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의 前 축구 선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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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colcolor=#000,#e5e5e5> 이름 | 밀루틴 쇼슈키치 Милутин Шошкић|Milutin Šoškić | |
출생 | 1937년 12월 31일 | |
유고슬라비아 왕국 페치 | ||
사망 | 2022년 8월 27일 (향년 84세) | |
세르비아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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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80cm | |
직업 | 축구 선수 (골키퍼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eee> 선수 | FK 파르티잔 (1955~1966) 1. FC 쾰른 (1966~1971) |
감독 | OFK 베오그라드 (1973~1976) OFK 키킨다 (1977) FK 파르티잔 (1979~1990 / 수석 코치) 미국 대표팀 (1993~2006 / 골키퍼 코치) | |
국가대표 | 50경기 (유고슬라비아 / 1959~1966) |
1. 개요
유고슬라비아의 축구 선수 출신 前 축구 감독.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로 50경기에 출전했으며, 1960년 하계 올림픽 금메달과 1960년 유럽선수권대회 준우승을 경험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쇼슈키치는 페치 근처의 야블라니차 마을에서 왕실 장교인 아버지 예레미야와 어머니 라둔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페치 총대주교청에서 피난 생활를 보냈다.11세에 축구를 시작한 쇼슈키치는 처음에 츠르베나 즈베즈다에서 6개월간 뛰었지만, 구장 관리인과의 사소한 갈등으로 인해 FK 파르티잔으로 옮겨 대부분의 선수 생활을 보냈다.
곧이어 쇼슈키치는 유고슬라비아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파르티잔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그는 블라디미르 베아라의 뒤를 이어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의 새로운 골키퍼로 자리잡았다.
1960년대 쇼슈키치와 동료들은 소위 "마테칼로의 아기들"이라 불리던 재능 있는 세대의 일원으로서 파르티잔을 유럽 최고 수준의 팀으로 만들어냈다. 그들은 5시즌 동안 4번의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이 중 3번은 연속 우승이었다. 1960-61, 1961-62, 1962-63 시즌 3연속 우승과 1964-65 시즌 우승이 그것이다.
1964-65 시즌 우승으로 1965-66 유러피언컵에 출전하게 된 파르티잔은 압둘라 게기치 감독의 지휘 하에 역사적인 여정을 시작했다.
예선 라운드에서 파르티잔은 프랑스 리그 1 챔피언 FC 낭트와 맞붙었다. 베오그라드의 JNA 스타디움에서 2-0으로 승리하고, 스타드 마르셀 소팽에서의 원정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하여 합계 4-2로 1라운드를 통과했다. 다음 상대는 서독 분데스리가의 챔피언 SV 베르더 브레멘이었다. 베오그라드에서 3-0으로 승리하고 브레멘의 베저슈타디온에서 0-1로 패했지만 합계 3-1로 8강에 진출했다.
8강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1부 리그의 챔피언 AC 스파르타 프라하와 대결했다. 스타디온 레트나에서의 첫 경기에서 파르티잔은 4-1로 대패했지만,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2차전에서 5-0 대승을 거두며 합계 6-4로 준결승에 진출하는 대역전을 연출했다.
준결승에서는 데이비드 허드, 데니스 로, 바비 찰튼, 조지 베스트를 앞세운 잉글랜드의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맞붙었다. 파르티잔의 아기들은 베오그라드에서 2-0으로 승리하고 올드 트래포드에서 0-1로 패했지만 합계 2-1로 결승에 진출했다.
1966년 5월 11일, 브뤼셀의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55,000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결승전이 열렸다. 파르티잔은 스페인 라리가의 챔피언 레알 마드리드와 맞붙었다. 55분 벨리보르 바소비치의 골로 파르티잔이 선제골을 넣었지만, 아만시오와 페르난도 세레나의 골로 레알 마드리드가 경기를 뒤집으며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했고, 우승을 향한 파르티잔의 도전은 끝내 결승전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결승전 이후 해외 진출 조건이 갖춰지자 쇼슈키치는 분데스리가 소속 구단인 1. FC 쾰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이후 그는 쾰른에서 65경기에 출전했다. 하지만 심한 다리 골절상을 당하면서 장기간 휴식을 취해야 했다. 쇼슈키치는 현역으로 복귀했지만, 또 다른 다리 골절로 인해 결국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2.2. 국가대표 경력
쇼슈키치는 1959년부터 1966년까지 유고슬라비아 국가대표팀에서 50경기에 출전했다.쇼슈키치가 국가대표로 참가한 첫 번째 주요 대회는 1960년 유럽선수권대회였다. 유고슬라비아는 준결승에서 개최국 프랑스를 5-4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 경기는 현재까지도 UEFA 유럽축구선수권대회 역사상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으로 남아있다. 결승에서는 소련에 연장전 끝에 1-2로 패하며 준우승을 차지했다.
같은 해 쇼슈키치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1960년 하계 올림픽에서 유고슬라비아 대표팀과 함께 금메달을 획득했다. 유고슬라비아는 불가리아, 아랍연합공화국, 터키로 구성된 조에서 1위를 차지한 후 준결승에서 이탈리아를 꺾고, 결승에서 덴마크를 3-1로 이기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쇼슈키치는 단 6골만 실점했다.
1962년 칠레 월드컵에서 유고슬라비아는 4위를 기록했다. 준결승에서 체코슬로바키아에 1-3으로 패하고, 3·4위전에서 칠레에 0-1로 패하며 4위에 머물렀다.
쇼슈키치는 1963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1963년 잉글랜드 대 세계 선발팀 경기에 초청받아 당대 최고의 축구 선수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3. 지도자 경력
선수 경력을 마친 후 쇼슈키치는 코칭 과정을 이수했다. 그는 OFK 베오그라드의 감독이 되어 5년간 지휘했다. 이후 OFK 키킨다를 맡아 유고슬라비아 2부 리그에서 활동했다. 그 다음에는 파르티잔으로 돌아와 수석 코치로 일했으며, 보라 밀루티노비치와 네나드 브예코비치와 함께 일했다. 당시 파르티잔에는 파루딘 오메로비치, 란코 스토이치, 라데 잘라드 등 여러 실력있는 골키퍼들이 있었다.1993년 밀루티노비치가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부임하면서 쇼슈키치는 골키퍼 코치로 임명되었다. 1995년 밀루티노비치가 떠난 후에도 그는 남아서 스티브 샘슨과 후임 브루스 아레나 감독 하에서 계속 일했다. 그는 2006 FIFA 월드컵 이후 아레나와 함께 팀을 떠났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은 4번의 FIFA 월드컵에 참가했으며, 브래드 프리델, 케이시 켈러, 팀 하워드 등 여러 실력있는 골키퍼들을 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