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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3 11:52:40

박명언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파일:구미시 CI.svg경상북도 구미시 출신/활동
독립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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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fff> 성명 운동계열 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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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순 국내항일 애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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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박명언.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밀양 박씨[1]
출생 1873년 6월 16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읍내면 진평동
(현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2]
사망 1948년 8월 27일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504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명언은 1873년 6월 16일 경상도 인동도호부 읍내면 진평동(현 경상북도 구미시 진평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인동향교에서 자제들에게 유학을 가르치던 중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발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칠곡군에서도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상백[3]을 중심으로 이영식(李永植)·이내성 등 동지 수명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3월 7일에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이 독립선언서 20매를 가지고 오자 그와 상의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이후 박명언은 동리에 독립선언서를 내붙였고 3월 12일 오후 8시 뒷산 마루에서 독립만세를 부른다는 사실을 동리 사람들에게 알렸다.

3월 12일 오후 8시, 동민들은 뒷산 기슭으로 모였는데 그 숫자가 300명에 달했다. 그를 비롯한 주동자들은 그들을 이끌고 뒷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들은 밤이 깊도록 만세를 외치다 급히 출동한 경찰과 헌병대에 의해 주동인물 8명이 검거되었고 나머지는 강제 해산되었다. 하지만 박명언은 체포를 모면했고, 3월 14일 오후 9시경에 2백명의 동민과 함께 뒷산 기슭에서 다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선산군 구미면에서 여생을 보내다 1948년 8월 27일에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박명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3년 10월 25일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1묘역에 이장했다.

[1] #[2] 인근의 옥계동과 함께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성윤·박근술·박명출·박봉술·박삼봉·박순석·이내성·이범성·이상백·이영래·이윤약도 이 마을 출신이다.[3] 저항시인 이상화의 동생인 역사학자 이상백과는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