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문대식(文大植) |
생몰 | 1923년 1월 11일 ~ 1973년 3월 28일 |
출생지 | 전라북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1] |
사망지 | 충청남도 금산군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문대식은 1923년 1월 11일 충청남도 금산군 금산읍 중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문방구 점원으로 일하다가 1940년 4월 창고를 청소하던 중 일본 <매일신문(每日新聞)〉에서 1909년에 발행한 세계지도를 발견하고 그 내용을 검토한 결과 한국이 본래 독립국임과 국기(國旗)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후 그는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에 부끄러워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1940년 5월 11일, 문대식은 금산읍의 각종 업소에 근무하는 18세 내외의 청년 동지 7명과 더불어 항일결사 시장친우계(市場親友契)를 결성했다. 그리고 그해 7회에 명칭을 진락동지회(進樂同志會)로 변경하고 일제의 조선인 지원병 모집에 반대하여 불합격 자초 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매달 15일에 모임을 갖고 자원병 대상으로 지명된 청년들이 고의로 불합격 처분을 받도록 유도했다. 또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과 접선하여 항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하고자 동지인 최병무를 중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고, 이에 필요한 여비 200원은 회원들이 40원씩 분담하여 마련했다.
한편 문대식은 1940년 9월 17일 정해안, 박승묵 등과 더불어 금산군 남이면에 소재한 관광명소인 진락산동굴(進樂山洞窟)의 암석에 페인트로 대형 태극기를 그리고 조선독립만세라고 조각된 목탑을 건립했다. 하지만 이 일이 발각되면서 1941년 2월 17일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2년 5월 13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일본 당국의 감시를 받으며 어렵게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고, 이후엔 금산군에서 평범하게 지내다가 1973년 3월 2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문대식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현 충청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