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閔泳斌대한민국의 언론인, 출판인, 기업인이다. 본관은 여흥(驪興)[1].
2. 생애
1931년 2월 3일 황해도 신천군(현 황해남도 신천군)에서 아버지 민봉호(閔鳳鎬, 1909 ~ 1964. 2. 8)와 어머니 평산 신씨 신봉빈(申鳳彬, 1906. 10. 19 ~ 1998. 3. 25)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그는 해주교원대학[2]을 다니다가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한 뒤 1.4 후퇴 때 월남하였으며, 당시 전시연합대학 체제였던 고려대학교 영문학과[3]로 편입하여 졸업했다. 고려대학교 재학 당시 'The Granite Tower(석탑)'라는 영자신문을 창간했다.
졸업 후에는 영자신문 '코리아 리퍼블릭'의 기자로 일하다 1961년 영어교육학원인 시사영어사(현 YBM)를 설립했다. YBM은 민 회장의 영어 이름 이니셜 '영빈 민'에서 따왔다.
1980년대 TOEIC 시험을 대한민국에 본격 도입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후 시사영어사의 여러 교재들의 서문에서 스스로 이를 자랑스러운 업적으로 내세웠다. 이후 2024년 현재까지 TOEIC은 YBM 산하의 재단법인국제교류진흥회와 한국TOEIC위원회에서 주관한다.
한국 최초 영어음성교재인 ‘잉글리시(English) 900'을 발간했고 1983년 9월 원어민 강사를 고용한 영어학원 ELS를 설립하는 등 새로운 영어학습법을 도입했다.
2018년 2월 2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6세.
3. 여담
- 부인 하동 정씨 정명숙(鄭明淑, 1934. 4. 24 ~ 2018. 7. 17)은 1934년 4월 24일 평안북도 용천군 용천면 용암동(현 평안북도 용천군 용암포노동자구)에서 정세빈(鄭世彬)의 딸로 태어났다.# 이후 신의주시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해주시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1.4 후퇴 때 월남하였다. 월남한 후에는 경기여자고등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했고, 1957년 이화여자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동 대학교 대학원에서 화학 석사 학위[4]를 취득했다. 1963년 모교 과학교육과 교수에 임용되어 1987년까지 봉직했으며, 은퇴한 뒤에는 대구 YBM 시사영어사 대표를 역임했다.#
- 생전에 출판한 본인의 자서전 "영어강국 코리아를 키운 3·8 따라지"에서 무려 한 챕터를 할애해 가면서 8.3 사채 동결 조치에 대해 극찬해 놓았다. 자신의 영어교육 사업과 크게 관련도 없었던 8.3조치에 대해 이렇게까지 한 정확한 이유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