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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어: أبو عبد الله محمد الثاني عشر영어: Abu Abdallah Muhammad XII / Boabdil
재위: 1482년 ~ 1483년 4월, 1487년 4월 ~ 1492년 1월 2일
생애: 1460년 ~ 1533년
그라나다 나스르 왕조 최후의 군주이자 이베리아 무슬림 최후의 군주. 그의 항복으로 이베리아의 최후의 무슬림 왕국은 멸망하였고 가톨릭의 레콩키스타가 완료되었다. 아부 압둘라의 스페인식 발음인 '보압딜'로도 알려져 있다. 아불 하산 알리 빈 사드의 아들로, 카스티야와의 전쟁이 이어지던 1482년 모친 아이샤와 함께 부왕에 반기를 들어 즉위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그는 카스티야 군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고, 사드가 복위하였다. 이사벨라 1세에 복속하여 석방된 무함마드 12세는 카스티야와 동맹하여 사드와 그의 후계자인 무함마드 13세 (앗 자갈)와 내전을 벌였다. 그틈에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은 1487년 그라나다 왕국의 서부를 완전 정복하였고, 무함마드 12세 역시 그라나다를 장악하며 복위할 수 있었다.
주군인 이사벨라 1세가 무함마드 13세의 축출 후 기존 영토를 반환할 것이라 여긴 무함마드 12세는 여전히 무함마드 13세의 수중에 있던 동부에 원군을 보내지 않았고, 아예 기독교 연합군을 돕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1489년 동부를 완전 정복한 이사벨라와 페르난도 2세가 예상과 달리 점령지를 돌려주지 않자, 무함마드 12세는 복속을 철회하고 선전포고를 하며 맞섰으나 오히려 그라나다에서 포위되었다. 6개월의 공방전 끝에 무함마드 12세는 항복하였고, 이로써 그라나다 토후국은 멸망하였다. 폐위 후 알푸하라[1] 영지로 은퇴한 그는 후일 페스로 망명하여 여생을 보냈다.
2. 생애
무함마드 12세(향후 '무함마드'로 서술)의 정치 인생은 10여년간 지속된 그라나다 멸망전을 따라 전개된다.2.1. 1차 치세
무함마드는 아불 하산 알리 빈 사드와 아이샤 (무함마드 9세의 딸로 추정)의 아들로, 1470년대 들어 알리가 기독교도 출신의 후처를 총애한 것에 불만을 품은 모후와 음모를 계획하였다. 1482년 6월, 알리가 로자에서 페르난도 2세와 맞서던 틈에 무함마드는 아벤세라즈 (바누 사라즈) 가문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술탄이 되었다. (무함마드 12세) 다만 알리가 말라가를 거점으로 세력을 유지하며 한창 전개되던 카스티야의 침공에 있어 전공을 세우자, 불안해진 무함마드는 코르도바 방면의 루세나를 공격했으나 장인인 로자 성주 이브라힘 알리아타르가 전사하는 등 패배하였다. 철수 도중 무함마드는 낙마하였고, 진창에 빠진 말을 구하려다 카디스 후작 로드리고 폰세 드 레온에게 사로잡혔다.[2] (1483년 4월)2.2. 부친, 숙부와의 내전
이에 알리가 복위하였고, 그라나다는 재통합되는 듯했다. 한편 무함마드는 페르난도와 친해졌고, 후자는 그라나다의 내전을 재개시키기 위하여 복속과 배상금 납부의 조건 하에 무함마드를 석방하였다. (코르도바 협정) 1483년 가을, 무함마드가 안달루스로 돌아오자 알리는 그를 종교의 배신자로 규탄하는 파트와를 반포하였다. 1484년 스페인 군은 알로라, 알로자이나, 세테닐 등을 점령하였고 무함마드는 과디시를 거쳐 알메리아에서 동생 유수프와 재회하였다. 한편 뇌전증으로 인해 병약해진 알리는 동생 무함마드 앗-자갈에게 병권을 맡겼고, 후자는 알메리아로 진격하였다.무함마드는 유수프를 그곳에 남기고, 자신은 원군을 청하기 위해 페르난도의 진영으로 향하였다. 다만 원군이 편성되기 전에 도시가 함락되고 유수프는 처형되었다. (1485년 2월) 한편 그해 봄, 지속되는 내전을 틈타 스페인 군은 그라나다 서부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카디스 후작 로드리고는 대포를 앞세운 15일 간의 공성전 끝에 그라나다 서부의 거점 론다를 점령하였고, 뒤이어 그라나다의 해군 기지인 마르베야도 함락되며 그라나다의 서부 방어선은 사실상 붕괴되었다. 같은해 6월, 중병에 걸린 알리는
2.3. 카스티야와의 동맹과 복위
그해 말엽, 재차 안달루스로 돌아온 무함마드는 그라나다 시내의 알바이신[4]을 장악했으나 앗-자갈에게 패하였다. 이후 유력 가문들의 중재로 협상에 나선 양측은 대의를 위해 내전의 중단에 합의하였고, 무함마드는 중서부의 로하를 영지로 받았다.[5] (1486년 초엽)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그해 5월, 스페인 군이 로하를 점령하며 무함마드는 재차 포로가 되었다. 페르난도는 무함마드의 복속 조건을 구체화하여 그가 스페인 군을 도울 것을 명시하였다. 약속과 함께 석방된 무함마드는 비밀리에 페르난도와 연락을 취하며[6] 로스 벨레즈를 거쳐 그해 10월 알바이신에 침투, 지지 세력을 모았다.1487년 4월, 페르난도와 이사벨라는 그라나다 최대 항구이자 서부의 마지막 거점인 말라가의 점령을 위해 그 동쪽 관문인 벨레즈 말라가를 포위하였다. 무함마드의 병력은 스페인 군을 도왔고, 반대로 앗-자갈은 친히 구원에 나섰다. 다만 그는 알바이신의 무함마드를 견제하기 위해 알함브라에 상당수의 수비대를 남겨야 했기에 제한된 병력만을 차출할 수 있었고, 이마저도 카디스 후작 로드리고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에 절망한 벨레즈 말라가의 수비대는 10일만에 목숨 및 재산 보장의 조건 하에 항복하였다. 한편 앗-자갈의 우려대로 그의 부재를 틈타 무함마드는 알함브라를 장악하였다.
2.4. 그라나다 멸망전
15세기 말엽 그라나다 토후국
벨레즈 말라가에서의 패전보를 접한 귀족들은 별 저항 없이 무함마드의 복위를 인정하였고, 이를 확인한 앗-자갈은 여전히 자신에 충성하는 동부로 향하였다. 복위 후, 같은해 5월 무함마드는 재차 페르난도와 접촉하여 함께 앗-자갈에 맞서고 그의 수중에 있는 동부 지방을 얻는 대가로 그라나다를 할양한다는 협정을 맺었다. 한편 같은 시기 페르난도는 말라가에 두 차례 관대한 조건 하의 항복을 제안했으나 모두 거절당하자 포위망 구축에 나섰다. 동부 과디시에 있던 앗-자갈은 말라가에 원군을 보내었으나 카스티야를 돕기로 한 무함마드는 약속대로 이를 격퇴해버렸다.
2.4.1. 말라가 공방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말라가 수비대는 맹렬히 저항하였고, 페르난도 역시 알헤시라스의 폐허에서 한세기 반 전에 쓰인 석조 포환들을 회수하여 재사용할 정도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공격을 퍼부었다. 포위가 장기화되자 이사벨라 역시 남편과 합류하여 스페인 군의 사기를 높혔고, 후일 그들과 사돈이 되는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도 플랑드르 선박을 통해 군수품을 전달하였다. 여름이 다가오자 페르난도는 공성탑을 만들고 땅굴을 파서 성벽을 돌파하려 했으나 수비대는 기습으로 공성탑을 파괴하고 반대편에서 땅굴을 파는 등 포위 측의 모든 시도를 무산시켰다. 특히 마그렙 출신과 무왈라드 (이슬람으로 개종한 기독교도) 병사들은 보복을 두려워하며 필사적으로 싸웠다.하지만 3개월의 접전 끝에 스페인 군은 해자에 놓인 다리의 성탑을 점령하였고, 성내에서는 식량이 고갈되어 개와 고양이는 물론 과실수의 잎을 따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무함마드 역시 말라가에 항복 협상에 나설 것을 권고하였다. 결국 수비대장 하마드 앗-타그리는 주민들이 항복 협상에 나설 수 있도록 병력을 히브랄파로 성채로 철수시켰다. 협상 끝에 도시는 페르난도의 자비에 맡기며 무조건부로 항복하였고, 6일 후 하마드도 항복하였다. 페르난도는 저항에 대한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1만 5천에 달하는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았고, 포로가 된 하마드 역시 처형되었다. 무왈라드 병사들은 배교에 대한 보복으로 막대기에 관통되거나 화형을 당하는 등 잔혹한 최후를 맞았다.[7]
2.4.2. 앗-자갈의 항복
1487년 가을 기준 앗-자갈은 바자, 과디시, 알메리아를 지니고 있었다. 1488년 그는 스페인과 일시 휴전을 체결했으나 이듬해 봄, 전쟁은 재개되었다. 알무녜카르와 살로브레냐를 점령한 스페인 군은 1489년 5월, 동부의 최대도시 바자를 포위하였다. 앗-자갈은 친히 수비를 맡으며 방어 의지를 보였다. 과거부터 요새화되어 두터운 성벽이 둘러진 바자는 대포에도 별 타격을 받지 않는 등 견고함을 자랑하였고, 공성전은 장기화되었다. 포위군은 재정난을 겪으며 사기가 저하되었고, 페르난도는 장교들의 해임을 거론하며 압박을 가하였다.그후 이사벨라 역시 포위 측에 가담하였고, 카스티야 군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여긴 앗-자갈은 말라가와 같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수비 병력이 건재했음에도 그해 12월 항복하였다. 말라가와 달리 바자는 상대적으로 관대한 처우를 받았고, 앗-자갈은 스페인의 봉신이 되어 남은 영토인 과디시와 알메리아를 넘긴 후 알푸하라로 은퇴하였다.[8] 1490년 앗-자갈은 안달루스를 떠나 모로코로 망명, 군대를 모아 돌아오려 했으나 이듬해 무함마드의 청탁을 받은 와타스 왕조의 술탄 아부 압둘라 앗-셰이크 무함마드에 의해 체포되어 실명당한 후 1494년 자얀 왕조령 틀렘센에서 사망한다.
2.4.3. 대카스티야 전쟁과 멸망
알함브라 궁전의 성벽
왕국의 동부를 모두 정복한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코르도바로 회군하였다. 한편 무함마드는 카스티야가 약속과 달리 동부 점령지를 돌려주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었다. 특히 동부 중에서도 그의 영토이던 벨레즈 루비오와 벨레즈 블랑코, 베라가 1488년 6월에 점령된 후 스페인 귀족들에게 분배된 것은 동맹의 진위를 의심케 하였다. 1490년 초엽, 페르난도는 무함마드에게 약속대로 그라나다 양도를 요구하였다. 무함마드는 이를 거부였고, 더 나아가 카스티야에 대한 조공과 복속을 철회하며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하였다. 무함마드의 이러한 결정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자신이 약속을 지키더라도 압도적 우위에 있는 (그리고 사실상 십자군에 나선) 스페인 측이 약속대로 동부 점령지를 돌려주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작용했거나, 혹은 안달루스 각지의 피난민이 몰려든 그라나다의 여론이 도시를 그냥 넘기는 것에 반발하여 항전 결정을 이끌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이에 페르난도는 코르도바에 최대 8만 병력을 집결시켰고, 무함마드는 주전파의 거두인 무사 이븐 아비 알-가산을 기병대장으로 임명하여 전쟁 (혹은 지하드)을 준비하였다. 1490년 여름, 페르난도는 5천의 기병과 2만의 보병을 이끌고 두 차례에 걸쳐 각각 30일과 15일간 그라나다 부근의 베가 평원에 대한 초토화 작전에 나섰다. 스페인 군은 일대의 농경지와 마을들에 대대적으로 방화하여 그 연기가 알함브라를 뒤덮었고, 이븐 바투타가 칭찬한 그라나다 외곽의 과수원과 정원들도 폐허로 변하였다. 무사는 그라나다 기병대를 소규모로 나눠 스페인 군을 요격했지만 낙오 부대를 처리하는데 그쳤고, 페르난도는 전리품과 가축 무리를 대동한 채로 귀환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15인의 스페인 특공대가 그라나다에 침투하여 대사원 문에 아베 마리아를 새긴[9] 후, 시장에 불을 지르고는 떠났다. 다만 감옥의 7천 기독교도 포로에 대한 탈옥 시도는 실패하였다.[10]
오직 그라나다와 알푸하라스 산지만을 지니고 있던 무함마드에 있어 임박한 카스티야의 침공은 중과부적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그는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모로코의 와타스 왕조에 구원을 청하였다. 다만 전자의 술탄 카이트베이는 이미 오스만 제국에 맞서 아라곤 및 카스티야와 동맹한 상태였기에 규탄 성명을 내는 정도에 그쳤다. 와타스 조에서는 아예 회신이 없었고, 마그렙과 이집트에선 이후로도 카스티야 및 아라곤에 대한 밀 수출을 이어갔다. 한편 1년여간 준비를 마친 페르난도는 1491년 4월 11일, 그라나다 서쪽 8km 지점의 베가 평원에 거대한 병영 도시인 산타페를 세웠다. 아름다운 도시 그라나다를 온전한 상태로 얻고자 했던 그는 직접적인 공격 대신 포위를 통해 수비대를 고사시켜 항복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11] 산타페는 거리 구획이 나뉜 도시로 계획되었고, 이사벨라와 자녀들을 포함한 왕실 가족들도 입주하여 그라나다 점령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12]
산타페 건설로 그라나다 조정은 술렁였고, 귀족들은 항복을 두고 대립하였다.[13] 그러자 이번에도 무사가 나서 항전을 관절시켰고, 그해 7월 무함마드는 그와 함께 기병을 이끌고 출격하였다. 하지만 성문 근처의 라 카르투시아에서 벌어진 전투는 그라나다의 패배였고, 이후 무함마드는 수성으로 일관하였다. 다만 시간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이전 해의 초토화로 인해 제대로 식량을 비축하지 못한 그라나다는 점차 기근에 시달렸고, 결국 무함마드는 연로한 시장을 사절로 보내어 협상에 나섰다. 양측은 40일 간의 휴전을 맺었고, 무함마드는 그동안 원군이 오지 않는다면 항복하기로 약속하였다. (10월 5일) 휴전이 만료된 후 그라나다 조정은 항복을 논의하였다. 기독교도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며 반대하던 무사는 항복이 결정되자, 귀가하여 무장한 후 엘비라 성문을 통해 홀로 출정하였다.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14]
1491년 11월 25일에 체결된 그라나다 조약은 항복을 대가로 무슬림들에게 종교와 사법의 자치가 주어지는 관대한 조건을 보장하였다. 카스티야 출신의 개종 / 망명자들 역시 처벌 없이 마그레브로의 이주가 허락되었다. 무함마드는 2달의 유예기간 후 가톨릭 국왕 부부에 복속하기로 했으나, 여론의 반발을 우려한 그는 1492년 1월 1일에 후문을 통해 알함브라에 스페인 병력을 들여왔다. 같은날 무함마드는 코마레스 탑에서 카스티야 대표단에 성문의 열쇠를 건내었고,[15] 다음날 이사벨라와 페르난도가 입성하여 같은 장소에서 항복을 확인하였다. 이로써 안달루스 최후의 무슬림 왕국은 멸망하였다. 1월 6일, 스페인 군은 공식적으로 그라나다에 입성하였고 무함마드는 측근 및 가족들을 대동하고 알함브라를 떠나 영지로 주어진 알푸하라로 떠났다. 도중 무함마드가 눈물을 흘리자, 모친 아이샤가 '남자답게 지키지 못한 왕국에 대해 여인처럼 울면 뭐하냐'며 질책한 일화가 유명하다.[16]
2.5. 망명과 죽음
그는 그 이후로도 41년을 더 살았다.알푸하라의 라우하르 데 안다락스에 머물던 무함마드는 18개월 후인 1493년 여름, 1130명의 수행원 및 측근들과 함께 아드라[17] 항을 통해 안달루스를 떠났다. 멜리야 인근의 카자자[18]에 상륙한 그는 페스로 향하여 와타스 술탄 앗-셰이크 무함마드의 환대를 받았고, 그곳에 궁전을 지어 살다가 앗-셰이크 무함마드의 손자 아불 압바스 아흐마드의 치세인 1533년에 향년 7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19]
3. 평가
무함마드 12세는 (기존 술탄들과 마찬가지로) 카스티야에 복속하여 왕국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였고, 실제로 그렇게 될 뻔했다. 1490년 전까지 양측은 서로를 공격하기는커녕, 지원군을 보내주는 사이였기 때문이다. 바자 함락 후 카스티야-아라곤 연합군은 그대로 회군하려 하였으나 무함마드는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태에서 복속을 철회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그의 과욕과 현실에 대한 오판이 결국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다.다만 무함마드도 나름 억울할 수 있는게, 카스티야-아라곤 측이 동부 영토를 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또한 그라나다의 여론 역시 3세기 이상 번영하던 도시를 그대로 적에게 넘긴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무함마드는 자신의 뜻대로 행하기 어려운 처지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3차례나 내전을 일으켜 왕국을 약화시킨 것은 확실한 멸망의 원인 중 하나로, 스스로 망국을 초래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4. 기타
그라나다의 마지막 술탄이 가끔 무함마드 '13세'로 잘못 표기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무함마드 12세가 폐위당한 후 아불 하산 알리가 자신의 동생 무함마드를 후계자로 지목했기 때문에 오해되는 것이다. 다만 앞서 나온 것처럼 무함마드 12세는 그의 말라가 구원 실패 후 복위하였고, 무함마드 13세는 동부 지방에서 카스티야에 저항하다 1490년 사로잡혔다. 따라서 1492년 멸망 당시의 군주는 엄연히 무함마드 '12세'이다.무함마드 12세는 망국의 군주인 것을 감안해도 기구한 인생을 보내었다. 그는 친부와 숙부와 내전을 벌였고, 마지막에는 친구이자 적인 페르난도와 싸웠다. 숙부인 무함마드 13세와도 한때 왕국 분할에 합의했던 것을 보면, 진정한 친구도 적도 없는 격랑의 세월을 보낸 것이다.
[1] 아랍어로 목초지를 뜻하는 알-부샤라트의 스페인식 발음[2] 혹은 낙마 후 덤불에 숨었다가 사로잡혔고, 고귀한 옷차림 덕에 살해되지 않고 잡혔다고도 한다. 이후 무함마드 12세는 포르쿠나의 한 성탑 (현 보압딜 성탑, Torre de Boabdil)에 감금되었다. 당시 그가 입었던 옷은 현재까지 톨레도 군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3] 혹은 무함마드 13세가 베네가스 가문의 지지를 받아 형을 축출한 것이라고도 한다.[4] 알함브라 궁을 굽어볼 수 있는 시내 서북부의 언덕 지역[5] 페르난도가 이를 코르도바 협정의 위반으로 여겼다고도 한다. 이사벨라와 페르난도는 1486년 초엽 클라비호 전투에서 기독교 군대를 도운 전설로 인해 스페인의 수호 성인 격이던 야고보의 성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순례하며 그라나다 전쟁에 십자군의 속성을 강화하였다.[6] 이는 아랍어에 능숙한 페르난도의 장군 곤살로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 (엘 그란 카피탄)을 통해서 이루어졌다[7] 1만이 넘는 생존자 중 군인 및 주민들은 물론, 외래 무슬림 상인들까지 재산을 몰수당한 채 죽음 혹은 노예화의 선택지 하에 놓였고 수천의 기독교도 이주민들이 정착하였다. 일부 포로들은 북아프리카의 기독교도 포로와 교환되었으나 나머지는 노예가 되어 정복자들에게 선물로 배분되었다.오직 현지 유대인들만이 카스티야 유대인들의 몸값 납부로 노예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8] 12월 10일 알메리아 항복 의사, 21일 접수. 알메리아와 과디시의 할양 내지는 매각에 대해 무슬림 역사가 누브다트 알-아스르는 무함마드 12세에 대한 앗-자갈의 복수 의도가 담긴 것이라 해석하였다.[9] 특공대 지휘관 페르난도 마르티네스 라이네스가 단검으로 새기고 박아두고 갔다 함[10] 남겨진 기독교도 포로들은 1491년의 공방전 도중 대부분 아사한다[11] 따라서 보급 가능성이 있는 인근 마을들과 농경지가 전부 파괴되었던 것이고, 화포 역시 동원되지 않았다[12] 즉, 그라나다 함락될 때까지 떠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사벨라 역시 여인의 몸으로 친히 갑옷을 입은 채로 군영을 시찰하였다.[13] 연대기에 따르면 다수의 귀족들이 카스티야의 뇌물을 받았고, 당시 고위 귀족들 중 최소 1인은 카스티야 측과 내통하고 있었다 한다. 한편 무사는 '과거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선조들의 피는 여전히 우리 속에 흐르고 있다. 아직 우리는 2만의 장정들과 강력한 기병대가 있다.'며 항전을 주장하였다.[14]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15명의 카스티야 군과 마주하여 그들 대부분을 베어 넘겼으나, 결국 전사했다고 한다. 혹은 사로잡히길 거부하며 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한다.[15] 그림에서 나오듯이 이사벨라에게 직접 건내는 것은 선전의 일환일 뿐이다[16] 알 푸하라로 떠나는 길에 무함마드가 한탄하던 고개는 이 일화를 따서 '무어 인의 한숨 고개'란 뜻의 '푸에르토 델 수스피로 델 모로 (Puerto del Suspiro del Moro)'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17] 그라나다 동남쪽, 과디시 남쪽에 위치[18] 멜리야 반도 건너편에 있다[19] 유선, 릴리우오칼라니 등과 함께 망국의 군주들 중 장수한 경우이다. 한편 1497년 스페인 군은 멜리야를 장악하였고, 1505년에는 카자자 역시 점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