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87CEFA><colcolor=#FFF> 미타 히로코 [ruby(三田, ruby=みた)] [ruby(寛子, ruby=ひろこ)] | Hiroko Mita | |
본명 | [ruby(中村, ruby= なかむら)] [ruby(敦子, ruby= あつこ)] (나카무라 아츠코, Atsuko Nakamura)[1]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생 | 1966년 1월 27일 ([age(1966-01-27)]세) |
교토부 교토시 시모교구 | |
신체 | 160cm, B형 |
학력 | 도쿄도립 요요기고등학교 (전학) 메이지대학 부속 나카노고등학교 (졸업) |
가족 | 남편 8대 나카무라 시칸(1965-)[2] 장남 4대 나카무라 하시노스케(1995년생)[3] 차남 3대 나카무라 후쿠노스케(1997년생)[4] 3남 4대 나카무라 우타노스케(2001년생)[5] 시매부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 시조카 6대 나카무라 칸쿠로[6], 2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 질부 마에다 아이[7] |
[clearfix]
1. 개요
리즈시절 |
2. 상세
데뷔 전의 모습 |
나카모리 아키나, 코이즈미 쿄코, 마츠모토 이요, 하야미 유 등과 같이 1982년에 데뷔한 아이돌들이 연예계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자 일컬어진 ‘꽃의 82년조’ 출신이였으나 본인은 동기들만큼 대성하진 못했는데, 당시 수많은 텔런트들이 쏟아져나오고 하루아침에 사라지던 버블시대였던 것도 있었고, 무엇보다 데뷔 동기들 중에서 전설을 포함해 개성있는 거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 고등학교 시절 나카모리 아키나와 함께 수업을 들었다.
대표곡, ‘初恋 (첫사랑)’ |
1991년, 8대 나카무라 시칸과의 약혼 발표 |
신혼시절, 남편과 함께 출연한 CM |
이후 난임으로 고생하다 결혼 3년 만에 임신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산하는 아픔을 겪었다.[11] 이듬해인 1995년에 드디어 장남이자 후계자인 4대 나카무라 하시노스케를 낳았으며, 1997년엔 차남 3대 나카무라 후쿠노스케를, 2001년엔 3남 4대 나카무라 우타노스케를 낳아 그동안 마음 고생한 것이 무색하게 삼형제의 어머니가 되었다. 대를 이을 아들을 무려 셋이나 낳았기 때문에 가부키계의 많은 치하를 받았으며, 이후 육아와 내조에만 주력하면서 사실상 반 은퇴 상태로 지냈다.
2016년, 남편과 세 아들의 동시 습명을 기점으로 방송 활동을 다시 재개하였으며, 2022년 8월에는 수년 전부터 지속된 남편 나카무라 시칸의 불륜으로 인해 별거 중이라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아들들과 도쿄의 자택에서 그대로 머무르는 것으로 보아 남편쪽이 나가사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본인과 가족들의 생일이나 집안 행사때나 만나는 듯 하다. 현재는 SNS를 통해 일상을 공유하고 아들들을 응원하는 것으로 불륜을 저지른 남편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본인과 자식들의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3. 여담
- 세 아들들을 각각 구니쨩(グニちゃん), 무네쨩(ムネちゃん), 요시쨩(ヨシちゃん) 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 일본국유철도 마지막 날인 1987년 3월 31일에 닛폰 테레비에서 방송된 "さよなら大放送おもしろ国鉄スペシャル"에 도쿠미쓰 카즈오[12]와 함께 공동사회를 맡았다. 위 동영상에서 마이크를 들고 일본국유철도 직원들과 함께 반딧불의 빛을 부르는 모습이 보인다.
- 한류 팬이다.
[1] 결혼 전 본명은 이나가키 아츠코.[2] 본명은 나카무라 코우지. 1991년 결혼했으며, 현재는 별거 중이다.[3] 본명은 나카무라 구니오. 노기자카46의 멤버였던 노죠 아미와 교제중이다.[4] 본명은 나카무라 무네오.[5] 본명은 나카무라 요시오.[6] 가부키 4대 명문가 중 한 곳인 나카무라야 나카무라 종가의 현 당주이다.[7] 시조카 6대 나카무라 칸쿠로의 부인으로, 사실상 제2의 시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8] 당시 딸의 사진을 운전석에 붙여놔 탑승한 손님들이 알아봤다고. 2022년에 노환으로 작고했다.[9] 당시 3대 나카무라 하시노스케. 누나가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부인으로, 아들들인 나카무라 칸쿠로와 나카무라 시치노스케에겐 외삼촌이 된다.[10] 세트장 뒷편에서 점심을 먹고있는데 감독이 시칸을 데리고 온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이였으며, 첫 데이트는 긴자의 와코백화점 앞에서 했다고 한다.[11] 임신 전까지 난임의 고통과 대를 이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마음 고생이 심했기 때문에 유산 직후 교토에 있는 친정으로 도망치듯 내려가 며칠동안 칩거했다고 한다. 슬퍼하는 히로코를 데리고 요양을 가 ‘긴 인생이니 천천히 가도 된다’며 위로하던 남편 시칸은 이에 대해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중에 조용히 아내를 데리러 왔다고. 미타 히로코는 이 시절에 비로소 진정한 부부로 거듭난거 같았다고 회고했다. 주변인들은 저 기억으로 오늘날 바람난 남편을 버리지 못한다고 추측한다[12] 1941년생 아나운서로 닛폰 테레비 아나운서로 활동하였고, 1989년에 프리랜서로 전업하였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으로도 유명하며, 나가시마 시게오 전 감독의 열혈 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