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왕국군의 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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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Regia Marina | - | |
공군 Regia Aeronautica | 1933 이탈로 발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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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9246><colcolor=#FFF> 초대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 이탈로 발보 Italo Balbo | |
출생 | 1896년 6월 5일 |
이탈리아 왕국 에밀리아로마냐 페라라 | |
사망 | 1940년 6월 28일 (향년 44세) |
이탈리아령 리비아 토브룩 | |
국적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
직업 | 군인 |
최종 계급 | 원수 |
경력 |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 |
1934년 1월 1일 ~ 1940년 6월 28일 |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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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이자 공군 장관. 이탈리아 공군의 아버지로 불린다.[1]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이탈리아 왕국의 페라라에서 출생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20살의 나이로 육군 소위로 참전하여 알프스 산맥의 전선에서 싸웠으며, 그 공으로 무공훈장을 수여받는다. 그 후 대위로 제대, 평범한 은행원으로 살아가던 중 파시즘에 빠져 무솔리니의 국가 파시스트당(이하 파시스트당)에 가입하게 된다.2.2. 파시스트당에서의 활동
파시스트당 가입 초기에는 파시스트 지역구 비서로 일하다가 그 후 정치깡패 조직 첼리바노를 이끌며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주주의자 등 다른 반대파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으며 수많은 폭동에 참가한다. 그러던 중 베니토 무솔리니는 혼란한 정국에 호응해 1922년 10월 27일 로마 진군이란 도박을 감행한다. 이때 발보는 다른 파시스트들과 로마 진군을 지휘한다. 그런데 당시 사회주의에 반감을 품고 있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의 행군을 진압할 것이라는 많은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무솔리니를 총리로 임명하면서 무솔리니 내각이 수립되었고, 승패가 불확실했던 도박은 대성공했다. 이전까지는 그저 악명 높은 정치 깡패일 뿐이었던 발보의 삶은 이때부터 180도 바뀌게 된다.무솔리니 집권 후 1924년, 발보는 파시스트 시민군 사령관, 1925년에는 경제부 차관을 맡았다. 그러다 1928년에 '육군항공대'로서 육군에 묶여 있던 이탈리아 공군이 독립하게 되자, 발보는 공군 사령관을 맡게 되고, 1929년에는 유럽 최연소로 공군 장관의 자리에 오른다. 본래 1차 세계 대전에도 육군으로 참가할 만큼 공군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곧 자신이 스스로 조종사가 될 만큼 공군과의 사랑에 빠진다.
2.3. 두 번의 대서양 횡단
공군 장관에 오른 이탈로 발보는 이탈리아 공군의 힘을 세계에 과시하기 위해 1930년 12월 17일부터 1931년 1월 15일에 걸쳐 쌍동수상기인 사보이아 마르케티 S.55 비행정을 거느리고 이탈리아에서 리우데자네이루까지 비행을 한다. 이 일로 발보의 인기는 상승, 이탈리아 공군 역시 선망의 대상이 된다.하지만 발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또 다시 한번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로마에서 출발해 시카고까지 약 19000km에 달하는 거리를, 1933년 7월 1일부터 8월 12일까지 43일에 걸쳐 비행하게 된다. 이 때 당시 시카고에는 세계박람회가 열리고 있었고, 발보가 이끄는 24기의 비행기가 시카고 상공에 도착하자 미국 시민들은 열렬한 환영으로 맞아준다. 발보는 뉴욕에서 카 퍼레이드를 벌이고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식사도 같이 하게 된다. 이 때 당시 뉴욕 시장인 존 오브라이언은 "당신의 업적은 콜럼버스나 마르코니에 버금간다."며 발보를 칭송하였고 그를 찬사하기 위해 시카고 7번 가의 이름을 '이탈로 발보 가'라고 명명했다.[2] 발보는 이 일로 전 국민적 사랑을 넘어 전 세계의 유명인사가 된다.
뉴욕에서 카 퍼레이드 중인 발보 |
그는 뛰어난 비행사이고 위대한 혁명가임과 동시에 나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무솔리니, 발보의 귀국 환영 만찬에서
무솔리니, 발보의 귀국 환영 만찬에서
2.4. 무솔리니와의 갈등
무솔리니와 함께 승마를 하는 장면 무솔리니 앞에 있는 흑인 경호원 두명이 들고 있는 건 이탈리아 파시즘의 상징 파스케스 |
무솔리니와 발보는 집권 초기만 해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으나 이후 무솔리니는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발보의 날이 가면 갈수록 치솟는 인기에 발보를 점차 시기하고 있었으며, 그를 국민의 관심 밖으로 두기 위해 1934년 이탈리아령 리비아 총독으로 좌천시킨다. 사실상 사막으로의 유배나 다름없는 처사였고 발보가 정신적 지주였던 공군은 강력하게 반발한다. 하지만 발보는 "나는 명령에 복종할 따름이다, 나는 군인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군말 없이 리비아 총독에 부임한다.
리비아 총독으로 부임하면서, 점점 시대에 뒤떨어지던 이탈리아 공군을 안타까워하던 발보는 무솔리니가 친독일 정책을 펴며 독일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것을 보며 무솔리니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즉, 개인적으로도 서로 멀어졌던 두 사람은 정치적/외교적으로 있어서도 이념이 서로 달라진 것이다.
2.5. 제2차 세계 대전과 최후
1939년 이탈리아가 대놓고 독일을 지원하고 나서자, 화난 발보는 무솔리니에게 "이렇게 비굴한 동맹을 맺다니. 당신은 독일의 구두만 닦고 말 셈인가!" 등의 강도 높은 비난을 날렸고[3] 무솔리니는 이에 발보에게 "배만 부른 민주주의의 돼지"라고 맞받아쳤다.[4] 결국 무솔리니는 국민들의 인기가 상당했던 발보를 제거할 결심까지 내린다. 발보도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서 부하들에게 "너무 늦기 전에 무솔리니를 처단하는 것이 좋다." 라고 하였고 아돌프 히틀러에 대해서도 "히틀러는 나쁜 결말을 맞이할 거다." 라고 말했다.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상황을 지켜보던 무솔리니는 독일이 전격전으로 프랑스를 순식간에 점령하는 것을 보자 이에 발맞춰 연합군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에 발보는 북아프리카에서 잔뼈가 굵은 영국군에게 이탈리아군이 상대도 안 될거라는 사실을 직감하지만 이탈리아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기로 결심하고 북아프리카에 주둔중인 이탈리아군의 정비에 들어간다.
격추된 비행기의 잔해 |
발보의 이런 허망한 죽음을 두고 무솔리니의 암살설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발보의 유족들은 무솔리니가 계획한 암살이라고 굳게 믿었다. 무솔리니가 토브룩을 방문했을 때 발보의 사망장소에 가보는 것을 거부한 것도 암살설이 널리 퍼진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단순한 오인사격이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발보의 유해는 1940년 7월 4일 트리폴리 교외에서 화장되었다.
3. 여담
이탈로 발보의 사후 그의 자리였던 리비아에 주둔해있는 이탈리아군 총사령관은 로돌포 그라치아니가 이어받았다. 그리고 리비아에는 헬게이트가 열렸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일각에서 그의 사망 배후가 무솔리니가 아닌 이탈리아 왕립 해군이라 주장한다. 발보가 평생 함재기와 항공모함 문제로 인해 해군과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고, 발보가 탄 항공기를 격추한 주체가 바로 해군 소속 순양함이었다는 점에서 나름의 신빙성은 있으나 학계의 정설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발보를 싫어하던 해군과 마침 그가 눈엣가시였던 무솔리니의 밀약으로 발보가 암살되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사실 해군이 아무리 발보가 싫었어도 만약 발보가 무솔리니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면 암살은 꿈에도 못 꾸었을 테니, 어떤 식으로든 이 음모론은 그의 암살을 무솔리니가 동조 혹은 방관했다는 주장을 같이 편다.
위에 언급된 어이없는 죽음과 장거리 비행에 대한 업적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생전의 펼친 공군 정책으로 인해 괴링 양반 못지 않게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공군의 전력과 군수체계 및 해군의 항모 계획에 지대한 악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마타판곶 해전도 결국 제대로 된 항공엄호가 없어서 일어난 참사고, 몰타 항공전 등의 수송선단 손실도 항공엄호의 부재로 상당했다. 결국 이탈리아 왕립 해군은 발보가 사망하고 나서야 아퀼라와 스파르비에로를 필두로 다시 항공모함 건조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으나, 이마저도 패전과 전황 악화가 겹쳐 끝내 실패한다.
동맹의 공군 총수이자 동시기에 활동했던 헤르만 괴링과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다. 발보와 헤르망 괴링 둘 다 공군의 총수였으며, 초기부터 파시스트 세력에 가담하여 자국에 파시스트당이 성향의 당이 들어서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사망 직전에는 자국의 국가원수와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5] 또한 두 사람 모두 공군 총수 이전에 자신만의 방식으로 항공 관련 경력을 쌓았으며,[6] 해군의 함재기 보유에 매우 적대적이었던 것까지 비슷하다.
다만, 괴링은 전쟁 내내 공군 관련 일은 집어치우고 모르핀에만 의존하며 살았던 데 반해, 발보는 너무 일찍 사망하긴 했지만 사망 직전까지 최선을 다해 영국과의 전쟁을 준비하고 전선 시찰을 나가는 등, 두 사람이 전쟁에 임하는 자세는 완벽하게 반대였다고 평가받는다.
4. 대중매체
Hearts of Iron IV에서는 이탈리아의 레벨 1 장군으로 등장했으며, By Blood Alone DLC 이후 레벨 1 원수로 승격되었다. R56 모드나 극고증 모드인 토탈워 모드에서는 '공군과의 연줄' 특성을 추가해주었다. 성능은 눈물 나올 정도로 구리다. 만약 무솔리니를 축출하고 파시즘 대평의회 루트를 선택하면 지도자로 만들 수 있다. 항공영웅이란 특성을 가지고 있어 공군에 보너스를 준다. 유명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1.0.3 패치 이전까지 이탈리아 공화국의 국민대중주의 정당 이탈리아 국민연합의 지도자로 등장했으며, 패치 후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무솔리니를 따라갔다.[1] 비슷한 인물로 보자면 독일의 헤르만 괴링이 있다. 둘 다 전쟁 전까지 해도 두 국가의 공군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똑같이 해군 항공대를 매우 견제했다.그나마 전쟁 때의 행적은 발보가 훨씬 낫다.[2] 이 길의 이름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참동안 유지되었지만, 전범국 군인의 이름을 미국의 중심 도시 도로에 붙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한 논란이 끝없이 제기되었고 결국 2017년 시카고 7번 가는 흑인 인권을 위해 싸운 여기자 '이다 B. 웰스 가' 로 개칭되었다.[3] 참고로 발보 말고도 많은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이 반독 성향을 갖고 있었다.[4] 지금이야 민주주의가 당연한 얘기지만 이때 이 시절 무솔리니 치하 이탈리아에서는 "민주주의자"라는 것 자체가 최악의 굴욕적인 별명이 아닐 수가 없었다.[5] 발보는 대서양 횡단 이후부터 죽기 직전부터 그를 끊임없이 견제한 무솔리니와 대립했으며, 괴링은 베를린 전투 막바지에 히틀러에게 이제 자신에게 총통직을 물려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했다가 손절매를 맞았다.[6] 발보는 전간기에 로마-대서양 비행에 도전해 성공했으며 괴링은 1차대전 당시 전투기 조종사로 활동하며 여러 무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