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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2 04:02:01

반공 사건

1. 개요2. 북한3. 대한민국4. 중화인민공화국5. 베트남6. 동유럽7. 쿠바

1. 개요

개인이나 집단이 공산주의에 저항해 일어난 사건. 단, 집권여당이나 정부가 반공주의적 목적으로 벌인 사건들은 제외.

2. 북한

3. 대한민국

4. 중화인민공화국

5. 베트남

6. 동유럽

7. 쿠바


[1] 한동안 "북한 지역 반공 의거 1호"라고 알려져있었으나, 반공 저항이 아니라 백색 테러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황해도 해주에서 우익 테러범들이 공산당 황해도당 부위원장 등 간부 5명을 살해한 무장 습격 사건이었다. (출처: 기광서 「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 운동의 실상」, 조선대 동북아연구소 『동북아 연구』 34권 2호, 2019., 145~146쪽)[2] 북한 지역 반소반공의 상징인 신의주 봉기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다.[3] 출처: 기광서 「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 운동의 실상」, 조선대 동북아연구소 『동북아 연구』 34권 2호, 2019., 145~146쪽[4] 출처는 소련 외무부의 극동제2국 참사관 수즈달레프가 작성한 ‘조선에서의 일본의 군비와 중공업에 관한 보고서'이며, 그 사유가 기가 막히다. 소련군에 막대한 피해를 준 일본군 군수산업시설 및 재산을 손해배상금으로 가져와야 한다’이다. 하필 소련 외무부는 배상 책임을 일본 정부가 아니라 식민지에 불과했던 자기의 점령지역에게 책임을 물었다.[5] 1946년 삼일절 평양 행사에서 백의사 단원들이 김일성을 암살하려고 연단에 수류탄을 던졌다가 소련군 경비병 야콥 노비첸코 소위(1994년 사망)가 대신 중상을 입은 백색 테러 사건이다(송광호 「1946년 발생한 김일성 암살 미수 수류탄 사건」, 『월드코리안』 2021. 4. 15.)[6] 1946년 3월 북한의 토지 개혁 이후 북한 곳곳에서 지주, 자본가, 기독교도, 학생들을 중심으로 북한 정권과 소련군정에 반발하는 사태가 확산한다. 특히 곡창지대인 평안남도 서부, 평안북도 국경 지대, 황해도 38선 경계 지대가 치열했다. 시기로는 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할 조짐을 보인 1947년 7~8월과 남북연석회의가 열린 1948년 3~7월에 활발했다. (출처: 기광서 「해방 후 북한 반소반공 운동의 실상」, 조선대 동북아연구소 『동북아 연구』 34권 2호, 2019., 154~160쪽; 평양반공의거; 함흥학생반공의거; 고성 반공의거 순국비)[7] 함흥의 경우, 1945년 11월 7일에 함흥 학생들이 반소 봉기를 벌였고 50여 명이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매일경제 1973. 7. 2.). 그러나 현재 반소 반공 봉기를 다룬 자료 중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8] 그러나, 천안문 항쟁이 공산주의의 이념에 반대하여 일어난 일이라고 보긴 애매하다. 천안문 항쟁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덩샤오핑이 추진한 중국공산당의 우경화로 인한 빈부격차 심화 및 부정부패로 인하여 공산당에 반감을 품은 좌익 성향의 노동자 계층 등의 여러 중국공산당에 대한 분노가 표출된 것에 가까웠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