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관 | 남평 문씨[1] |
출생 | 1929년 2월 25일[2] |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중흥리 (현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 | |
사망 | 2014년 6월 2일 |
광주광역시 | |
학력 |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의학 / 학사)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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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문병갑은 1929년 2월 25일 전라남도 광주군 서방면 중흥리(현 광주광역시 북구 중흥동)에서 아버지 문봉식(文琫植)과 어머니 광산 김씨 김상언(金祥彦)의 딸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그는 광주서공립중학교 재학 중이던 1944년 6월 24일, 동급생에게 "미군비행기에 조선인 비행사가 타고 있는데 조선사람은 어떻게 하여야 좋은지 중학교 선생에게 질문하였더니 '조선사람은 조선사람으로서의 길을 가면 된다'라고 하더라"는 말을 전했으며, 1944년 7월 중순에도 동급생에게 "일제의 구축함이 목포항을 출발하였는데, 미국 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승무원 다수가 사상당하였으며 현재 목포시립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수병(水兵)들을 보았다"는 말을 전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반일 시국담을 유포하던 그는 결국 밀고를 접수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1944년 9월 26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임시보안령 및 해군형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사가 형량이 약하다며 공소를 제기했고, 1944년 12월 2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장기 3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광복 후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53년 1회로 졸업했으며#, 이후 산부인과학교실 교수에 임용되어# 산부인과 과장을 역임했다. 은퇴 후에는 2014년 6월 2일 고향 광주광역시에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문병갑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으며, 그가 사망한 지 이틀 뒤인 2014년 6월 4일에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