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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바츨라프 포미치 니진스키 Ва́цлав Фоми́ч Нижи́нский Vatslav Fomich Nizhinsky |
출생 | 1890년 3월 17일 |
러시아 제국 키예프 | |
사망 | 1950년 4월 8일 (향년 60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국적 | [[러시아|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발레리노 |
활동 | 1908년 ~ 1917년 |
배우자 | 로몰라 드 풀츠키 (1913년 결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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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간 춤췄다. 남은 30년은 암흑 속에서 살았다.
- 리처드 버클, 니진스키 전기
러시아의 발레리노이자 안무가. 부모님은 폴란드 사람으로 집안에서는 폴란드어를 사용했으며 그 스스로는 폴란드 사람이라고 여겼다.- 리처드 버클, 니진스키 전기
니진스키는 역사상 가장 재능있는 발레리노로 손꼽히며, 그가 맡은 역할에 있어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니진스키는 그 당시 발레리노 중에서 보기 힘든 기술인 앵포엥트(en pointe)를 출 수 있었다. 중력을 거부한 듯, 높이 도약하며 춤추는 것도 니진스키의 전설 중 하나로 남았다.
2. 생애
2.1. 세르게이 디아길레프와의 만남
바츨라프 니진스키는 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러시아로 귀화한 폴란드계 무용수 집안에서 태어났다. 1900년 그는 황실 발레 학교에 들어가, 엔리코 체케티(Enrico Cecchetti), 니콜라이 레가트(Nicholas Legat), 파벨 게르트(Pavel Gerdt)에게서 공부하였다. 니진스키는 18살 때 마린스키 극장의 공연에서 주역을 맡았다.바슬라프 니진스키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1911년, 프랑스 니스 |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를 만나면서 인생의 큰 변화를 겪게 된다. 디아길레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지식인이자, 러시아 시각예술과 음악을 해외로 소개시키는 일에 열정을 가진 공연 제작자였다. 당시 18살이던 니진스키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재정적 후원과 육체관계의 교환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디아길레프의 남자친구[1]가 달아나고, 장티푸스에 걸린 니진스키를 디아길레프가 간호한 것을 계기로 연인으로 발전한다. 정신병이 진단되기 직전에 쓰여진 니진스키의 자서전에는 디아길레프를 향한 양가 감정이 서술되어있다. '디아길레프가 처음부터 싫었다. 경제적 궁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진지하게 그를 사랑했다. 그가 곧잘 내게 여자들에 대한 사랑은 끔찍한 것이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를 믿었다.[2] 1909년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와 안나 파블로바를 주역으로 내세워, 파리에서 발레 공연을 가졌다. 그 공연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유럽의 유명 예술집단을 통해서 니진스키와 안나 파블로바의 명성이 유명해지게 만들었다. 디아길레프는 이에 그치지 않고 발레 뤼스(Ballet Russe)를 창립하였고, 미하일 포킨의 안무와 함께 그 시대 가장 유명한 발레단 중 하나가 되었다.
세헤레자데 무대의 니진스키 | 타마라 카르사비나와 함께 |
니진스키는 포킨이 안무를 맡고 니콜라이 체레프닌이 작곡한 《아르미드의 집》과, 안톤 아렌스키와 다른 러시아 작곡가들이 작곡한 《클레오파트라》와 막간극 《축제》 등 다양한 작품에서 재능을 선보였다. 차이콥스키 음악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에서, 니진스키의 파 드 뒤(pas de deux) 연기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 1910년 니진스키는 《지젤》과 포킨의 발레인 《사육제》, 그리고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교향 모음곡인 《세헤라자데》의 공연에서 빛을 발휘했다. 니진스키와 타마라 카르사비나와 함께 마린스키 극장에서 진행한 공연은 전설로 남았다.
2.2. 외설 논란
니진스키는 마린스키 극장으로 돌아갔으나, 무대 위에서 타이즈 차림으로 나타나자 퇴장당했다. 그 당시 남자 무용수들은 반바지 착용이 의무적으로 요구되었다. 한 왕족의 일원은 그 모습이 외설적이라 비난하였고, 이에 니진스키는 해고되었다. 이 스캔들은 니진스키를 자신의 발레단에 자유롭게 출연시키기 위해, 디아길레프가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이제 서유럽에서의 많은 공연들이 니진스키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니진스키는 포킨의 새 프로덕션으로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음악이 사용된 《장미의 정령》에서 주역을 맡았고, 1911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로슈카》에서 생명이 없는 춤추는 인형의 역할로 청중들의 감탄을 불러 일으켰다. 페트로슈카는 인형 페트로슈카가 마치 사람처럼 감정을 느낀다는 독특한 설정으로 큰 인기를 불러 일으킨 작품이다. 니진스키는 페트로슈카를 연기하며 기존 발레와 달리 손과 발의 관절을 이용한 동작과 마임을 통해 비통한 표정 연기를 선보여 인형의 양면성을 훌륭하게 표현해냈다.
이후 니진스키는 발레 작품의 안무를 맡았다. 1912년 클로드 드뷔시의 음악이 사용된 《목신의 오후》와 《희롱》, 1916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음악의 《틸 오일렌슈피겔》(Eulenspiegel), 스트라빈스키 음악의 《봄의 제전》 등이다. 이 작품들을 통해 니진스키는 전통적인 발레의 것과는 거리가 먼 안무를 만들어냈다.
레온 박스트가 그린 목신의 오후 | 목신으로 변신한 니진스키 |
1912년 니진스키는 말라메르의 시를 바탕으로 드뷔시의 음악을 사용한 《목신의 오후》에서 처음으로 안무를 창작했다. 참고로 이 작품은 목신이 어느 여름 오후 플루트를 불다가 아름다운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내용으로 니진스키는 신체에 집중해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안무를 만들어냈다.
문제의 그 장면 |
특히 님프의 스카프를 이용한 자위 행위는 큰 화제를 일으켰다. 당시 단순 점프나 어려운 테크닉에만 치중한 발레의 틀을 깼다. 하지만 파리 절반은 그를 외설죄로 비난하였고, 오귀스트 로댕, 오딜롱 르동, 로버트 프로스트 같은 예술가들은 음악의 결을 잘 살린 안무라며 옹호했다.
1913년 《봄의 제전》은 현재 모더니즘 안무의 시초로 유명한데 그때 당시에는 《목신의 오후》와 더불어 혹평이 대다수였다. 1913년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봄의 제전》의 공연은 니진스키를 몰락의 길로 내몰게 하는 큰 계기를 주었다. 발레는 비례와 균형, 아름다움을 중시한다. 니진스키는 이 논리에서 벗어나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안무로 인간 집단의 본성을 차가운 시선으로 표현해냈다. 관객들은 외설적이고 충격적인 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폭동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결국 그는 '봄의 제전' 이후로 춤을 추지 못했다. 사람들은 봄의 제전을 '봄의 학살'이라고 혹평을 했지만 현재는 모더니즘 안무의 시초로 재해석되고 있다.
2.3. 디아길레프와의 결별
1913년 봄의 제전으로 시끌벅적했던 시기에 발레 뤼스는 남미를 순회 공연했는데, 항해를 두려워하던 디아길레프는 여행에 동반하지 않았다.[3] 남미로 향하는 항해 기간 중 니진스키는 헝가리 풀츠스키 백작의 영양인 로몰라 드 풀츠키(Pulszky Romola)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니진스키의 열렬한 팬이던 로몰라가 니진스키와 결혼하기 위해서 계략을 썼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녀는 니진스키와 가까워지기 위해 가족의 연줄과 배경을 이용해서 니진스키와 같이 발레 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디아길레프의 허락을 받아냈고, 니진스키의 투어를 따라다녔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니진스키는 로몰라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서로의 언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는 언어 장벽에도 불구하고 항해가 시작된지 15일만에 니진스키의 갑작스러운 청혼으로 둘은 결혼하게 된다.로몰라 드 풀츠키와 니진스키 |
결혼식을 방해하는 사건이 일어날수 있다는 것을 누군가 의식한 것 처럼 결혼식 초대장의 날짜를 앞당겨가며 니진스키와 로몰라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결혼했다. 니진스키는 발레 뤼스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지만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를 해고했다.[4]
다양한 흥행사들이 니진스키의 출연을 원했고 높은 개런티를 제시했지만 니진스키는 모두 거절했다. 니진스키는 그가 원하는 새로운 발레를 창작하기 위해 자신만의 발레단을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5]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니진스키는 러시아 시민으로서 헝가리에 구금되었다. 디아길레프의 1916년 북미 순환 공연을 위해서 니진스키는 구출되었고 둘은 재회했다. 첫번째 미국 시즌에 이은 두번째 미국 시즌에서 니진스키는 자신의 신작 '틸 오일렌슈피겔'을 발표했다.[6] 미국 투어를 끝낸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의 초청으로 스페인으로 건너가 그와 다시 재회하게 되는데, 이것은 니진스키를 남미 투어에 서게하기 위한 디아길레프의 일종의 계획이였다.[7] 이 사건으로 둘은 니진스키가 정신이상이 되어 만나기 전까지[8] 완전한 결별을 하게 된다. 1917년 서로를 적대시하게된 발레 뤼스와의 마지막 남미 투어를 끝으로 니진스키는 생애의 공식적인 마지막 공연을 마치게 된다.
2.4. 정신병과 죽음
남미 투어가 끝나고 스위스로 거처를 옮긴 니진스키와 로몰라는 발레 뤼스와 다시 공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발레계로부터 고립된 상황은 니진스키의 정신병 발병으로 이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29살인 니진스키는 조현병 진단을 받고 더는 춤을 출 수 없게 되었다.파리 몽마르트 묘지의 바슬라프 니진스키의 비석[9] |
니진스키는 나머지 생애를 정신병원과 보호시설에서 출입을 반복하며 보냈다. 로몰라는 니진스키의 간호에 헌신했다.[10] 니진스키는 1950년 4월 8일 한 런던의 한 정신병원에서 사망한 후, 런던에 매장되었다. 유해는 1953년[11] 프랑스 파리 몽마르트의 묘지(Cimetière de Montmartre)에 옮겨져, 가에타노 베스트리스(Gaetano Vestris)[12], 테오필 고티에(Theophile Gautier), 엠마 리브리(Emma Livry)의 무덤과 가까운 곳에 묻혔다.
3. 평가
- 니진스키가 살던 시대동안 확실히 뛰어난 무용수였지만, 그의 파트너였던 타마라 카르사비나는 말년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왕립 발레 학교에서 막 나온 젊은 무용수들이, 이제는 니진스키가 그 당시 세상을 놀라게 했던 기술을 출 수 있다.- 타마라 카르사비나(Tamara Karsavina)
예를 들어 잇츠코프스키는 니진스키만큼이나 높이, 멀리 도약하며 춤 출 수 있었다. 니진스키의 활약으로 발레 무용수 실력의 표준이 다시 정해졌다.
- 디아길레프가 없었다면 니진스키는 전설적인 발레리노로 활동할 수 없었을 거라는 의견 또한 많다. 아무래도 디아길레프가 니진스키를 후원한 것이 니진스키에게 나쁜 쪽이든 좋은 쪽이든 큰 영향을 미쳤으니...
- 니진스키가 여성 무용수와 만족스러울 만한 협연을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의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예를 들어 《지젤》처럼 무대 위에서 여성 무용수와의 호흡이 중요한 경우 니진스키는 성공적인 무대를 선보이지 못했다. 그러나 《푸른 신(神)》에서 신의 역할, 《장미의 정령》에서 장미, 《세헤라자데》에서 사랑받는 노예 같은 양성적인 역할에서, 니진스키를 뛰어넘을 이가 없었다. 여러면을 종합해볼 때, 니진스키는 의심할 여지없이 눈부시고 영향력있는 예술가다.
- 그의 활동 기간을 계산해보면 60년 중 무대에 선 시간은 단 1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짧은 기간 안에 엄청난 업적을 세웠다.
4. 기타
-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1918년부터 1944년까지 니진스키와 로몰라가 살았던 집을 보존하고 있다.
[1] 알렉시스 마브린, 니진스키 직전의 디아길레프의 연인이며 디아길레프의 비서로 일했다.[2] 디아길레프와의 관계에도 불구하고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의 소년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고, 여성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는 로몰라와의 결혼 이후엔 이성애자, 최소한 양성애자로서의 삶을 살았다.[3] 디아길레프는 그의 이전 남자친구인 드미트리 필로소포프, 알렉세이 마브린과의 관계에서 그랬듯이 연인에게 충실한 스타일은 아니었다. 디아길레프는 젊은 소년들을 만날 수 있는 베네치아를 좋아했고, 유럽에 남기로 결정했다.[4] 디아길레프, 발레 뤼스와 니진스키 사이에는 아무런 계약도 없었다. 부호들의 개인 파티에서 춤을 추고 얻는 출연료를 제외하면 니진스키는 발레 뤼스에서의 출연이나 안무를 통해 얻는 급료가 없었다. 대신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와 니진스키의 어머니에게 필요한 비용을 전부 대신했다. 디아길레프는 둘 사이에 존재하지 않는 계약에 대한 책임을 거짓으로 들어 니진스키를 해고했다.[5] 니진스키의 여동생인 브로니아가 니진스키를 돕기 위해 발레 뤼스를 나왔을때 디아길레프는 그녀의 사의 표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녀가 니진스키의 무대에 설 수 없도록 소송을 걸었다 패소한다. 새로운 발레단의 시즌을 앞두고 치명적인 독감에 걸린 니진스키는 결국 극장과의 계약이 틀어져 실패를 겪는다.[6] 두번째 미국 시즌은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의 잦은 다툼 때문에 유럽으로 떠난 디아길레프에게 니진스키가 발레단을 빌리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틸'은 디아길레프가 자신의 발레단이 공연한 작품 중 보지 못한 유일한 작품이다.[7] 디아길레프에게 남편을 빼았길까 두려워한 로몰라는 니진스키를 좋아하는 공작 부인을 이용해 니진스키가 원하지 않는 관계를 하도록 만들었다. 로몰라의 의도였음을 몰랐던 니진스키는 즉시 로몰라에게 사실을 말하고 이 사건은 그를 더욱 가정에 충실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니진스키는 딸을 두고 떠나야하는 디아길레프의 남미 투어 제안을 거절했다. 처음엔 그를 회유하려고 했던 디아길레프는 니진스키를 스페인에 불러오면서부터 계획했던 법적 강제로서 니진스키를 남미 투어에 보내게 된다. 디아길레프는 유럽에 남았다.[8] 디아길레프가 지병으로 죽기 직전의 해에 그는 파리에서 니진스키가 자신과 대화를하고 발레단의 공연을 보는 것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랬다. 기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9] 조각상은 페트로슈카로 분장한 니진스키의 모습이다.[10] 그녀는 니진스키가 정신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여성과의 동성애 성향을 보였다.[11] 디아길레프의 연인이자 디아길레프에 의해 발굴된 발레 댄서인 세르주 리파르가 이장을 주도했다[12] 베스트리스는 파리의 발레 뤼스 시절 디아길레프가 친구들에게 편지를 쓸때 니진스키를 지칭하던 프랑스의 전설적인 발레 댄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