을 약탈하며 시간을 보내다가 포위를 풀고 북서쪽으로 행군했다.

9월 말, 서머싯 공작은 푸앙세 인근에서 포병대와 합류하고 푸앙세를 포위 공격했다. 결국 프랑스군이 미끼를 물었고, 매튜 고프가 지휘하는 분견대 1500여 명이 샤토공티에에서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지휘하는 구원군을 기습해 전멸시켰다. 하지만 잉글랜드 지휘관들이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작은 규모의 전투에 불과했다.

같은 시기,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 1세 드 브르타뉴의 동생이자 헨리 6세의 어린 시절 친구인 질 드 브르타뉴가 헨리 6세에게 개인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2000노블의 연금을 수여받았다. 샤를 7세는 격노하며 프랑스에 있는 질의 재산을 반역죄로 몰수하고 브르타뉴 공작의 평화 협상 중재 제안을 거절했다.

10월 중순, 서머싯 공작은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이동해, 브르타뉴 국경의 성채 라 게르슈를 점령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이에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는 잉글랜드 정부에 강력히 항의했고, 당황한 추밀원 의원들은 브르타뉴 공작에게 사과하고 서머싯 공작에게 명령을 내려 배상하게 했다.

12월, 서머싯 공작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보몽을 점령한 뒤 원정을 마쳤다. 중요한 임무의 실패와 대중의 비난에 충격을 받은 서머싯 공작은 코페 성으로 은퇴했고, 얼마 뒤 정황상 자살로 추정되는 모습으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의 사후 동생이자 1436년 칼레 포위전과 1439년 아브랑슈 포위전에서 활약한 영웅인 에드먼드 보퍼트가 서머싯 공작위를 계승했다.

2.9. 투르 조약 (1444)

파일:St._Jakob_Tschachtlan.jpg

1444년 2월,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외교 대사로 임명되어 프랑스로 떠났다. 원정의 대실패와 이후에 일어난 사건들로 프랑스측에 큰 양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퍽 백작은 국내로 돌아온 이후에도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면책권과 책임을 분담할 수행원들을 요구했다.

4월 8일, 방돔에서 예비 협상이 진행되었다. 프랑스의 상서인 르노 드 샤르트르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해서 협상이 일주일 휴회되었다.

4월 16일, 대사들은 투르에서 다시 모였다. 잉글랜드측은 헨리 6세가 프랑스 왕위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노르망디와 가스코뉴와 퐁티외의 영토와 주권을 요구했다. 이에 프랑스측은 가스코뉴와 칼레와 긴 성만 양보할 수 있다고 답했다. 리처드 2세 시절부터 언제나 그랬듯 그렇게 종전 협상은 결렬되었고, 정략결혼이 포함된 장기 휴전 협상이 진행되었다.

프랑스측은 헨리 6세의 결혼 상대로 앙주의 르네의 딸이자 왕비의 조카인 마르그리트를 제안했다. 앙주의 르네는 1431년 뷜녜빌 전투에서 패배하고 부르고뉴 공작에게 많은 영토를 뜯긴 이후로는 이름뿐인 대귀족이었지만, 여전히 프랑스 궁정에서 앙주 파벌이 가진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고 있었던 잉글랜드 대사들은 만족했다.

5월 24일, 투르에서 앙주의 마르그리트와 헨리 6세의 대리 약혼식이 치러졌다. 나흘 뒤에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8월, 잉글랜드와 휴전하면서 잉여가 된 용병들과 직업군인들의 처분에 골머리를 썩히던 샤를 7세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공작이 스위스 연방을 상대로 일으킨 내전에 개입했다. 왕세자 루이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스위스로 원정을 떠났고, 무자비한 약탈과 파괴를 자행하며 스위스 영토를 행군한 끝에 바젤을 포위했다.

같은 시기, 샤를 7세는 프랑스 왕국에 편입되는 것을 거부하는 도시들을 정벌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로렌 지방으로 원정을 떠났다.

9월 중순, 바젤 포위 공격은 지지부진했고, 현지 민심을 고려하지 않고 잔혹행위를 벌이는 자칭 동맹군에 놀란 오스트리아군은 비협조적으로 굴었다. 이에 질린 프랑스군은 포위를 풀고 퇴각한 뒤 스위스 연방과 협상을 시작했다. 왕세자 루이는 무릎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은 채 후방으로 물러났다.

같은 시기, 샤를 7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메스를 포위했다.

2.10. 루피 르 샤토 칙령 (1445)

파일:men at arms 1440.jpg

1445년 2월, 샤를 7세는 5개월에 걸친 포위 끝에 메스 시민들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후 샤를 7세와 고문들은 용병 도적단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상비군인 칙령군(Compagnies d'ordonnance)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 칙령으로 선발된 직업군인과 용병들은 우선 '랑스'라 불리는 6인 분대로 조직되었다. 하나의 랑스는 전신 갑옷을 입은 맨앳암즈 하나, 가벼운 갑옷을 입은 승마궁수 둘, 도끼나 검으로 무장한 경기병 하나, 비전투원인 종자 두 명으로 구성되었다. 하나의 중대는 100개의 랑스로 구성되었고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임명한 대장에 의해 지휘되었다. 총 2000개의 랑스와 20개의 중대를 유지하고 급여를 지급하기로 결정되었다. 이들 칙령군은 정부나 지역 주민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도록 평시에는 왕국 전역에 흩어져 배치되고 필요할 때만 모여야 했다.

4월 22일, 햄프셔의 티치필드 수도원에서 헨리 6세와 마거릿 왕비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7월, 샤를 7세가 앙주 파벌을 일시에 숙청했다.

같은 시기, 브르타뉴 공작 프랑수아가 동생 질 드 브르타뉴와 말다툼을 벌인 끝에, 앞으로 자신의 허락 없이 잉글랜드인들과 어울리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냈다.

11월, 헨리 6세가 브르타뉴 공작에게 개인적인 서신을 보내 항의하고 궁수 20명을 질 드 브르타뉴의 호위로 파견했다.

2.11. 노르망디 총독 교체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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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 3월, 브르타뉴 공작이 시농에서 샤를 7세에게 신서를 했다. 이에 질 드 브르타뉴는 형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잉글랜드군 5000명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돌아오겠다는 협박을 내뱉는다.

6월, 샤를 7세의 명령으로 질 드 브르타뉴가 반역죄로 체포되었다.

8월 경, 메인을 프랑스에 양도하기로 약속했다는 사실이 대중에 알려졌다. 이에 프랑스와의 휴전에 반대하는 여론이 글로스터 공작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글로스터 공작은 1441년 흑마술 스캔들 이후로 더 이상 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지만 여전히 왕족이자 1436년 칼레 포위전의 영웅 중 하나로서 대중적인 명성이 있었다. 결국 보퍼트 정부는 글로스터 공작을 물리적으로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치체스터의 주교이자 유명한 법률가인 아담 몰린스는 루앙 정부의 회계를 검토한 뒤, 요크 공작의 무능함과 잘못된 통치를 노르망디의 쇠퇴와 잉글랜드군의 패배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는 노르망디에서 복무한 군인들을 데려와 요크 공작이 예산을 횡령했다는 증언을 하게 했다.

이에 요크 공작은 루앙 정부의 의원들을 자신의 증인으로 데려와 혐의를 반박하며, 몰린스가 증인들을 매수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서퍽 백작이 헨리 6세를 설득해 요크 공작을 노르망디 총독직에서 해임하고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했다.

2.12. 메인 양도 실패 (1447)

파일:Assassination of Duke Humphrey 1447, Jean de Wavrin.jpg

1447년 2월 18일, 글로스터 공작과 가신들이 반역 혐의로 체포되었다.

2월 23일, 노스게이트 외곽의 세인트세이비어 구호소에 구금돼 있었던 글로스터 공작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글로스터 공작은 이미 56세 노인이었고, 건강이 좋지 않았다. 체포의 충격이 심장마비를 유발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달변가이자 대중의 지지를 받는 인물인 글로스터 공작이 재판을 받기도 전에 급사한 것은 보퍼트 정부에 너무나 유리한 사건이었다. 대중의 눈에는 글로스터가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다. 정부는 상처가 없는 그의 시신을 공개적으로 전시했지만 소문은 그치지 않았다.

4월 11일, 보퍼트 추기경이 노환으로 사망했다. 정치적 후계자인 서퍽 백작이 정부를 장악했다.

9월 23일, 메인 총독의 대리인인 오스번 먼드포드는 메인을 프랑스에 양도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명령서가 제대로 된 형식으로 작성되지 않았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11월 1일, 르망 시의 대성당에서 공개 회의가 열렸다. 잉글랜드인 지주들은 메인을 프랑스에 양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토지와 재산에 대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측은 협정문에 그런 내용이 없었다고 항의했지만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협상이 결렬되었다. 보고를 받은 샤를 7세는 잉글랜드인들의 가식과 기만에 대해 불평하며, 메인 지방을 무력으로 점령하기 위한 군대를 소집했다.

2.13. 메인 양도 (1448)

파일:Compagnies d'ordonnance2.jpg

1448년 2월 13일, 장 드 뒤누아가 이끄는 프랑스군 7000여 명이 르망을 포위했다.

회담에서 잉글랜드인들은 그들이 헨리 6세로부터 받았다고 주장하는 서신을 낭독했다. 그 내용은 아담 몰린스가 오고 있다는 것과 몰린스가 샤를 7세와 이 문제를 논의할 때까지 항복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어서 그들은 헨리 6세가 메인 지방의 주권을 아직 포기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국왕은 단지 평화를 위해 주권을 포기하기로 동의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메인의 양도는 반드시 종전 협정이 맺어지는 것을 조건으로 해야했다.

3월 15일, 결국 잉글랜드인 지주들이 10년치 지대에 해당하는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바로 그날 저녁 잉글랜드 주둔군이 르망 시의 성문을 열었다.

4월 28일, 샤를 7세는 보병 상비군인 자유 궁수대를 창설한다는 칙령을 몽틸에서 발표했다.

이 칙령에서 샤를 7세는 종전 협정 없이 잉글랜드와의 휴전이 만료될 경우 노르망디 침공을 준비하기 위한 군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랑스의 모든 지역 공동체는 국왕군에 소집될 궁수들을 지명하고 장비를 지급해야 했다. 궁수들은 활 또는 쇠뇌, 장검과 단검, 강철 투구와 철판으로 보강된 두꺼운 면 갑옷을 갖춰야 하며 휴일마다 군사 기술을 연습해야 했다. 그 대가로 궁수들은 평시에는 세금을 면제받고 소집 시에는 봉급을 받을 것이었다.

6월, 서퍽 백작 윌리엄 드 라 폴이 프랑스와의 약속을 이행하고 휴전을 성사시킨 공로로 서퍽 공작으로 승진했다.

3. 보르도에서 시작해 보르도에서 끝나다 (1449~1453)

하지만 마침내 잉글랜드인들과 가스코뉴인들은 협상을 요청했고, 프랑스 국왕이 그들의 주권자이자 군주임을 인정하며, 앞으로 프랑스 왕실에 결코 반역하지 않을 것이며, 그의 진실하고 순종적인 신민들로 남으리라는 맹세를 했다. 이 협정은 1453년에 맺어졌다.
장 샤르티에, 샤를 7세의 정복

3.1. 푸제르 습격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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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9년 3월 24일, 아라곤 출신 용병이자 가터 기사단원인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브르타뉴 국경의 요충지 푸제르를 기습해 점령했다.

이는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이 계획하고 헨리 6세가 승인한 작전이었다. 서퍽 공작은 브르타뉴 공국에서 질 드 브르타뉴가 가진 영향력을 과대평가한 동시에 샤를 7세의 전쟁 의지를 과소평가했고, 브르타뉴 공작을 무력으로 압박해 질 드 브르타뉴를 석방시키면 브르타뉴 공국을 중립 세력으로 되돌릴 수 있으리라 믿었다. 헨리 6세는 아마도 그저 친구를 구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푸제르가 잉글랜드군에 의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샤를 7세는 곧바로 루앙으로 사절을 보내 강력히 항의했다. 하지만 서퍽 공작은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외국인이라는 점을 들며 잉글랜드 정부와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그리고 쉬리엔에게 직접 서신을 써서 만족감을 표현했다.

5월 중순, 프랑스군이 센강 하류의 요충지 퐁드라르슈를 기습해 점령했다. 이들은 스스로 브르타뉴 공작의 신하라고 주장하며 프랑스 정부와의 연관성을 부인했다. 이들은 이어서 제르베루아와 콩슈를 점령했고, 같은 시기 브르타뉴 국경에서도 프랑스군이 모르탱을 공격해 점령했다.

같은 시기, 잉글랜드군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해 던바와 덤프리스를 불태웠다. 동시에 스코틀랜드군도 노섬벌랜드에 침입해 안윅과 워크워스를 불태우는 것으로 보복했다.

6월 15일, 루비에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 대표들 간의 회담이 열렸다. 잉글랜드측은 푸제르 점령이 프랑수아 드 쉬리엔의 단독 행동이라는 입장을 고수했고, 7월 4일까지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자 프랑스 대표단은 7월 25일까지 약탈에 대한 보상을 하고 푸제르를 떠나라는 내용의 최후 통첩을 보낸다.

3.2. 베르뇌유 포위전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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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9년 7월 20일 프랑스군이 베르뇌유 시를 점령하고 성채를 포위 공격했다. 다음날 장 드 뒤누아가 수백 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베르뇌유에 도착했고, 31일 휴전 종료와 전쟁의 재개가 공식적으로 선포되면서 노르망디에서의 군사작전의 전권을 위임받는다.

7월 31일, 존 탈보트가 이끄는 1500여 명의 구원군이 베르뇌유 북쪽 10km에 있는 브레퇴유에 도착했다. 이에 뒤누아는 25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브레퇴유로 향했다. 탈보트는 북쪽으로 후퇴했고, 아르쿠르 남쪽에서 양측 군대가 대치했다. 하지만 탈보트는 야음을 틈타 다시 퇴각했다. 마침 외 백작과 생폴 백작이 지휘하는 또 다른 프랑스군이 루앙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 탈보트는 루앙으로 귀환한다.

8월 4일, 루앙 기습에 실패한 외 백작과 생폴 백작은 센강을 건너 뒤누아의 군대와 합류했다. 이들은 곧바로 리슬 강 하구의 요충지인 퐁 오데메르를 야간에 기습했지만 실패했고, 12일 다시 총공격을 가해 점령했다.

같은 시기, 루앙 성에서 서머싯 공작과 잉글랜드군 지휘관들은 회의 끝에 야전을 포기하고 노르망디의 주요 도시와 요새들로 흩어져 요충지를 지키기로 결정했다. 압도적인 숫자의 프랑스군에게 각개격파당할 뿐인 최악의 전략이었지만, 당장 농촌과 도시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었다.

8월 22일, 성채 주둔군이 항복하면서 베르뇌유가 완전히 점령되었다. 프랑스군이 접근하자 퐁레베크와 리시외의 주민들은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이로써 노르망디 동부와 서부의 잉글랜드 주둔지가 서로 단절되었다.

3.3. 루앙 포위전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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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9년 8월 말, 샤를 7세가 직접 이끄는 1만 이상의 프랑스군이 루비에에 집결했다. 뒤누아가 센강 이남에서 저항세력을 소탕하는 동안 외 백작과 생폴 백작이 루앙으로의 공세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9월 초, 아르튀르 드 리슈몽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몽생미셸에서 코탕탱 반도로 진군해 쿠탕스, 생로, 카랑탕, 발로뉴 등의 요충지를 2주 안에 모두 점령했다.

같은 시기, 알랑송 공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알랑송을 포위했다. 그러자 주민들이 잉글랜드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주둔군은 성채로 후퇴한 뒤 곧바로 항복 협상을 시작했다.

9월 중순, 뒤누아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2주 동안의 포위공격 끝에 아르쿠르를 점령했다. 알랑송 공작은 계속 북쪽으로 진격해 아르장탕과 엑슴을 점령했다. 알랑송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르장탕의 주민들은 프랑스군이 도착하자마자 봉기를 일으켜 주둔군을 성채로 몰아냈다.

10월 9일, 프랑스군이 루앙을 포위했다. 주민들은 서머싯 공작에게 항복하라고 요청했지만 공작은 거부했다.

10월 16일, 프랑스군은 매수된 주민들의 도움으로 루앙 동쪽 성문을 기습했지만 탈보트의 빠른 대응으로 실패했다.

10월 17일 아침, 루앙의 주민들은 회의 끝에 루앙 대주교 라울 루셀을 중심으로 유력 시민들로 구성된 대표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곧바로 서머싯 공작을 찾아가 항복을 요청하며, 시민군 1000명이 무기를 들고 봉기할 준비를 마쳤다고 주장했다. 이에 서머싯 공작은 시간을 벌기 위해 프랑스군과 항복 협상을 시작한다.

10월 18일, 협상에서 프랑스군 지휘관 장 드 뒤누아는 루앙 주민들에 대한 사면과 도시 특권 보장, 잉글랜드 주둔군의 안전한 퇴각을 약속하며 이틀의 시간을 주었다. 이 소식에 루앙 주민들은 환호했고, 주민들의 봉기를 두려워한 잉글랜드군은 성채로 후퇴할 준비를 미리 시작했다.

10월 19일 아침, 루앙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켜 도시 성문을 열고 잉글랜드군을 성채와 방어탑으로 몰아냈다.

10월 20일 아침, 서머싯 공작은 뒤누아에게 사절을 보내, 그가 제안했던 조건에 따라 항복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뒤누아는 잉글랜드군이 답변하기 전에 루앙 주민들이 성문을 열었으니 약속은 무효가 되었다며 거부했다.

10월 23일, 서머싯 공작은 뒤누아와 재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서머싯은 꼬드벡, 탕카르빌, 옹플뢰르, 아르크, 몽티비예 등 센강 하구의 요충지를 대부분 양도하고, 주둔군의 몸값으로 5만 살뤼(8300파운드)를 1년 안에 지불하며 그동안 존 탈보트와 헨리 레드퍼드 등 저명한 지휘관 8명을 인질로 보낸다는 굴욕적인 조건으로 항복에 동의한다.

같은 시기, 르 크로투아의 주둔군은 프랑스군이 도착하기 전에 부르고뉴 공작에게 항복했다. 롱니 성의 주둔군은 프랑스군에 항복했고, 쥐소르의 지휘관인 리처드 머버리 경은 포로로 잡힌 아들의 석방과 노르망디인인 아내의 재산권 보장을 조건으로 항복하고 프랑스에 귀화했으며 훗날 트루아의 바이이로 임명된다.

11월 5일, 이 모든 일의 시작인 프랑수아 드 쉬리엔이 1만 에퀴와 자신과 부하들의 안전 보장을 조건으로 브르타뉴 공작에게 항복했다.

12월 8일, 1만여 명의 프랑스군이 센강 하구의 마지막 요충지 아르플뢰르를 포위하고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이에 아르플뢰르 주둔군과 수비대장 토머스 에버링엄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2주 만에 항복한다.

3.4. 발로뉴 포위전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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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년 1월 26일, 서퍽 공작 윌리엄 드 라 폴이 의회에서 탄핵을 당했다. 그의 혐의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잉글랜드를 배신하고 앙주와 메인을 프랑스에 팔아넘긴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당한 법 절차와 정부 절차를 방해하거나 매수한 것이었다.

2월 18일, 서머싯 공작의 항복 협정을 인정하지 않고 프랑스군의 포위공격에 저항하던 옹플뢰르의 주둔군이 결국 항복했다. 이로써 노르망디 전역에서 잉글랜드가 보유한 항구는 코탕탱 반도의 셰르부르 하나만 남게 되었다.

3월 15일, 토머스 키리엘이 지휘하는 잉글랜드 지원군 3000명이 셰르부르에 상륙했다. 그의 임무는 캉으로 가서 서머싯 공작과 합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키리엘은 잉글랜드에서 노르망디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인 셰르부르를 지키기 위해 셰르부르의 방어에 필수적인 요충지인 발로뉴를 먼저 탈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서머싯 공작은 각개격파 당하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캉, 바이외, 비르의 주둔군 2000여 명을 매튜 고프의 지휘하에 발로뉴로 파견한다.

3월 17일, 서퍽 공작을 죽이라는 하원의 요구에 따르고 싶지 않았던 헨리 6세와 귀족들의 거부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끝에, 공작은 런던에 머무르고 있던 모든 성직자와 평신도 영주들이 모인 웨스트민스터궁의 내실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공작은 귀족 배심원 재판을 요구할 권리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왕의 자비에 맡겼다. 헨리 6세는 첫 번째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다고 선언했고, 두 번째 혐의에 대한 처벌로 그해 5월 1일을 기준으로 5년 동안 공작을 왕국에서 추방했다.

그날 밤 공작은 이전까지 구금되어 있었던 웨스트민스터궁의 탑에서 비밀리에 풀려났다. 헨리 6세는 그렇게 함으로써 공작이 분노한 런던 시민들의 보복을 피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여 명의 폭도들이 필즈의 성 자일스 대성당까지 그를 추격했고, 그곳에서도 결국 탈출에 성공했지만 하인들 중 일부가 붙잡히고 약탈당했다.

3.5. 포미니 전투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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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년 4월 10일, 키리엘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이 발로뉴를 점령했다. 그리고 이틀 뒤 서머싯 공작과 합류하기 위해 동쪽으로 향했다.

4월 14일, 클레르몽 백작이 지휘하는 프랑스군 분견대가 비르 강을 건너는 잉글랜드군을 공격했지만 격퇴당했다. 그날 오후, 리슈몽이 지휘하는 또다른 프랑스군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토머스 키리엘과 매튜 고프는 행군을 멈추고 포미니 마을에 진을 쳤다.

4월 15일 아침, 클레르몽 백작은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따라잡은 다음 리슈몽을 기다리면서 정오까지 대치를 유지했다. 정오 무렵 리슈몽의 군대가 남쪽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이를 본 클레르몽 백작은 대포 사격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매튜 고프는 궁수 500명과 소수의 맨앳암즈를 보내 포대를 점령하고 대포들을 탈취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전열 정비를 마친 리슈몽의 군대가 남쪽에서 진격해오기 시작했다.

이에 잉글랜드군은 포미니 마을로 후퇴해 전열을 정비하려 했지만, 피에르 드 브레제가 지휘하는 기병대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돌격해 대포들을 되찾았다. 동시에 리슈몽이 보낸 중기병대가 전열을 돌파하고 르 발 다리를 점령해 잉글랜드군의 전위와 후위를 단절시켰다.

곧이어 궁수들과 하마한 맨앳암즈들이 도보로 진격해오자 잉글랜드군의 전열은 단 몇 분만에 무너졌다. 매튜 고프는 수백 명의 맨앳암즈와 함께 말을 타고 탈출했지만 나머지 잉글랜드군은 포위당한 채 전부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3.6. 서퍽 공작 납치 살해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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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년 4월 30일, 서퍽 공작은 어린 아들에게 편지를 쓴 뒤 하인들과 함께 배 두 척과 보트 한 척을 타고 입스위치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공작의 배는 '탑의 니콜라스'라는 이름의 배에 의해 가로막혔다. 공작은 니콜라스호의 선원들에게 자신이 왕명에 따라 칼레로 파견되었다고 말했지만 그들은 그가 자신들의 선장과 이야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작은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믿고 배에 올랐지만, 니콜라스호의 선장과 선원들이 그를 반역자라 부르며 체포했고, 모의 재판 끝에 공작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 다음 날인 5월 2일, 서퍽 공작은 니콜라스호에서 작은 보트로 옮겨진 뒤 그곳에서 녹슨 검으로 참수형을 당했다.

그 후 서퍽 공작의 시신은 도버의 모래사장에 던져졌고 머리는 나무 말뚝 위에 전시되었다. 그의 하인들은 무사히 해안으로 옮겨졌지만 소지품을 모두 빼앗겼다. 켄트의 셰리프는 곧 이 살인 사건의 자세한 전말을 알게되었고, 즉시 런던으로 소식을 전했다.

5월 16일, 2주 동안의 포위공격 끝에 바이외의 주둔군이 항복했다.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한 주민들과 잉글랜드인 수백 명은 옷과 개인 물품을 제외한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잉글랜드로 추방당했다.

같은 시기, 브르타뉴군이 아브랑슈를 점령했다. 이후 생소뵈르와 브리케백의 주둔군은 브르타뉴군이 진군해오자 곧바로 항복한다.

3.7. 잭 케이드의 난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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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년 6월 초, 켄트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이들의 지도자는 잭 케이드라는 인물로, '존 모티머'라는 가명을 쓰고 스스로를 '켄트의 대장'이라고 불렀다.

6월 11일, 수천 명의 반란군이 블랙히스에 도착했다. 이들은 봉기에 참여한 전직 군인들의 조언에 따라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세우며 진영을 구축했다. 주교들과 런던 시 유력자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진영을 방문하자, 케이드는 메인과 노르망디를 프랑스에 팔아넘긴 서퍽 공작의 당파를 정부에서 모두 해임하고 글로스터 공작을 암살한 이들을 재판에 회부해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반역자 서퍽 공작과 그의 친구들에 의해 우리의 주권자로부터 추방된 고귀하고 강력한 왕족 요크 공작'을 국왕의 고문으로 복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6월 18일, 헨리 6세는 포병대가 포함된 군대를 이끌고 블랙히스에 도착했다. 하지만 많은 병사들이 반란군의 주장에 동조하며 진압을 거부하자 겁을 먹은 왕과 귀족들은 케닐워스 성으로 도망쳤다. 이후 반란은 잉글랜드 남부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윌트셔에서는 솔즈베리 주교가 폭도들에게 맞아 죽는 사건까지 발생한다.

6월 30일, 캉의 주둔군이 약 한 달 간의 포위공격 끝에 항복했다. 바이외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한 주민들과 잉글랜드인들은 모든 재산을 압류당하고 추방되었다.

같은 시기, 니콜라스호의 선원 리처드 레너드와 토머스 스미스가 서퍽 공작 살해에 가담한 혐의로 턴브리지에서 기소되었다.

두 사람 모두 서퍽 공작 납치와 살해에 가담한 혐의를 받았으며, 레너드는 사형을 집행한 당사자로도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살인죄뿐만 아니라,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무시하고 조롱한 혐의와, 헨리 6세가 왕국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반역자를 처벌하지 못했다고 비난한 혐의로 반역죄로도 기소되었다.

서퍽 공작이 국왕의 안전통행증을 보여주었을 때 선원들은 "우리는 네가 말한 왕(the king)을 알지 못하지만 잉글랜드의 왕권(the crown of England)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잉글랜드의 왕권은 곧 잉글랜드의 왕국 공동체(community of the realm)고 왕국 공동체가 곧 왕권이다." 라고 주장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대배심에서 기소장이 승인되었고, 스미스와 레너드는 자신들이 왕국을 위해 헌신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다음날인 7월 1일, 스미스에게 턴브리지에서 재판을 받으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이후 국왕법정 기록에서는 두 사람에 대한 그 이상의 추가적인 절차들을 다룬 내용을 찾을 수 없다.

7월 3일, 잭 케이드와 반란군이 런던에 입성했다. 반란군은 길드홀을 점거한 뒤 보퍼트와 서퍽 공작의 파벌을 대상으로 한 모의 재판을 벌였다.

7월 5일 저녁, 반란군이 안전하게 밤을 보내기 위해 사우스워크에 구축된 진영으로 철수한 사이, 런던 시의 유력자들이 이끄는 자경대가 왕실 군대와 힘을 합쳐 런던 다리를 탈환했다. 이후 반란군은 국왕의 사면 약속을 믿고 해산되었다. 하지만 잭 케이드의 사면은 가명으로 발급되었다는 이유로 무시되었고, 케이드는 체포 과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사망한다.

7월 21일, 2주 동안의 포위공격 끝에 주둔군이 항복하면서 팔레즈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8월 초, 동프롱 주둔군이 항복했다.

8월 12일, 셰르부르의 수비대장 토머스 가워는 포로로 잡힌 아들을 석방하고 잉글랜드인들이 모든 재산을 팔거나 가지고 떠날 수 있게 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로써 잉글랜드는 노르망디에서 모든 주요 거점을 상실했다.

3.8. 블랑크포르 전투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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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년 9월 초, 샤를 7세는 투르에서 귀족 회의를 소집해 앞으로의 전략을 논의했다. 당장 가스코뉴로 대규모 군대를 끌고 갔다가는 잉글랜드인들이 다시 노르망디를 공격해서 교두보를 마련할 수도 있으니, 가스코뉴 북부의 방비를 시험하기 위해 우선 3000명 정도의 소규모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되었다.

9월 중순, 프랑스군이 도르도뉴강의 수운을 통제하는 요충지 베르주락을 포위했다. 하지만 포대를 구축하자 마자 방어군이 항복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장삭까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진격한 뒤 사방으로 흩어져 무방비 상태인 거점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11월 1일, 알브레 영주의 어린 아들 아르노가 지휘하는 500여 명의 프랑스군 분견대가 바자를 점령한 뒤 가론강을 따라 보르도 인근까지 진격했다. 이에 보르도 시장인 가디퍼 숏호즈가 수천 명의 민병대를 이끌고 출격했지만 참패했고, 전투에서 귀환한 패잔병들과 전사자를 실은 수레의 행렬이 도시에 공황을 퍼트렸다. 이후 아르노는 샤를 7세에게 군사 1000명만 더 있으면 가스코뉴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3.9. 보르도 포위전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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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퍼트 파벌과 요크 공작의 대립은 과거 발루아 왕조를 멸망 직전으로 몰아넣은 오를레앙-아르마냑 파벌과 부르고뉴 파벌의 대립을 여러모로 닮아 있었다. 국왕은 정신 질환으로 무력한 상태이며, 한 파벌은 정부를 장악했지만 군사적 실패로 불명예를 안은 반면 다른 파벌은 중앙 권력에서 소외됐지만 군사적 성공과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는 순교자로서의 이미지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런데 요크 공작 리처드는 저지른 실수마저 부르고뉴의 용맹공 장과 똑같았다.

1451년 1월, 요크 공작의 가신인 스티븐 크리스마스는 헨리 6세가 잭 케이드의 난의 복수로 켄트를 초토화할 계획이라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를 계기로 켄트에서 또다시 봉기가 일어났다. 서머싯 공작과 존 탈보트는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했고, 수백 명이 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소수의 대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계층이 요크 공작에게 지지를 표했었지만 반년 만에 일어난 두 번째 민중 봉기는 젠트리와 도시 유력자들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요크 파벌은 계급 투쟁으로 분열되었다.

4월 28일, 장 드 뒤누아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이 몽귀용을 포위했다. 일주일 뒤 주둔군이 성을 버리고 탈출했다.

5월 15일, 뒤누아는 계속 진격해, 블레 인근에서 미리 도착해 있었던 앙주의 샤를과 합류했다. 동시에 프랑스 함대가 도착해 잉글랜드 함대를 격퇴하고 해안을 봉쇄했다.

5월 22일, 블레의 도시 성벽은 일주일 동안 계속된 포격으로 무너졌다. 그날 밤 프랑스군이 공격을 개시해 도시를 점령했고, 주둔군은 성채로 후퇴한 뒤 다음날 아침 항복한다.

5월 말, 45년 전 오를레앙 공작 루이를 좌절시켰던 부르 시는 포대가 설치된 것을 보고 바로 항복했다. 뒤누아는 부르에 지휘본부를 세운 뒤 아무런 저항 없이 리부른과 생테밀리옹을 점령한다.

같은 시기, 가론 강변에서는 아르마냑 백작이 뒤라와 소베르트를 점령한 뒤 생마케르와 뤼용을 포위했다. 가스코뉴 남부에서는 푸아 백작과 알브레 영주가 닥스를 포위했다.

6월 12일, 저항 의지를 잃은 보르도 주민들이 뒤누아 백작에게 항복했다.

8월 6일, 포병대가 포함된 프랑스군 5000여 명이 바욘을 포위했다.

8월 20일, 결국 바욘 시가 항복하면서 가스코뉴 전체가 정복되었다.

3.10. 보르도 습격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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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2년 2월, 요크 공작 리처드는 정부를 장악한 서머싯 공작과 보퍼트 파벌의 부패와 무능함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런던 시민들은 요크 공작을 도시로 들여보내지 말라는 왕명을 충실히 따랐다. 서퍽 공작을 처형하고 요크 공작을 정부로 보내라며 열광하던 2년 전과는 많이 달라진 분위기였다.

3월 초, 켄트에서 지지세력을 모으고 돌아온 요크 공작이 웰링에서 국왕군과 대치했다. 협상장에서 요크 공작은 서머싯 공작이 최근 칼레의 수비대장으로 임명된 것을 거론하며, 서머싯의 진짜 목적은 노르망디를 프랑스에 팔았듯이 칼레를 부르고뉴에 파는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요크 공작이 기대했던 것 만큼의 호응은 없었고, 오히려 공작 자신이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굴욕적인 공개 선서를 한 다음 사면을 받아야 했다.

게다가 5월에는 프랑스의 동맹인 피렌체와 베네치아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고 샤를 7세가 이탈리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요크 공작이 심판의 날처럼 예언해 온 프랑스의 칼레 침공 위협 자체가 흐지부지되었다.

10월 20일, 존 탈보트가 지휘하는 4000여 명의 잉글랜드군이 보르도 북쪽의 메독 해안에 상륙했다. 근처에 머물고 있던 클레르몽 백작은 급히 강을 건너 부르로 도망쳤다.

10월 21일 밤, 잉글랜드군이 주민들의 호응으로 보르도를 탈환했다.

10월 25일, 탈보트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가론 강을 따라 진격해 11월 4일까지 뤼용, 생마케르, 렁공을 탈환했다.

12월, 저베이스 클린턴이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분견대 400여 명이 도르도뉴 강을 따라 진격해 리부른, 생테밀리용, 카스티용을 탈환했다.

3.11. 카스티용 전투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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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4월 말, 탈보트의 아들인 리슬 자작 존이 지휘하는 지원군 2400명이 보르도에 도착했다.

6월 초, 프랑스군 원수 앙드레 드 라발과 필리프 드 퀼랑이 지휘하는 7000여 명이 도르도뉴 강에서, 푸아 백작과 아르마냑 백작이 이끄는 3000명이 남쪽에서, 클레르몽 백작의 2000명이 메독에서 가스코뉴 침공을 개시했다. 동시에 프랑스 함대가 지롱드를 봉쇄하기 위해 라 로셸에 집결했다.

6월 21일, 탈보트가 메독에서 클레르몽 백작의 군대와 대치했지만 곧 전투를 포기하고 보르도로 후퇴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기병대의 추격을 받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7월 14일, 클레르몽 백작과 푸아 백작의 군대가 카스텔노 드 메독 성을 포위했다. 같은 날 앙드레 드 라발과 필리프 드 퀼랑의 군대는 도르도뉴 강의 요충지 카스티용을 포위했다.

7월 16일 아침, 탈보트가 지휘하는 잉글랜드군 7000여 명이 카스티용의 포위를 풀기 위해 진군했다. 탈보트는 그날 밤 카스티용 포위군 진영으로 정찰병을 보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들은 포위군 진영이 이미 참호와 목책으로 철저히 요새화돼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7월 17일 아침, 잉글랜드군이 카스티용에 도착했다. 이를 본 프랑스 병사들이 목책 안으로 후퇴하기 시작했지만 건조한 날씨에 피어오른 먼지가 시야를 제한했다. 기병 1000기를 직접 이끌고 도망치는 프랑스인들을 추격하던 탈보트는 목책 바로 앞까지 와서야 그런 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탈보트의 부관인 토머스 에버링엄은 후퇴해서 보병대와 합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기습의 이점을 잃고 싶지 않았던 탈보트는 곧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고, 잉글랜드 기병들은 말에서 내린 뒤 야전 요새의 입구로 진격했다. 한 시간 동안의 치열한 백병전 끝에 브르타뉴 기병 300기가 출격해 후방을 치자 잉글랜드군은 무너지기 시작했고, 탈보트 자신과 아들인 리슬 자작이 혼전 도중 전사했다.

3.12. 보르도 포위전 (1453)

파일:hyw1453.png

7월 20일, 사흘 동안 계속된 포격 끝에 카스티용 주둔군이 항복했다. 리부른과 생테밀리옹의 주둔군은 카스티용 전투의 결과를 듣고 보르도로 후퇴했고, 카스텔노 드 메독의 주둔군은 클레르몽 백작에게 항복했다.

이후 클레르몽 백작의 군대가 블랑크포르를, 라발과 퀼랑의 군대가 프롱삭을 포위 공격하는 동안 푸아 백작은 생마케르, 렁공, 빌랑도를 차례대로 점령한 뒤 카딜락을 포위했다. 앙굴렘에 머무르고 있었던 샤를 7세도 보르도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한편 보르도 삼부회는 결사항전을 외치며 수비대장 로저 카모이스 경을 가스코뉴 총독으로 선출했다.

8월 1일, 프랑스군이 보르도를 포위했다.

9월 28일, 치열한 전투 끝에 카딜락이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생존한 주둔군은 모두 포로로 잡혔고 수비대장은 즉시 처형되었다.

10월 19일, 반란 주동자 20명을 제외한 모든 주민의 반역죄가 사면되며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는 가스코뉴인들은 망명이 허용되는 조건으로 결국 보르도 시가 항복했다.

다음날인 10월 20일, 보르도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에 잉글랜드의 마지막 거점인 뤼용과 블랑크포르의 주둔군이 항복했다. 116년 전 프랑스 왕이 가스코뉴 영지 몰수를 선언하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된 전쟁은 결국 프랑스군에 의해 보르도가 함락되면서 끝났다.

4. 후일담 (1454~)

여러분들이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고, 기독교 세계 전체에서 흔히 말하고 전해지는 것처럼, 이 왕국의 주권자가 프랑스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을 지배하는 동안에 세상으로부터 잉글랜드 국민들이 얼마나 큰 영토, 존경, 명예, 그리고 용기를 누렸는지, 그리고 그것들을 잃었을 때, 특히 서머싯 공작이 그곳의 지휘와 책임을 맡았을 때, 어떻게 잉글랜드 국민들이 경멸, 상업의 손실, 명예의 손상, 그리고 악명을 짊어졌는지를 알 것입니다. 이러한 손실은 왕의 적들이 가스코뉴와 기옌을 정복하고 가지도록 부추기고 장려했지요. 이제 그들은 칼레를 포위하기 위해 매일 진군하고 있으며, 이렇게 커다란 힘을 가지고 그 땅으로 들어오려 합니다.
1452년 2월, 요크 공작 리처드가 런던으로 진격하면서 발표한 성명서

4.1. 장미전쟁의 시작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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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잔 다르크 명예회복 재판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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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노르망디와 아키텐의 영유권 포기 (1475)

노르망디와 아키텐 영지의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잉글랜드는 더 이상 프랑스에 전쟁을 걸 명분을 상실했고, 이것이 백년 전쟁의 끝이었다. 샤를 7세는 나라를 구원한 승리왕으로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은 칼레는 1558년까지 잉글랜드의 영토로 남아 있었다. 칼레는 잉글랜드산 양모를 집산하는 항구로도 기능하는 노른자 땅이었지만, 이후 잉글랜드의 메리 1세가 남편 펠리페 2세를 도와 함께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가 이 지역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되찾지 못하면서 잉글랜드는 진짜로 섬나라가 되었다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을 계기로 지브롤터를 차지하면서 유럽 개입 교두보를 다시 확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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