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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2:32:03

USS 미주리 (BB-63)

미주리호에서 넘어옴
USS 미주리 (BB-63)
USS Missouri (BB-63)
아이오와급 전함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SS_Missouri_COA.png
파일:external/www.maritimequest.com/1986_05_10_bb63_sfo_a.jpg
USS BB-63 Missouri

1. 개요2. 활약상
2.1. 제2차 세계 대전2.2. 대전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2.3. 한국전쟁2.4. 퇴역2.5. 재취역2.6. 걸프 전쟁2.7. 재퇴역
3.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Strength for Freedom
자유를 위한 힘
USS 미주리(BB-63)의 표어


워게이밍의 미주리 취재 영상.

아이오와급 전함의 3번함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에 뉴욕 브루클린 해군 공창에서 건조되었다. 1944년 1월 29일 진수되어 동년 6월 11일에 취역했다. 초대 함장은 윌리엄 M. 캘러건 대령이며 미주리라는 이름을 받은 네 번째 배다. 즉 4대 미주리. 현재는 버지니아급 잠수함 중 한 척이 미주리의 이름을 물려받아 활동 중이다. 한 번 퇴역했다가 재취역해서 전쟁을 한 번 더 겪은 우여곡절이 많은 전함이고 한국과의 인연도 은근히 깊은 함이다.

미주리는 2차대전으로 3개의 종군휘장을, 한국 전쟁으로 5개의 종군휘장을 수여받았다.

별명은 미주리 주의 약자 Mo를 따서 "Mighty Mo" 혹은 "Big Mo"였다. 상세한 제원은 아이오와급 전함 참조.

2. 활약상[1]

2.1. 제2차 세계 대전

진수되는 미주리
취역 직후 각종 테스트와 관숙 항해를 거친 뒤 1944년 11월 11일에 노포크를 출항하여 18일에 파나마 운하를 통과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기함 임무를 맡기 위해 약간의 시설 개장을 거치고 12월 14일 출항하여 1945년 1월 13일에 캐롤라인 제도에 도착하여 드디어 태평양 전선에 뛰어들게 되었다. 현장에서 마크 미처 제독의 기함을 한동안 맡았다. 1월 27일에 TF 58에 소속되어 항모들을 보호하기 위해 출격하였으며[2] 2월 16일에는 1942년 호넷에서 이함한 둘리틀 특공대 이후로 처음 일본을 공습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그 임무는 항모의 호위에 그쳤다.

이후에는 이오지마 전투에서 2월 19일부터 화력지원을 시작했다. TF 58이 울리시에 귀항한 이후로 이번에는 항모 요크타운[3]을 따라 3월 14일 출격하여 18일 일본 본토를 공격하면서 항모로 접근하는 적 항공기 4기를 격추하였다. 이후 항모 프랭클린이 일본군의 폭격으로 대파당하자 그를 호위하여 3월 22일까지 울리시 방면으로 동행하다가 귀환하여 오키나와 전투에 앞서 사전 포격에 나섰다.

4월 7일에는 야마토급 전함 1번함 야마토를 포함한 일본 해군의 잔존부대가 접근하였으나 미주리가 나설 것도 없이 함재기들의 공습으로 인해 어뢰로 격침되었다. 생존한 4척의 일본 구축함들은 사세보로 귀항했다. 4월 11일 미주리는 카미카제 공격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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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은 사진찍기가 취미였던 취사병이 적기가 가미카제를 한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카메라를 들고 달려나와 순간찍은 사진이다.
항공기는 이 장면 이후 왼쪽 날개가 함체에 부딪치며 기체가 갑판에 뒤집어진 채 추락했다고 한다. 항공기에 달려있던 폭탄 2발 전부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운좋게 불발했고, 이후 항공유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함 자체의 손상은 미미했고 화재도 금방 진압되었다.[4] 상황이 수습되자 미주리의 함장은 카미카제 파일럿의 시신을 해군식 수장으로 엄숙하게 처리할 것을 지시했다.[5] 승조원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함장은 적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 차원에서 장례를 관철했다.[6] 여담이지만 이 장례식은 미주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행했었던 장례식이라고 한다.

전후 함장은 조종사의 어머니와 만나서 많은 대화를 했다고 한다.

4월 17일 12마일 거리 밖에 있는 잠수함을 발견하여 대잠작전을 유도하였다. 결국 구축함과 경항모 바탄에 의해 일본 잠수함 이56이 격침되었다. 이 때까지로 미주리는 오키나와에서의 임무를 중단하고 기동부대에서 빠져나와 울리시로 귀항했다가 5월 18일 윌리엄 홀시 제독 휘하 3함대의 기함이 되어 오키나와로 복귀했다. 그리고 다시금 포탄을 퍼부었다. 이후로 6월 2일부터 3일까지 큐슈의 일본 비행장을 타격하였다.

6월 5일에서 6일간 윌리엄 홀시 제독이 이후로도 두고 두고 까이는 태풍 속 항해를 결행하였으나 미주리는 상부 구조물에 일부 손상을 입는 선에서 그쳐 중요한 부위의 손상은 피해갔다. 3함대는 8일에 다시 큐슈를 두들기다가 레이테 만으로 물러났다.

1945년 6월 13일 미주리는 레이테의 산 페드로에 도착하였다. 오키나와에서 지원작전을 편 지 3개월 만이었다. 7월 8일 일본을 향해 북쪽으로 항로를 잡고 7월 10일에 도쿄를 기습하였으며 7월 15일에는 수상함 최초로 일본 본토에 포격을 개시했다. 홋카이도의 무로란을 포격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 강철과 와니시 철공소의 시설이 파괴되었다.

일본 본토에 대한 공해 합동 타격은 7월 25일까지 지속되었으며 미주리는 주로 도쿄를 직접 타격하는 항모를 호위하는 역할을 맡았다. 7월 말이 되면서 일본에게 영해란 개념이 거의 상실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8월에는 드디어 일본에서 원자탄이 터지면서 일본이 항복하게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higemitsu-signs-surrender.jpg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미주리는 점령함대 기함 임무를 일시적으로 1번함 아이오와에게 넘긴 뒤 29일 항복 조인식장으로 쓰이기 위해 도쿄만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9월 2일 미주리의 함상[7]에서 전쟁이 끝났다. 5일에는 기함 임무를 사우스다코타에게 완전히 넘기고 괌에서 귀환병들을 태우고 본토로 돌아왔다.

2.2. 대전 이후 한국전쟁 전까지

뉴욕의 해군 공창에서 한 차례 오버홀을 받은 뒤 1946년 3월 21일 주미 터키대사의 시신을 고국인 터키로 옮기는 임무를 맡았다. 여기에는 상당한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미주리가 터키로 향한다는 것은 미국이 터키와 그리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정치적인 제스쳐였다. 당시 그리스는 지중해로 패권을 노리는 소련의 사주를 받은 공산주의자들이 내전을 일으킨 상황이었다. 소련이 세력을 확장하면서 위협을 느낀 것은 터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미주리의 입항을 환영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미주리는 입항하면서 예포를 18발 발사함으로써 최대의 예우를 갖추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리스를 들러 소련을 견제한 것은 물론이다.

이후로 대서양 함대에 배속되어 항해훈련을 주로 하다가 1949년 9월 23일부터 1950년 1월 17일까지 오버홀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뜻하지 않은 전쟁 준비가 되고 말았다.

2.3.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미주리는 8월 19일 UN군에 합류하기 위해 노포크에서 출항했다. 9월 14일 큐슈의 서쪽에서 UN군과 합류한 미주리는 바로 스미스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미주리는 한국 영해에 진입한 최초의 미군 전함이 되었으며 UN군과 합류한 바로 다음 날인 15일 삼척 앞바다에서 삼척에 포격을 가했다. 이는 인천 상륙 작전의 양동작전의 성격이 짙은 것으로 삼척에 상륙 전 사전포격을 가하는 것처럼 움직인 것이다. 이후 중순양함 헬레나[8]와 구축함 두 척과 합류한 미주리는 미 8군의 진격을 지원하게 되었다. 미주리는 9월 19일 인천에 도착하였으며 10월 10일 제5순양함 전대장 히긴스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10월 14일에는 사세보에 도착하여 7함대 사령관 스트러블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에식스급 항공모함 밸리 포지의 호위함으로 동해안에 있던 미주리는 10월 12일부터 26일까지 청진과 단천에 포격을 가했으며 그 뒤에는 원산을 포격했다. 12월 23일에는 흥남 앞바다에서 미군 제3보병사단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철수하는 것을 지원했다. 이른바 흥남 철수다.

1951년 3월 19일까지 미주리는 항모 호위와 지원 포격 임무를 수행하다가 요코스카로 물러나 3일 뒤인 3월 24일에 요코스카에 입항했다. 그리고 잠시간 임무에서 해제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훈련에 쓰이다가 오버홀을 다시 받고 1952년 10월 17일 요코스카로 돌아와 7함대 사령관 클라크 제독의 기함이 되었다. 다시금 해상 포격 임무에 종사하게 되었는데 단천, 청진, 성진, 원산, 함흥, 흥남이 미주리의 타겟이었다. 이 임무는 1953년 1월 2일까지 지속되었다.
파일:jYvxZWOumJ8jcm2mN1BJo74DqzSJ1Ege0HnFOCH1EbRpQvjlbIQV7t_1QnaB1oOypGcFuPLvwTa4WyAteakRD37pVYThIswcS3ZCMQx4t1hdmSRwt_n1ZzkBqp_9M_4IZ2kvscw_kbKJDEOxQ7OE5A.png
파일:Syngman and Francesca visited USS Missouri.jpg
1950년 10월, 16인치 함포로 청진을 포격하고 있는 미주리함. 1951년 2월 3일, 미주리함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영부인 프란체스카.
미주리는 1953년 1월 5일 사세보로 잠시 돌아갔다가 23일 영국 해군제독 가이 러셀의 방문을 받은 뒤 바로 다음 주부터 다시금 지원 포격에 나섰다. 원산, 단천, 흥남 등지를 두들기며 북한군의 동해안 보급선을 끊었다. 그러나 3월 6일 미주리의 함장 워너 러셀 대령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면서 임무는 잠정 중단되었고 기함 임무도 2번함 뉴 저지에게 넘겼다. 미주리는 4월 7일 요코스카에서 출항하여 5월 6일 노포크로 귀항했다. 그리고 미주리의 한국전쟁은 그대로 끝났다.

2.4. 퇴역

이후 미주리는 주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항해훈련을 하다가 1954년 9월 18일 퓨젯사운드 해군 공창에서 오버홀을 받고 1955년 2월 26일 퇴역하여 예비 전력이 되었다. 미주리는 태평양 예비함대에 배속되어 브레머튼에 정박하여 연간 10만 명 정도의 관광객들을 받았다.

2.5. 재취역

1984년 여름, 미군은 잠들어있던 미주리를 다시 깨워 롱비치 해군 공창에서 현대화 개장을 시작했다.

퇴역기간동안 변화한 해전의 양상에 따라 더 이상 대공방어수단으로써의 역할을 기대하기 힘든 20mm 오리콘 기관포40mm 보포스 대공포 및 4기의 5인치 양용포를 철거하고, 그 공간에 4연장 하푼 대함유도탄 발사대 4문(총 16발), 4연장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발사대 8문(총 32발)과 20mm 팰렁스 CIWS 4문으로 화력과 대공방호력을 강화했다. 또한 유도탄의 운용을 위해 레이더[9]와 사격통제시스템[10]을 신형 장비로 교체하였다.

무장뿐만아니라 생존성 또한 향상되었는데 견인식 어뢰기만장치[11]와 적의 레이더를 탐지하고 교란, 기만하기 위한 전자전 체계[12]를 탑재하였으며 적의 대함미사일에 대응하기 위한 채프 발사대[13]를 추가하는 등의 개수도 이루어졌다.[14]

이러한 재무장을 마친 1986년 5월 10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재취역하여 전 세계에 미 해군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데에 쓰이게 된다.

미주리는 4개월 후 호주, 디에고 가르시아, 이집트, 터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파나마 등 8개국에 돌아다니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1987년 7월 25일 중동의 정세가 급변함에 따라 미주리는 인도양으로 급파되었다.[15] 페르시아만, 인도양, 북아라비아해 등지에서 100일 이상 수상에 머물던 미주리는 1988년 미국으로 귀환했다. 이후 몇 개월 뒤 림팩 훈련에도 참여하였다.

1989년 롱비치 해군 공창에서 정기 점검을 받았고 후반기에는 독립기념일 불꽃놀이에 참여하는가 하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수상한 배우와 가수들이 미주리의 선수쪽 갑판에서 락 뮤직 비디오를 촬영하기도 했다.

1989년 10월 24일 한국에 방문하여 부산광역시에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림팩 훈련에 참여하였는데 이 때는 대한민국 해군도 참여하였다.

2.6. 걸프 전쟁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쿠웨이트를 침공했다. 8월 중순에 조지 부시 대통령은 선발대와 함께 강력한 함대를 사우디 아라비아로 파견하였다. 미주리는 당초 서태평양을 순회할 예정이었으나 출항하기 며칠 전에 모든 일정이 취소되고 중동으로 파견되었다.

11월 중순에 아라비아만으로 향한 미주리는 진주만에서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필리핀을 경유하여 태국을 거쳐 훈련을 진행하며 이동했다. 포격 이외에도 화학전을 대비한 훈련이 주가 되었다.

미주리가 아라비아만에 도착한 것은 1991년 1월 초로 1월 17일에 이라크군을 향해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총합 28발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SS_Missouri_(BB-63)_Tomahawk.jpg

2월에는 미주리가 드디어 16인치 주포를 사격하였다. 1950년대 한국 전쟁 이후로 처음 쏘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16인치 포탄 783발을 발사했으며 무인기로 탄착관측사격을 실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2월 28일 이라크가 항복하면서 전쟁도 끝나고 미주리도 귀환하였다.

2.7. 재퇴역

1991년 추수감사절 직후 미주리는 마지막 임무를 부여받았다. 바로 50년 전 진주만에서 1941년 12월 7일 숨진 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미주리의 마지막 공식 항해는 미국 본토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1,000발의 16인치 포탄과 6,000발의 5인치 포탄, 그리고 16개의 하푼 미사일과 남은 토마호크 미사일을 하역해야 했다.

미주리는 1992년 3월 31일 롱비치에서 마침내 퇴역하였다.

1998년 5월 4일 해군장관 존 달트는 미주리를 호놀룰루의 미주리 기념사업회에 기증함으로써 완전히 미주리를 민간에 이양하게 되었다.
파일:미주리기념관.jpg
현재의 미주리, 하얀 건물은 애리조나 기념관이며 건물을 떠받친 철구조물이 바로 USS 애리조나의 선체이다.
현재 미주리는 진주만의 포드 섬에 정박해 있으며 아직도 바다 속에 있는 애리조나의 애리조나 기념관 근처에 있다. 그러니까, 미국의 태평양 전쟁 참전의 시작을 연 전함과 태평양 전쟁의 종전을 알린 전함이 서로의 근처에 있는 것. 투어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2차대전의 시작을 알린 전함과 끝을 알린 전함이 서로 마주보도록 한 의도적인 배치라고 한다.

미주리도 박물관으로 보전이 되어 있기 때문에 애리조나를 보러 갈 때 같이 들르기에 좋다. 미주리는 애리조나와 달리 입장료를 받지만, 최소 3일에서 최대 8주 전에 예약을 하지 않으면 길게 대기줄을 서서 입장 가능 여부를 운에 맡겨야 하는 애리조나와 달리 당일치기로도 수월하게 방문이 가능하다.

2018년 2월경에 팰렁스, 하푼, 토마호크 등 현대전 무장을 들어내고 2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 때의 모습으로 다시 되돌린 것이 확인되었다.[16] 제적은 이미 1995년에 실행됐기 때문에 현대전 무장이 철거된 것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 다시 갖다놨는지 2023년 7월 기준으로 팰렁스와 토마호크 발사관은 다시 장착되어 있다.

3. 매체에서의 등장

일본의 매체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매체에서 아이오와급 전함이 등장한다 싶으면 대체로 미주리인 경우가 많다. 주역으로 나온 영화도 있고 스쳐 지나가듯 나오는 경우도 많다. 아이오와급의 얼굴마담인 셈. 일본 매체에서 등장하지 않는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파일:external/navyfield.co.kr/Missouri.gif* 네이비필드에서 미국 AUS 함선으로 등장한다.
파일:nnm-5.jpg* 모던 워쉽에서 현대화 개장 사양으로 등장. 같은 골드구매 전함인 야마토와는 달리 미사일을 장비했고, 방공이 그나마 제대로 붙어 있다. 다만 체력이 타 전함들에 비해 낮은데다 야마토에 비해 강할 뿐이지 방공도 그리 강한 편은 아니고, 화력은 오히려 야마토에 비해 좀 떨어지는데다 어그로가 심하게 끌리는 건 야마토랑 비슷해서 야마토처럼 주력픽은 아니고 노가다 혹은 한방딜뽕이나 조커픽 용도로나 쓰였지만, 현재 더 강한 현대화 전함들이 계속 출시되면서 평가가 바닥을 찍게 되며 현질할 여력이 없거나 미주리를 몬다는 뽕맛을 원하는 유저들만이 타는 현대화 전함이 되었다.
파일:external/worldofwarships-asia.gcdn.co/8bea91c0-a185-11e6-851d-38eaa7374f3c.jpg* 월드 오브 워쉽에서 프리미엄 9티어 전함으로 등장한다. 레이더를 달아서 근처에 적 구축함의 접근을 봉쇄해버린다.
파일:Naval Creed 미주리.png* Naval Creed:Warships에서 프리미엄 5티어 전함으로 나온다, 전용 레이더의 성능은 좀 거시기 하지만, 전용 대공 소모품은 항공모함의 공격 분산도만 올리지만, 동시에 적포탄의 분산도도 올려서 사용하기 좋은 소모품.
파일:Screenshot_20210912-203020_Modern Warships.png* 벽람항로 2019년 크리스마스 특집방송 이벤트로 엔터프라이즈 성우인 이시카와 유이가 미주리를 방문하여 이 전함의 이곳저곳을 가보고 촬영하였다. 마지막에는 헬리콥터를 타고 배 주변을 돌면서 전함 전체의 사진을 찍기도. 중국게임 특집방송으로 미국전함을 방문한 일본성우(...) 가기전에 나온 말로 내년에 미주리를 실장할 예정이니 가서 함선 조사를 해달라 부탁하는걸 보면 벽람항로에도 미주리가 나오는게 확정된 듯. 다만, 이유는 알 수 없으나 2020년은 물론 2021년에도 나오지 않았다.[22] 그러다 2021년 경위나선에서 아이오와급 2번함인 뉴저지가 먼저 출시됐다. 2022년 3월 이벤트인 깊게 울리는 메아리에서 새러토가가 은하수[23]의 미주리와 알래스카에게 연락하라는 것으로 오랜만에 다시 언급되었다. 정작 다음 이벤트에 나올지는 또 미지수. 그리고 2023년에도, 2024년에도 나오지 않고 있다...


[1] 이 부분은 미 해군의 미주리 설명을 참조하였다.[2] 에식스급 항공모함 렉싱턴의 태스크 그룹에 소속되었다.[3] 엔터프라이즈의 자매함인 그 요크타운급 1번함이 아니라 에식스급 항공모함이다.[4] 원래 카미카제를 할 경우 저공비행으로 비행하다 적함에 근접하면 수직 급상승을 했다가 수직으로 냅다 쳐박는 방식이였다. 하지만 조종사가 초보 파일럿이라 "될 대로 되라지" 식으로 어리숙하게 들이받아 저 모양이 된 것. 왜 수직상승해서 수직으로 들이받아야하느냐면 전함의 장갑은 보통이 아니기때문이다. 전함의 측면 장갑은 수백kg짜리 포탄이 800m/s의 속도로 날아와 날카로운 포탄 끝으로 쑤셔박는 것을 막아내는 것을 상정하고 만든 물건이다. 거기에 미주리는 아이오와급 전함인데, 이 아이오와급 전함은 1톤짜리 포탄이 날아와도 막아내는 수준의 장갑이다. 따라서 이러한 전함의 장갑이면 현대의 초음속 전투기가 들이받는 상황이 아니면 뭐가 날아와도 다 막아냈을 것이다. 그렇기에 측면이 아닌 수직으로 상승후 전함 측면의 장갑을 피해 장갑이 얇은 갑판위의 구조물에 들이받아 화재를 내는 것을 목표로 했던것이다.[5] 이때 조종사의 두 동강난 시신에서 찢어진 욱일기를 발견하였는데, 함장은 승조원 몇 명을 골라서 꿰매라고 시킨 후 관과 함께 수장했다.[6] 아이러니하게도, 저 당시 미주리의 함장은 과달카날 해전에서(1차 과달카날 해전) 중순양함 뉴올리언스급 중순양함 USS 샌 프란시스코의 함장이였던, 일본 함대와 교전하다가, 기리시마, 나가라와 다른 한척의 구축함의 포격에 샌프란시스코의 함교가 피탄당해 전사한 대니얼 J. 캘러헌의 동생 윌리엄 M. 캘러헌이였다. 마음만 먹었다면 시체훼손도 할 수 있었던 상황이였다. 여담으로 형의 이름이 명명된 플레처급 구축함 USS 캘러핸(DD-792)은 미주리가 공격당했던 해안 인근에서 3달뒤 카미카제 공격으로 격침 당했고, 가미카제 공격으로 격침당한 마지막 연합군 함정이 되었다.[7] 한쪽 다리를 절뚝 거리며 지팡이에 의지해 걸어와 항복 문서에 싸인을 하는 일본 측 인사는 A급 전범이자 외무대신인 시게미츠 마모루인데,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로 부상을 입어 당시에는 의족을 착용한 상태였다. 뉴스릴에서도 한국인 애국자에 의해 다리를 잃었다고 언급되었다.[8] 경순양함 헬레나와는 다른 배이다.[9] AN/SPS-49 조기경보레이더와 AN/SPS-67 대수상레이더. 기존의 SPS-8 레이더는 제거[10] 하푼 운용을 위한 SWG-1 사격통제시스템[11] AN/SLQ-25 Nixie[12] AN/SLQ-32[13] Mk36 SRBOC[14] 3번 포탑을 제거하고 미사일 수직발사관을 장착하는 개수안도 있었지만 이것은 막대한 예산이 요구되어 취소되었다[15] 이 때 이란 해군의 소형 고속정에 대응하기 위해 40mm 유탄발사기와 25mm 체인건과 같은 소구경 무장이 설치되기도 했다.[16] 완전히 복구한 것은 아니다. 완전히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려면 철거되었던 수십 개의 4연장 보포스 40mm 마운트, 단장 오리콘 20mm 마운트, 5인치 부포탑 4개를 다시 설치해야 하기 때문이다.[17] 운용을 돕기 위해 같이 탑승한 노인 참전용사가 당당하게 "전함은 이런 공격 따위로는 침몰하지 않아!" 라고 외치는 대사가 가히 압권.[18] 이때 작전실에서 함선의 상황을 체크하는 외계인의 당황한 모습이 캡쳐된다.[19] 이때 미주리도 3번 주포탑 격파 및 후방 탄약고 유폭이라는 매우 심각한 손상을 입었지만, 함체는 멀쩡하여 외계 함선 격침 후 자력 항해해 귀항했다.[20] 외계인 함선이 최후의 발악을 시도하고 있었음에도 이 마지막 한 발을 통신기지에 발사하면서 임무 완수를 대가로 주인공들과 함께 장렬한 최후를 맞는 듯 보였지만, 때마침 외계인들이 설치한 방어막이 풀리면서 대기 중이던 니미츠급 항공모함에서 긴급 발진한 슈퍼호넷들이 외계 함선에서 발사한 톱니바퀴 무인기인 쉬레더를 격추해 미주리를 구하고 외계 함선에 막타를 넣어준다.[21] 일반적인 포병사격은 8초 정도 걸리기 때문에 적이 피하는 경우도 있으나 미주리의 16인치 함포사격은 3초면 떨어지므로 쏘는 족족 소련군에게 맞는다고 보면 된다.[22] 추정 되는 이유로는 미주리가 일본에 있어 원자폭탄처럼 원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경화된 일본 서버에서 논란이 일어날 수 있어서 유저들 사이에선 만쥬가 일본 서버 눈치를 보느라 실장을 미룬 것이란 말도 있고, 단순히 이름이 유명하기에 나중에 내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23] 아마도 유니온의 팀, 조직 이름으로 보인다.[24] 1/350 스케일. 2차대전 당시(1945년)를 재현한 구판은 절판되었고, 퇴역 직전의 현대화 개수를 거친 1991년의 모습을 재현한 버전으로 리뉴얼되어 판매 중이다.[25] 1/200 스케일.[26] 2016년에 등장한 중국 모형회사. 타미야에서는 더이상 나오지 않는 1945년 버전을 주포 포탑까지 재현하여 고퀄리티로 뽑아내고 있다. 이외에도 아이오와, 뉴저지, 위스콘신 등 타 아이오와급 동형함 모형도 판매하고 있고, 몬태나급 전함 1/350 스케일 모형도 판매중.[27] 촬영당시 미주리에서 촬영하는 모습이 공개되기도 했다.[28] 다른 하나는 항공모함 옆에 붙어있다가 바지선이 뒤집힌 후로 계속 화력을 지원하다 후퇴한다.그런데 다른 순양함의 폭뢰보다도 피해를 주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