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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03:54:28

문학구장 소요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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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발단
2.1. 팬들과 프런트 간의 갈등2.2. 김성근과 프런트 간의 갈등
3. 전개4. 절정5. 결말 및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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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11년 8월 18일, 김성근 감독 경질 사태에 분노한 SK 와이번스 팬들[1]이 경기 직후 그라운드에 난입한 사건. 성숙한 관전 문화가 자리잡지 못했던 20세기에나 일어났을 법한 대규모의 관중 난동이 무려 2010년대에도 또 한 번 재현되었다는 점에서 야구팬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꽤 큰 충격을 안긴 사태였다.

해당 사건은 노리타 등장의 가장 직접적인 사건이기도 하였다. 당시 SK 팬덤은 대부분 이 사태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는데, 심지어 이 사태와 프런트 퇴진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슼갤은 2014년까지도 김성근 친화의 대표적인 갤러리였다. 2014년 말 김성근이 한화로 간 뒤 강성 감독 팬이 모조리 빠져나간 뒤에야 물갈이가 되었으며, 지금은 김성근을 세이콘이란 멸칭으로 자연스럽게 부르는 상황까지 이르렀다.

그라운드에다 불을 피웠었던 임팩트로 인해 당시 지역 민방 OBS에서 방영했던 구단 다큐멘터리 제목을 따서 불타는 그라운드 사건이라 불리기도 한다.

2. 발단

2.1. 팬들과 프런트 간의 갈등

김성근 감독과 프런트의 마찰이 외부로 노출되고, 심지어 재계약이 어렵다는 소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당시 김성근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있던 SK 와이번스 팬들은 프런트 측에 재계약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한다. 일련의 방법 중 하나가 바로 SK 와이번스 공식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인 '용틀임 마당'에 꾸준하게 재계약 요구 글을 릴레이 형식으로 계속 올린 것.[2]

게시판이 과도하게 과열되기 시작하자 프런트는 게시판인 용틀임 마당을 없애는 초강수를 두고 자유 게시판의 기능을 트위터페이스북으로 대체하며, 앞으로도 부활시킬 생각은 없다는 공지를 올린다. 이에 분개한 팬들은 장소를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으로 변경, 재계약과 용틀임 마당 부활을 요구하는 피켓을 들고 경기장으로 향한다.

2.2. 김성근과 프런트 간의 갈등

이미 2007년 첫 계약 당시부터, 김성근과 프런트 간의 갈등은 준비된 갈등이었다. 2007년 SK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부터 프런트에서 그의 사단도 아니며 원하지도 않은 이만수를 수석 코치로 부임시켰고,[3] 타 팀 감독의 계약기간이 3년인데 반해 2년 단기 계약을 맺었으며, 2007 시즌 초 홈구장 만원 사례에 마치 팀의 간판인 것처럼 대규모 팬티 퍼포먼스를 벌인 것을 볼 때, 프런트의 의도에 따른 2년 후 차기 감독이 이만수인 것은 기정 사실이나 다름없었던 것.

하지만 예상 외로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2연속 우승을 하며 최고의 성과를 거뒀고, 그에 따라 2009년 3년 재계약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단 내 김성근 감독의 영향력도 커지게 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고 볼 수 있다. 2009년 이만수가 1군 수석코치에서 밀려나 2군 감독으로 이동하게 된 것도 그러한 맥락으로 해석 가능하다. 게다가 재계약 후 나온 당시 신영철 구단 사장의 막걸리 야구 발언, 김성근 감독의 이진영 등 FA 유출과 소극적인 영입 태도에 대한 구단에 불만을 나타냈던 것은, 당시까지는 그러려니 넘어갈 문제였지만 이 시기 들어서는 이것이 프런트와 감독간 파워 게임을 하는 이상기류였다는 것이 파악되었다.

심지어 김성근 감독은 프런트의 지원에 대한 불만을 외부로 표출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양측의 의견에는 모두 일리가 있는데, 김성근은 외부 영입에 소극적이고 이진영 등 FA를 놓치는 과정에서 너무 적은 자금만 배정하는 SK 프런트의 행보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반면 프런트 입장에서는 계속된 우승-준우승 과정에서 선수 연봉이 너무 올라갔기 때문에 이를 부담스러워했고, 2군 선수 중 몇몇 선수를 1군에서 같이 데리고 다니면서 성장을 체크하겠다는 김성근 감독의 의견과 충돌하였다.

즉 김성근 감독 측에서는 왜 팀을 위해 지원을 안 해주느냐였고, 반대로 프런트 측에서는 이미 지원할 만큼 해주고 있다는 쪽이었다. 다만 1군 선수들의 연봉이 올라가고 있을 뿐 실제로 지원이 오는 건 아니었으니 김성근 감독 입장에서는 그렇게 인지하는 것이 당연했던 상황. 결국 이 과정에서 서로간에 불만이 더욱 쌓여갔다.

이에 프런트 측은 차기 감독감으로 키우던 이만수 당시 수석코치에게 보다 빠르게 감독 직을 넘기는 것도 고려했으나, 성적이 위낙 좋았고[4]. 계약기간이 2011년으로 끝나며 원래 감독 임기는 철저히 보장해 주는 원칙이 있었기에 두 번째 재계약 제의만 하지 않는 선에 머무른다.[5] 이 과정에서 프런트 직원의 말실수 등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등, 양 측 모두 지속적인 언론 플레이를 벌였다.

심지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 달리, 애초에 2011년 초 SK는 "감독 최고 대우는 당연하다"며 김성근 감독 재계약을 천명한 상태였다. # 하지만 정작 언론에는 그렇게 말해놓고 재계약 관련해서는 계속 지지부진하고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 정작 김 감독이 아닌 이만수의 거취 문제 등을 주로 이야기하며 같이 갈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이처럼 구단이 재계약에 적극적이지 않자, 김성근은 결국 시즌이 한창 중인 8월 17일 SK 측과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자기가 먼저 공개 선언하는 초강수를 둔다. 요약하면 만료가 되는 이번 2011시즌까지 감독직을 수행한 후 물러나겠다는 것. 실제로 당시 김성근 감독은 다음날 감독으로 정상 출근하며 이번 시즌은 확실히 하고 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프런트는 이를 자신들에 대한 도발로 받아들였으며, 전날 공개선언을 이유로 들어 그 다음날인 8월 18일 바로 김성근 감독을 전격 해임시키고, 이만수 2군 감독을 1군으로 끌어올려 감독대행으로 세우는 초강수로 맞대응한다.

3. 전개

재계약 결렬과 전격 해고라는 갑작스런 사태에 SK 와이번스 팬들은 다른 커뮤니티들과 연합하여 들고 일어났고, 8월 18일 문학야구장 1루 측 외야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한다. 당시 운집한 300여 명의 팬은 대형 현수막 8개를 내걸고 SK 프런트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프런트는 이날 소요에 대비해 전경 1개 중대를 요청, 배치했다. 그리고 경기가 시작되자, 시위 인원들은 외야에서 준비된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민경삼이 물러가라!"
"신영철도 물러가라!"
"프런트는 사퇴하라!"[6]
당시 시위 구호

해당 시위 진행 중 삼성 채태인의 결승 투런포가 터졌고, 하필이면 그게 또 1루측 외야 성난 관중이 있는 곳으로 떨어지자 이성을 잃은 관중들은 방방 뛰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7] 이외에도 경기 도중 관중 난입만 총 네 번이 있었는데, 1회초에 상의를 탈의한 남성이 난입한 후 붙잡혔고, 두 번째는 4회 도중 웃통을 벗은 관중이 그라운드로 난입했으며, 세 번째로 9회 송은범 유니폼을 입은 관중이 외야에서 뛰어내려 홈으로 전력질주하다 제지당했다. 마지막으로 경기 종료 후 덕아웃으로 한 관중이 들어와 인터뷰를 하던 이만수 감독대행에게 욕설을 하다 끌려 나갔다.

물병 등 쓰레기가 그라운드에 떨어져서 수 차례 경기가 일시 중단되었으며, 아예 쓰레기통이 통째로 떨어지는가 하면, 그물에 매달리는 관중까지 등장했다. 이에 일부에선 도원아재들이 문학에서 부활했다는 불명예스러운 비아냥까지 쏟아졌다.[8]

4. 절정

결국 경기는 채태인의 홈런으로 결판이 나, 2-0으로 SK가 패배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관중들은 순식간에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이기든 지든 선수들은 경기 후 관중을 향해 인사를 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이지만 이 날만큼은 분위기가 지나치게 험악하여 인사도 하지 못한 채 경기장을 빠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관중들을 진정, 해산시키기 위해 안전요원이 투입되지만 관중들은 이를 무시하고 오물을 던지기 시작했고, 곧 문학구장은 거대한 야유와 쓰레기에 뒤덮였다.

9시 경 문학구장에 조명이 꺼지자, 마침내 1루 측 익사이팅존의 낮은 펜스를 통해 수 백에 달하는 SK 팬들이 난입하기 시작한다.


파일:/image/poktannews/2011/08/18/201108182131773946_1.jpg

난입한 관중들은 유니폼을 불태우고, 이후 불펜 전기차를 타고 폭주하거나 경기장에 놓여있던 구단 집기나 냉장고 안의 음료수를 무단으로 훔치는 등[9] 심한 난동을 부리다가 20여 분 후 신고를 받고 경찰과 소방차가 출동하자 다시 펜스를 넘어 해산하였다. 21세기 들어 그라운드에 불을 지른 행위는 처음이며, 이 정도로 많은 인원이 난입한 경우도 1990년 잠실구장 패싸움 사건 이후로 최대 규모였다. 구단 측의 발표에 따르면 소요사태로 인해 약 3500만원 가량의 피해를 입었다.

한편 덕아웃과 구단 전시물 등도 심하게 훼손되었는데, 민경삼개XX, 신영철개XX, 프런트는 물러가라, 꺼져라 이만수, 유다 등등의 온갖 낙서의 향연이 펼쳐졌다.# ##

그 외에도 모욕적인 일이 많았다. 한 팬은 김성근 감독의 등번호와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마운드에 묻었다. 김성근이 경질되자 (감독으로서의) 그는 죽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동시에 "삼가 인천 야구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다.

5. 결말 및 반응

해당 소요 사태는 그 다음날 저녁 주요 지상파인 KBS, MBC, SBS 를 통해 전국적으로 보도되었다.KBS 뉴스9[10] 당시 이만수 대행을 비롯한 선수단 또한 이 사건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하고 있다.

SBS 8뉴스 MBC 뉴스데스크 일부 언론은 이를 스포츠 팬의 양상 변화로 풀이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 사건은 과거 스포츠 팬덤의 변화 양상을 보여주는 사건의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다. 그전까지의 한국 스포츠 팬덤은 경기의 승패에 주로 주목했던 반면, 이 시점부터는 프런트의 횡포 등 경기 외적인 요소까지 반응하기 시작한 것. 특히 온라인의 발달까지 결합하면서, 당시 팬덤의 움직임은 빠른 정보 전달로 더 넓은 범위의 주장을 포괄하게 되었고 조직의 규모도 훨씬 커졌다.

이는 SK 팬덤뿐만이 아니었는데, 2011년 LG 트윈스 청문회 사건도 비슷한 맥락으로 해설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같은 시간, 3차 청문회를 진행 중이던 LG 트윈스 갤러리 이용자 중 일부는 이왕에 할 거면 우리도 저 정도로 저지르고 보자는 이야기까지도 나왔다. 당시 프런트의 횡포에 대해 반발하고 있던 팬덤이 많았던 만큼, 디시인사이드를 중심으로 한 일부 인터넷 팬덤에서도 재밌다거나 속이 시원하다며 옹호하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해당 사건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로 인해 한동안 문학 구장의 관중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이는 SK 와이번스 프런트 퇴진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나마 한 때의 소동으로 여겨지며 그럭저럭 넘어가는 것 같았지만, 김성근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부임하여 거품이 벗겨지고 추악한 실체를 드러내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다만 노리타들이 김성근따라 다 떠나가면서 SK팬덤도 물갈이가 이뤄졌기 때문에 현 SK 팬덤은 이 사건을 SK 팬덤의 잘못으로 보지 않고 노리타들의 깽판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11] 한화 이글스가 김성근의 투수 혹사의 부작용으로 경질 뒤에 심각한 부진에 빠지자 이를 조롱하는 노리타들을 보며 '타 팀 감독으로 취임하지 않는 이상 절대 물이 빠지지 않는다'며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을 해주기도.

[1] SK 와이번스 프런트 퇴진 운동 문서에도 나오지만 노리타와 SK 팬덤이 어느 정도 분리된 건 2011시즌 끝날 무렵이나 되어서였다.[2] 2007년에도 같은 방식으로 이호준의 FA 계약을 요구한 바 있으나 실패했다.[3] 심지어 이만수는 삼성 시절부터 김성근과 썩 좋지 않은 관계였다.[4] 우승 3회(2007, 2008, 2010), 준우승 1회(2009). 심지어 첫 부임인 2007년부터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5] SK 프런트는 강병철, 조범현, 이만수, 김용희, 트레이 힐만까지 감독 모두 임기를 보장해주었다. SK에서 임기 못 채우고 잘린 감독은 아직까지 김성근 뿐이다. 다만 의외로 김성근 감독 또한 쌍방울 시절 이전까지는 모두 임기 후 재계약을 거부당한 것이지, 임기 중 경질당한 적은 없다.[6] 당시의 모습은 8월 18일 경기 영상인 여기서 간접적으로나마 볼 수 있다.[7] 여담으로 이날은 상대 팀인 삼성 라이온즈의 대체 외국인 선수 저스틴 저마노의 KBO 데뷔전이기도 했다. 하필 데뷔전에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데도 6이닝 무실점을 기록한게 놀라울 따름. 당시 SK 선발이었던 엄정욱도 이 피홈런이 옥에 티였을 뿐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6이닝 8K를 잡는 호투를 역시 선보였다.[8] 실제로 그물망에 매달려 시위했던 관중도 삼미 슈퍼스타즈의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삼미 때부터 삼청태현을 응원하다 인천에 새로 창단한 SK로 갈아탄 올드 팬으로 추측.[9] 그 와중에 캐치볼이나 홈플레이트에서의 포수놀이를 하는 이들도 있었다.[10] 여담으로 당시 앵커로서 이 사건을 보도한 민경욱은 당시 SK의 단장이었던 민경삼과 사촌 지간이다.[11] 다만 당시 폭동에 참여했던 사람들 중에서 노리타가 아닌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는 걸 무시할 수는 없기에 무조건적인 꼬리 자르기라고 까는 사람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