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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서학파 朴文一 | 박문일 | ||
<colbgcolor=#820000><colcolor=#ffd400> 이름 | 박문일(朴文一) | |
출생 | 1822년 (순조 22년) | |
사망 | 1894년 (고종 31년) | |
본관 | 밀양 박씨 | |
시호 | 문헌(文憲) | |
자 | 대수(大殊) | |
호 | 운암(雲菴), 운재(雲齋), 징암(懲菴) | |
가족 | 아버지 박도정, 어머니 안동 김씨, 동생 박문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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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 관서 지방의 유학자, 성리학자.2. 생애
1822년 평안북도 태천군에서 아버지 박도정(朴道精)과 어머니 안동 김씨 김태려(金泰呂)의 딸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이항로의 제자로, 1866년(고종 3) 사복시주부(司僕寺注簿)·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으며, 1882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1]등의 직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퇴하는 등 권력과 관직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1866년 병인양요때는 당시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을 만나 나라 일에 대한 걱정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고 한다.
전통적 유학자로 오직 도학에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자주 서울에 출입하였으나 역시 권문에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같은 이항로의 문인이며 화서학파인 최익현, 양헌수, 김평묵 등과 경전에 관한 문답을 나누는 등 교분이 두터웠고 권력과는 권리를 두었으며, 동생 박문오[2]와 성리학, 이기설 등에 관한 연구와 후진 양성에만 심혈을 기울였다고 한다. 독립운동가 박은식과 전병훈 등이 그의 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