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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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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제주특별자치도 휘장_White.svg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주특별자치도지사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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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녹색당 부순정
5 무소속 박찬식
서울 · 인천 · 경기 · 강원 · 대전 · 세종 · 충북 · 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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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123재보궐45678 }}}}}}}}}}}}
박찬식
朴贊殖 | Park Chan-sik
파일:박찬식.jpg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출생 1963년 5월 22일 ([age(1963-05-22)]세)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소속 정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학력 하원초등학교/제주교대부설초등학교 (졸업)
제주제일중학교 (졸업)
오현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요크 대학교(영국) (정치학 / 박사)
경력 제주특별자치도지사 후보
시민정치연대 제주가치 공동대표
전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
전 제주제2공항 비상도민회의 상임공동대표
전 제주4.3 제 70주년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
전 제주4.3제50주년범국민위원회 사무처장
전 성공회대학교/충북대학교 외래 교수
전 육지사는 제주사름 대표

1. 개요2. 생애
2.1. 학창시절과 학생운동2.2. 노동운동2.3. 제주4.3 전국화 운동2.4. '육지사는 제주사름' 및 제2공항 반대 투쟁
2.4.1. 제 2공항 반대 주장: 현 공항 확장 재건축 및 명칭 변경
3. 선거 이력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사회활동가이자, 교육인. 최근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월평동 출신으로 제주교대부설초등학교, 제주제일중학교, 제주오현고등학교를 거쳐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이른바 서울대 82학번[1]이다. 총학생회장에 출마했을 만큼 서울대 운동권의 주요 인물이었고, 졸업 이후는 노동운동에 투신하는 한편 학업을 이어가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를, 영국 요크대학교에서 정치학으로 박사를 취득했다.

학생운동 및 노동운동 과정에서 각각 집시법과 국보법 위반으로 2차례 수감 되었으며, 민주화운동유공자로 인정 받았다.

학생운동 시절부터 제주의 역사ㆍ지역현안 문제에 적극 참여하였는데 특히 4.3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높이는데 공로가 있다.

1998년 4.3 사건 50주년부터 4.3 범국민위원회의 도외 활동을 이끌었고, 2018년 4.3 사건 70주년에는 범국민위원회 운영위원장을 맡았다.

2019년부터는 제주제2공항강행저지상황실장으로 제2공항 추진 저지에 앞장섰다.

이러한 이력을 바탕으로 청와대 직속기구인 국가균형발전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2022년 6월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제주특별자치도지사 후보로 출마했으며, 1만여 표(3.42%)로 3위를 하며 낙선했다. 당선되기에는 낮은 득표이나 광역단체장 진보성향 후보 가운데서는 높은 득표였다.

2. 생애

2.1. 학창시절과 학생운동

학창시절 내내 도내에서 수재로 손꼽혔었다. 당시 제주시외권에 사는 많은 수재들이 그랬듯, 일찌감치 ‘제주시에서의 유학생활’을 시작했다.[2] 제주도에서 명문 중·고등학교로 꼽히는 제주제일중학교오현고등학교에서 수석에 수석을 거듭했고, 학력고사에서는 전국 7등에 오르기도 했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원서를 1등으로 냈다는 비화가 있다. 같은 해 제주도에서 서울대 법대에만 6명이 붙었을 만큼[3] 수재들이 많았던 학번인데 그 중 오현고의 대표격으로 세월이 흘러도 기억되고 있다. 졸업 때 기증한 교복이 오현고 역사관에 전시되어 있다.

파일:ohyun_parkchansik.jpg

대학 시절 또한 제주도 출신 대학 선후배들 사이에서도 구심점 역할을 했던, 소위 ‘레전드’. 80년대 서울대에는 ‘제주문제연구회’라는 써클이 있었는데, 일종의 향우회 겸, 이념교육의 통로였다. 제주도에서 서울 명문대로 진학했던 유학생들은 ‘어른 말씀 잘 듣는’ 모범생들이었다가, 상경하고 나서야 광주의 참상을 알게 되고, 그와 비슷한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고향에서 금기시하던 4.3에 대해 눈뜨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과정이었다. 박찬식은 이 ‘제주문제연구회’의 1984년 회장이다.

1985년에는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84년, 85년 학생운동의 주요 활동 하나는 ‘학원자치회복’을 기치로 한 총학생회장 선거이다. 84년 가을 서울대에서 상징적으로 학생회 선거를 치러 회장을 선출하고, 이듬해 서울대를 비롯해 전국 대학에서 총학생회장 선거가 공식적으로 치러졌다. 박찬식은 첫번째 공식선거인 85년 서울대 총학생회장후보로 선거에 출마하여 2등으로 낙선했다. 당시 득표율은 33%. 학생회장 당선인은 김민석 의원으로, 지방, 그중에서도 특히 제주도 출신 대학생들에게는 상당히 고무적인 사건이었다.[4]

파일:85.snu_poster.jpg파일:85.snu_vote.jpg

이 때는 소위 NL, PD 등으로 구분되는 학생운동의 계파가 형성되기 이전이고, 총학생회장 선거 그 자체가 중요한 학생운동이었으므로, 당선, 낙선 여부와 관계없이 학생회 간부로서 참여하게 된다. 박찬식은 인권부장, 기획부장으로 반독재 시위 활동을 하다 수배 물망에 올라 체포되었고, 1986년 처음 투옥되었다. 이 활동으로 2010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되었다.

2.2. 노동운동

첫 번째 투옥 후, 박찬식은 사법고시에 도전하지 않고 현장으로 잠입하여 본격적인 민주화ㆍ노동운동에 뛰어든다.

1987년에서 88년 사이 대구 신성공업사에 취업, 노조 결성 및 파업을 주도하고 대구노동자협의회를 결성하는 등의 활동을하다 1990년부터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노운협)[5]에 합류, 1995년까지 편집부장[6], 정책실차장 등을 맡으며 ‘노동운동’지를 발간하기도 한다. 박창수 열사 투쟁, 전국지하철노조 파업, 한국통신 노조 민주화 운동 등을 지원하다가 수배되어 1995년 11월 김영곤(의장), 문성현(사무총장)과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 두 번째로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는 검찰의 무리한 기소였기 때문에 구속사유의 기각으로 면소판결 받고 석방되었다. [7]

출소 후에는 노동, 정치분야의 교육과 연구확동을 이어갔으며. 1998부터는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의 소장으로 재임하며 <주간정세동향> 발간 및, 한국전력 노조민주화, 공무원노조 건설 등을 지원하고, 2000년 <전태일을 따르는 사이버 노동대학> 을 설립하여 전국의 노동조합, 시민단체 활동가를 교육하는 데 힘쓴다.

2.3. 제주4.3 전국화 운동

제주 내에서는 워낙 제2공항강행저지운동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사실 4.3과 관련하여 범국민위원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덜 알려진 편이다.

80년대 학생운동의 시작과 함께 제주문제연구회를 통한 4.3연구를 시작으로, 1988년 이후 제주사회문제협의회(제사협)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본격적으로 4.3의 전국화를 위한 투쟁을 시작하게 된 것은 1998년부터이다. 1997년 제주도내에서는 4.3 50주년을 앞두고 '반백년은 넘길 수 없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각종 세미나가 열리는 등 적극적으로 움직이려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다. 당시 4.3 50주년 범국민위 특별위원장이 도외 사회운동계에서 이미 충분한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던 박찬식을 찾아 함께 할 것을 제안했고, 4.3 50주년 범국민위원회의 정책팀장으로 참여하게 된다.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개최 된 4.3 50주년 기념식 및 명예회복 촉구대회, 마로니에 공원 가두행진, 4.3진혼굿 등이 박찬식이 기획하고 주도한 행사이다. 그리고 51주년인 1999년, 4.3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명동성당 철야농성 등을 주도하고, 각종 대회 결성과 함께 4.3 예술 작품 전국 순회 등 문화ㆍ예술 작품들을 알리며 4.3의 문화적 확산을 이끌었다.

파일:98_4.3 50th (1).jpg 파일:98 4.3 50th (2).jpg

2018년 4.3 사건 70주년, 박찬식은 범국민운영위원장을 맡아 70주년과 관련한 각종 민관협력 행사를 주도한다. 대통령이 참가하는 국가추념식,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 분향소, 종교별 추모행사와 국민문화제,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3달간 개최한 4.3특별전, 사회 각계 유명인사가 참여한 “제주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영상 캠페인, 4.3정명 학술대회 등이다.

파일:2018 4.3 70th (1).jpg 파일:2018 4.3 70th (2).jpg

파일:2018 4.3 70th (3).jpg 파일:20180403045608520.jpg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는 슬로건은 4.3 사건 70주년의 슬로건이자, 수많은 사회각계의 인사가 참여했던 캠페인의 제목이다. 그리고 공식적으로만 25년이 넘게 걸린, 박찬식의 4.3 알리기 운동을 함축한 말이기도 하다.

2.4. '육지사는 제주사름' 및 제2공항 반대 투쟁

2005년, 박찬식은 온 가족을 데리고 영국 유학길에 올라 6년만에 정치학 박사를 취득하여 2011년 귀국 한다. 원래는 민주노동당에서 활동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사이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과 분당하고 고향에서는 강정 해군기지 반대 투쟁이 뜨거워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서울에서 ‘육지사는 제주사름’(육지사는 제주사람)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강정 주민들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활동을 펼친다. 이 단체의 활동은 2015년 박근혜정부 당시 제주 제2공항 입지가 발표 되면서 제2공항 반대 운동으로 자연스레 확장됐다.

2018년 4.3 70주년 범국민위원장으로 참여한 70주년사업이 마무리 되자, 제2공항 용역 타당성 검토위원회에 참여하였고 제2공항 반대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110여개의 시민사회단체가 결집한 제2공항 비상도민회의의 상황실장 및 상임공동대표로서 원희룡 지사와의 맞장토론, 국토교통부 국장과 이틀에 걸친 8시간 끝장토론 등을 주도하고, 도민 공론화에 따를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2019년 공론화를 위한 도의회 특위 구성안이 심사 보류되었고, 박찬식은 이에 항의하며 광화문에서 16일간의 단식을 강행한다. 단식 중 국가균형발전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 후 2년만인 2021년 도의회가 주축이 된 여론조사를 통한 도민의견 수렴에 따르자는 상황을 이끌어냈다. 결과는 제2공항 건립 반대 51.1%, 찬성 43.8%. 그러나 크지 않은 차이로, 여론조사 결과는 공항 검토에 반영되지 않았고, 여전히 제주에서는 논란이 되고 있다.

2.4.1. 제 2공항 반대 주장: 현 공항 확장 재건축 및 명칭 변경

박찬식의 제2공항 반대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현 공항의 진짜 문제점은 40년 전 시설구조에 기반한 터미널 및 관제시스템과 활주로의 노후 문제이다.

둘째, 해외에서 이미 사용중인 첨단관제시스템을 도입하고, 남북활주로 연장만으로 제주공항 시간당 이착륙은 35회에서 60회로 늘어날 수 있다.

셋째, 터미널은 현 공항 남쪽 자리에 2배 이상의 크기로 확장해서 여객 편의를 도모해야 한다.

박찬식이 공항 확장 재건축을 주장하며 롤모델로 제시하는 것은 미국의 라과디아 공항이다. 라과디아 공항은 기존의 공항을 정상운영하면서 2개 터미널, 6개 탑승동을 재건축하여 신축 수준의 재건축을 해냈고, 완공된 공항을 '신공항'이라고 부른다.

이와 더불어 현 공항이 4.3 사건의 대표적 학살지인 정뜨르 학살지임을 추모하는 뜻에서 '4.3평화국제공항'으로 명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22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주특별자치도지사

[[무소속(정치)|
무소속
]]
10,138 (3.42%) 낙선 (3위)

[1] 대명사화 될 만큼 유명한 학번이다. 유독 숫자가 많아 ‘82’의 발음에서 따 ‘똥파리’학번이라고도 불린다. 서울대 법대 82학번으로는 조국, 원희룡, 나경원, 김난도, 김상헌 등이 있다.[2] 제주교대부설초등학교에 전학하여 전교어린이회장을 했을 만큼 제주어로 ‘요망진’ 아이였는데, 박정희 정권에서 모든 학교의 학생회장을 임명제로 바꾸는 학도호국단 제도를 실시하면서 회장자리를 빼앗긴다. 일찌감치 독재정권의 쓴 맛을 본 셈.[3] 오현고 출신인 박찬식, 김재훈, 제주일고 출신인 원희룡, 강경필, 문영기, 제주여고의 김희련 6명이다. 이 중 박찬식, 원희룡, 강경필 세 명 모두 중문 출신이다.서귀포신문 기사 참조[4] 지금은 취업난에 총학생회장 선거가 대학에서 별 주목을 받지 못하지만, 학생운동이 무르익던 80년대 중반에는 선거 그 자체가 ‘학원민주주의’라는 큰 상징성을 가지고 절박하게 요구되던 과제였다.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된 학도호국단이라는 제도로 모든 학교는 학생회의 자치권을 상실하고, 회장을 직접 선출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학생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총학생회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기록으로 만나는 서울대-1984년 총학생회 재건과 학생운동의 대중화[5] 당시 노동운동은 연대투쟁을 위해 전국각지에서 산발적으로 생겨난 노조, 노동운동단체 간에 교류 및 결속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1988년에 생겨난 전노운협은 이러한 흐름 가운데 고 노회찬의원이 속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심상정 정의당 대표가 속한 민족통일민주주의노동자동맹(삼민동맹), 김진숙이 할동했던 부산지역노동조합연합(부산노련)등 여러 노동운동단체가 연합한 단체이다. 1988년 전노운협의 주도로 최초의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리게 된다. 전노운협의 주 활동은 노조가 주체가 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의 지원 업무라고 할 수 있다. 전노협을 모태로 탄생한 것이 지금의 민주노총(1995~)이다.[6] 사족. 박찬식 이전에 전노운협의 편집부장을 맡았던 사람은 차명진이다(미디어오늘, "차명진은 어떻게 괴물이 됐나")[7]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발간, 민주화운동 연구보고서 2003-민주화운동관련 사건•단체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조사 연구보고서 – 1980년대 단체편, "전노운협사건 관련 전원, 집행유예로 풀려나"기사 등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