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Disastro di Balvano1944년 3월 3일 이탈리아 왕국 바실리카타에서 일어난 철도 사고.
2. 사고의 전개
1944년 3월 2일 저녁 기관사 마테오 지글라노가 운전하는 8017호 열차가 나폴리에서 포텐차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47량의 열차엔 기관차 2대와 승객열차 4칸, 나머지는 전부 화물차였다. 수백명의 무임승차 승객들이 있었는데 상당수는 승객칸이 아닌 화물칸에, 역에서 열차가 떠날 때 몰래 달려가 달리는 열차에 올라탔다. 전쟁 중에 생필품을 구하기 힘들었던지라 포텐차에서 생필품을 구해 다시 나폴리로 돌아가기 위한 무임승차객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이런 식의 무임승차가 많아서 아예 암시장 특급열차(Black Market Express)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열차는 수많은 승객을 태워 최대 허용량보다 11톤이나 더 무거워진 상태인 데다 전시 상황이라 품질 좋은 석탄은 대부분 군에 납품됐고, 그 다음 단계의 품질이 좋지 않은 석탄을 보급받아 운행 중이었다. 8017호에 실린 석탄은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져온 3등급에서 4등급의 석탄으로, 품질이 안 좋아서 태우면 무색 무취의 일산화탄소가 나왔다.사고 열차는 나폴리에서 출발할 때 전기기관차 2대가 견인하고 있었으나 바티파글리아(Battipaglia) 역에서 증기기관차로 교체되었다. 당시 바티파글리아역 이후 구간이 전기화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증기기관차로 바꿔 단 열차는 3월 2일 오후 7시에 바티파글리아역을 떠났고 자정 쯤에 발바노-리칠리아노(Balvano-Ricigliano)역[1]에 도착했다.
날이 지나고 3월 3일 오전 00시 15분. 열차는 발바노-리칠리아노 역을 떠났다. 역장은 8km 떨어진 벨라 무로(Bella Muro)역의 역장에게 열차가 떠났으니 도착할거라 전했다. 열차가 다음 역으로 도착하려면 해발 800미터의 살레르노 산위에 있는 터널을 지나야 했다. 경사진 곳을 올라가야 하다 보니 힘이 더 필요해서 기관사는 석탄을 더 넣으라고 지시했다. 열차는 첫 터널을 지나고, Galleria "Delle Armi" 라 불리던 1,968m 길이의 두번째 터널로 들어갔다. 그런데 경사가 너무 가파른 데다 폭우 때문에 철로가 젖어 있어서 열차가 힘을 못 내기 시작했고, 오히려 뒤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뒤로 더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려고 브레이크맨이 브레이크를 밟았다. 기관사는 열차가 더 힘을 내야 하니 석탄을 더 많이 넣으라고 지시했다. 문제는 위에서 말했다시피 석탄의 품질이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열차는 힘을 내지 못하고 바퀴는 계속해서 헛돌았다. 그렇게 승객이 잠든 사이, 석탄을 태우던 기관차는 엄청난 양의 일산화탄소를 내뿜었다. 안그래도 앞서 다른 열차가 지나가면서 터널 내에 일산화탄소 농도가 짙었는데 기관차 2대가 석탄을 무지막지하게 태우면서 더 짙어졌다.
몇몇 승객들은 자는 사이 목이 너무 따가워서 깼다. 아예 숨쉬는 것 자체가 힘들어지자 헝겁이나 손수건 등으로 입을 가리고 숨을 쉬었다. 승객들은 앞의 기관차에서 나온 연기가 객실까지 들어왔다고 생각해 열차 후미로 향했다. 하지만 열차 대부분은 이미 터널 안에 들어온 상태였고, 후미로 대피한다고 한들 소용이 없는 상황이었다. 열차 끄트머리는 아직 터널 안으로 진입하지 않아 피해가 없었고, 끄트머리에 탑승했던 차장은 무슨 일이 생겨서 움직이지 않는지 의아해 해 앞으로 나아갔지만 들어가자마자 눈이 따갑고 목이 아파오기 시작해 다시 밖으로 나갔다. 한편 발바노역에선 오전 2시가 넘었는데도 다음 역에서 열차가 도착했단 연락이 오지 않아 뭔가 이상한 일이 벌어진 것을 눈치챘다. 다음 역에 연락해 열차가 도착하지 않았단 사실을 듣고는 포텐차로 전보를 보내 열차에 이상이 생긴것으로 추정된다고 신호를 보냈다.
오전 5시 10분, 끄트머리에 탑승했던 브레이크맨이 발바노 역까지 1.8km를 걸어 돌아와 "승객들이 전부 죽었다." 고 전했다. 발바노 역에선 열차를 따로 타고 사고 열차로 향했다. 방독면을 쓰고 안으로 들어가 상황을 확인했으나 탑승객의 상당수는 이미 사망했다.
결국 이 사고로 517명이 사망, 90명이 부상을 입었다. 터널에 들어가지도 못한 열차 끄트머리에 탑승했던 사람들과 열차 내에서 이상한 걸 느끼고 탈출한 사람들만 살아남았다.[2] 그나마 살아남은 승객들도 일산화탄소를 너무 들이키는 바람에 장애를 입었다. 무임승차가 너무 많아서 무임승차객 중 190명의 신원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열차 내 승무원들의 상당수도 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고 그나마 끄트머리에 탑승했던 브레이크맨과 석탄을 넣던 화부 중 Luigi Ronga만 살아남았다.
이 참사는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낳은 사고로 남았다.
3. 사고 이후
발바노에서 출발한 열차는 사고 차량을 이끌고 다시 발바노로 돌아왔으며 그곳에 경찰과 군인, 발바노 지역의 주민들이 모여 시신 수습을 도왔다. 당시 상황은 사진으로 남았는데 역 한칸에 시체로 가득찬 끔찍한 광경을 그대로 담았다.안타깝게도 한참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던 와중에 일어난 참사라서 다른 나라는 물론 이탈리아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가 2014년 역사학자 Gianluca Barneschi가 이 사건에 대한 책을 쓰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사고가 났던 현장 인근에는 사고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비석이 세워졌다.# 인근에 추모하는 예배당이 세워졌다.#
문제의 구간은 전후에도 오랫동안 비전화 구간으로 남아 있다가 1986년에 전기화 공사를 시작해 1993년에 완공되었고 1994년부터 전기기관차가 다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