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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시내 전경. 산봉우리 위의 요새는 랜드마크인 카이로 성채이다.
1. 개요
아랍어 تَعِزّ영어 Taiz
예멘 서남부의 도시로, 타이즈 주의 주도이다. 전쟁 전 인구는 70만이었고, 남북 예멘을 대표하는 도시인 사나와 아덴 다음으로 큰 예멘 제3의 도시이다. 해발 약 3000m에 달하는 사브르 산 기슭에 자리한 고원 도시로, 시가지 자체는 해발 1400m에 위치해 있다. 수도 사나에서는 남쪽으로 250km, 아덴에서는 서북쪽으로 170km 떨어져 있다. 타이즈의 외항 모카는 서쪽으로 90여 km 떨어져 있으며, 동북쪽으로 50km 가면 이브와 중세 도시 지블라가 나온다. 별명으로는 예멘의 문화 수도, 예멘의 다마스쿠스가 있었다. 구도심은 12세기 ~ 15세기 예멘 왕조들의 수도였던 것을 상징하듯 오래된 건축물들로 가득하다. 아라비아 반도의 유서 깊은 고원 도시이면서 자주 제2의 도시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타이프와 유사하다. 다만 예멘 내전의 주요 전장이 되며 다수 파괴되었고, 현재는 '저격수의 도시'가 새 별명이 되었다.
2. 역사
카이로 성채 (칼라아 알 카히라)
타이즈에서 동북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알 자나드 모스크는 무함마드가 무아드 빈 자발에게 지시하여 건설된, 자비드의 알 아샤이르 모스크에 이어 예멘에서 2번째로 오래된 이슬람 사원이다. 예멘인들은 무아드가 첫 금요 예배를 주도한 이슬람력의 라자브 달에 그곳을 순례하는 풍습이 있다. 도시 자체는 11세기 술라이히 왕조의 아흐마드 앗 술라이히 (아르와 앗 술라이히의 남편)이 카이로 성채를 건설한 것이 그 시작이다. 1173년 예멘을 정복한 아이유브 왕조의 투란샤 (살라흐 앗 딘의 형)는 카이로 성채를 증축한 후 1175년 타이즈에 총독부를 설치하였다. 아이유브 시대에 타이즈는 4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었으며, 자비드와 함께 양대 중심지였다.
2.1. 라술 왕조의 수도
13세기 술탄 알 무자파르가 건설한 무자파르 사원
아이유브-라술 시기에 조성된 카이로 성채의 정원
1235년 세워진 라술 왕조 역시 타이즈를 중시하였고, 1286년 술탄 알 무자파르[1]는 주요 항구인 아덴과 가까운 타이즈로 천도하였다. 라술 조의 시대에 타이즈의 싸우바트 구역에는 여러 궁전들이 세워졌다.13세기 말엽 타이즈는 북쪽의 메카와 사나, 남쪽의 아덴, 서쪽의 자비드를 잇는 예멘의 교통 요지로 부상하였다. 1295년 알 무자파르는 47년의 치세 끝에 타이즈에서 사망, 자신이 세운 사원에 안장되었다. 라술 왕조는 메카에서 도파르에 이르는 아라비아 반도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였고, 그 중심 도시이던 타이즈에는 많은 건축물이 세워졌으며 주민들 역시 왕조를 지지하였다.
당대 지어진 건물들 중에서 대사원과 마타비야 마드라사, 아슈라피야 마드라사 등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라술 조가 채택한 순니 샤피이파 확산의 목적을 지녔다. 따라서 라술 조의 시기에 타이즈와 자비드는 이슬람권 전역에 있어 샤피이 학파의 중심으로 알려졌다. 1332년 도시를 방문한 이븐 바투타는 예멘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라고 묘사하였다. 한편 북쪽 자이디 이맘들과의 대결에 총력을 기울이던 라술 조는 역설적으로 같은 샤피이 파를 신봉하는 타히르 조에게 멸망하였다. (1454년) 후자는 자비드를 수도로 삼았다.
2.2. 근대
근대의 타이즈 묘사
반세기가 지난 1517년 맘루크 왕조 해군이 예멘에 상륙해 타히르 조를 사실상 멸망시켰고, 같은해 맘루크 조의 본국 역시 멸망하는 권력 공백을 틈타 1534년 자이디 이맘 알 무타와킬이 타이즈를 점령하였다. 한편 몇년 후 맘루크들의 복속에 오스만 제국군이 개입하였다. 1539년 자비드를 점령한 오스만 군은 1547년 타이즈를 점령, 같은해 사나까지 점령하였다. 1566년 예멘의 반터키 봉기 시에 타이즈는 재차 자이디 이맘 알 무타하르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에 1569년 오스만 파샤 휘하의 토벌군이 파견되었고, 그는 타이즈에 이르러 카이로 성채를 포위했으나 함락하지 못했다. 다만 후임인 시난 파샤는 1570-72년 타이즈 등 예멘 내륙을 대부분 수복하였다. 그렇게 반세기 가량 오스만 지배가 이어진 후 1630년경 자이디 이맘 알 무아야드가 3번째로 점령하였다. 이후 타이즈는 2세기 반 가량 자이디 지배를 받았고, 수도 사나에 이은 제2의 내륙 도시로 안정을 누렸다.
18세기 중반부터 자이디 이맘국은 내전에 시달리며 쇠퇴하였고, 마침내 1872년 근대화된 오스만 군대가 돌아와 북부 예멘을 재정복하였다. 그후 세워진 예멘 빌라예트는 4개의 주들로 이루어졌다. 사나, 아시르, 호데이다 (티하마)와 함께 타이즈도 그 중 하나였다. 다만 오스만 조의 지배는 주요 도시에 국한되었고, 자이디 세력은 재차 농촌을 근거지로 삼아 저항하였다. 30년 가까이 이어지던 전쟁은 1913년 휴전 협정으로 마무리되었다. 타이즈는 오스만령으로 남았지만 1918년 1차대전에서 제국이 패망하자 자이디 이맘국에게 병합되었다. 이맘에서 국왕으로 칭호를 바꾼 알 무타와킬은 오스만-영국의 영향을 받은 개혁파와 대립하였는데, 1948년 그들에게 암살되었다.
2.3. 예멘 왕국의 수도 (1948-62)
타이즈의 이맘 궁전
알 무타와킬의 암살 이후 개혁파 군부가 사나를 장악하였다. 이에 타이즈에 머물된 왕자 아흐마드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반란을 진압, 도중 약탈에 의해 피해를 입은 사나 대신 자신의 거점이던 타이즈를 수도로 삼았다. 이로써 타이즈는 크게 발전하였고, 시가지가 성벽 외부로 확장되었다. 국왕으로 즉위한 아흐마드 앗 나시르는 제한적인 개혁을 실시했으나 1955년 쿠데타 시도를 당하는 등 그의 권력은 불안정했다. 1961년에는 사나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이듬해 그가 사망하자 불과 일주일 후 타이즈에서는 개혁파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예멘 아랍 공화국을 설립하였다. (1962년 9월 26일)
군부는 개혁 성향이 짙은 사나로 환도하였고, 신임 국왕 알 만수르는 타이즈를 탈출해 산악 지방에서 저항하였다. 공화국을 돕기 위해 파견된 나세르의 이집트 군은 호데이다, 사나, 타이즈의 삼각 지대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67년 이집트 군이 철수한 후 알 만수르는 타이즈르 회복하고 한때 사나를 포위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1968년 패전하였다. 이로써 한동안 소외된 나날을 보내던 타이즈는 1994년 예멘 통일과 함께 아덴 방면의 교통로가 활성화되며 성장하였다. 다만 이 안정기는 20여년 만에 끝나고, 도시 역사상 최악의 시기가 도래한다.
2.4. 타이즈 시가전 (2015 ~)
내전 이전, 타이즈 시가지
내전 이전 타이즈 구도심
21세기 들어 아랍의 봄과 함께 촉발된 예멘 내전에서 타이즈는 2015년 3월 22일 후티 반군과 알리 압둘라 살레 전 대통령에 충성하는 병력에 의해 점령되었다. 다만 얼마 후 하디 대통령의 정부군이 반격하며 타이즈를 두고 공방전이 벌어졌다. 도시를 두고 벌어진 시가전은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이다. 정부군은 구도심을 포함한 시내 대부분을 회복하였고, 후티 반군은 동부와 북부 교외 지방을 거점으로 재차 시내 중심부로 진출하려 하고 있다. 갈라진 도시는 기존에 5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크게 우회하여 5시간이나 걸리게 되었다. 별명대로 저격수의 도시가 된 타이즈의 주민들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고, 카이로 성채와 아슈라피야 모스크 등 오래된 유적들도 조금씩 파괴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3. 갤러리
카이로 성채의 성벽. 반지의 제왕의 모습을 방불케 할 만큼, 중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들 중 하나로 꼽힌다.
타이즈 시가지
1275년 건설된 아슈라피예 모스크. 내전 도중 동쪽 미나렛이 파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