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 항에서 오랑으로 이송되는 모리스코 인들
1. 개요
1609년 4월 9일 펠리페 3세의 명으로 인해 이베리아 반도에 남아 있던 기독교로 개종한 무어인들인 모리스코[1]들이 마그레브 혹은 기타 이슬람권[2]으로 추방된 사건들을 일컫는다.추방된 무슬림들은 대대로 살아온 안달루스의 고향과 비슷한 곳에 안달루스 양식으로 '망명 도시'를 세우기도 했으며 대표적인 정착지로 모로코의 셰프샤우엔이 있다. 추방당한 모리스코들은 생계 해결과 스페인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바르바리 해적이 되어 기독교 유럽의 해안을 위협했다. 모리스코 출신 해적들은 현지의 지리에 익숙하고 방어 거점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던 점을 이용해 자주 약탈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3]
2. 배경
서고트 왕국이 무슬림들의 침략으로 무너진 후, 이베리아반도의 대부분은 이슬람 제국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19세기까지도 이베리아 반도를 유럽이 아닌 아프리카로 보는 시각이 있을 정도였로 알 안달루스의 그림자는 이베리아 반도에 짙게 남아 있었다. 이베리아의 무슬림 권력자들은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을 성서의 백성으로 인정해 지즈야를 납부하는 대가로 종교의 자유와 안전을 보장했다.안달루스는 다양한 문화의 교류가 이뤄지던 공간이었다. 무슬림 지배층과 이주민들은 중동과 아프리카의 문화와 기술을 이베리아에 가져 왔고 농촌에서는 지즈야를 납부하는 기독교인들이 아랍어와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였으며 궁정에서는 기독교인 관료와 군인들이 아미르나 타이파를 섬겼다. 그리고 독립적인 기독교 영주들은 무슬림 세력의 용병으로 일하면서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고 무슬림 세력의 문화와 기술, 선진적인 재정 운영과 행정 능력을 흡수하기도 했다.
이 시기의 이베리아는 종교적으로도 관용적이어서 무슬림 타이파가 기독교인의 봉신이 되어 경쟁자나 자신이 바이아(충성 맹세)를 한 무슬림 주군에게 맞서기도 하고, 기독교 용병이나 기사들이 무슬림 주군에게 충성 맹세를 하고 같은 기독교인들과 싸우기도 했으며 무슬림 타이파와 기독교 영주가 동맹을 맺어 서로 도와주기도 하는 등 다른 서유럽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 일어났었다.
민족적으로는 니케아주의 교회를 따르던 로마계 히스파니아인, 아리우스파를 믿던 서고트인, 아랍인 정복자, 그 아랍인에게 정복당한 뒤에 이베리아를 침략해 온 베르베르인, 알 안달루스가 성립된 뒤에 넘어온 베두인 부족민, 노예로 팔려온 슬라브인 출신 등 다양한 기원을 지닌 이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무슬림 권력자들은 종교적 차별을 강화하고 개종을 강요해 모사라베(이베리아 기독교인)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이들을 동화시켜 나갔고, 이에 반발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순교를 하거나 지배층에 맞서는 등 종교적 갈등과 충돌도 있었다.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음에도 기독교인 여성에게 성폭행을 저지르거나 이들을 노예화했으며 기독교 여성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게끔 강한 압박을 가했다. 그러면서도 무슬림 여성들이 기독교인 남성과 결혼하는 것은 제한하여 상대방의 수를 줄이고 자기 세력의 인구는 늘이는 시도까지 했다.
점차 국력이 강해지는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 또한 관용과 탄압을 병행했다. 이들은 새로 정복한 땅의 무슬림 · 유대인 공동체를 보호하고 이들을 중용하다가도 이들을 추방하거나 개종을 강요했으며 이베리아 중부의 안달루스를 침공해 도시를 약탈하고 모사라베들을 잡아 자신들의 영토에 재이주시켰다. 그리고 이들은 무슬림들이 기독교인 여성들을 괴롭힌 것을 잊지 않았다.
기독교 왕국에서도 '이교도'와의 성적 관계는 금지된 것이었지만, 기독교인들은 무슬림 여성들에게 성폭행을 저지르거나 노예화했으며 기독교 권력자들은 정복지의 무슬림 여성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끔 강한 압박을 가하고 무슬리마가 기독교로 개종하면 즉시 보호를 제공했다. 다만, 성폭행 피해자들에 대한 구제는 잔혹할 정도로 이뤄지지 않는 편이었다. 성폭행을 당한 뒤에 가족이나 공동체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일부 여성들은 성매매 외에는 생계 수단이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 왕국의 무슬림 성매매 여성들은 매음굴에서 만들어지는 막대한 수익을 국왕에게 바치는 노예로 살아야 했다.
타이파의 난립으로 안달루스 세계가 분열하자, 강성해진 북부의 기독교 왕국들은 점차 남진하여 재정복을 밀어붙였다. 이후, 레콩키스타를 완수한 상황에서 모사라베들은 카톨릭 교회로 원복하거나 강요나 현실적인 이유로 믿게 된 이슬람 신앙을 유지했고, 무어인들도 상당수가 이베리아에 잔류했다. 카스티야 - 아라곤 연합 왕국은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했지만, 반이슬람 정서와 반유대인 정서가 강화되면서 강제 개종과 추방이 잦아졌다.
1499년에는 톨레도 대주교 히메네스 시스네로스가 그라나다 조약을 무시하고 그라나다의 무슬림들을 강제로 집단 개종시켰고, 여기에 분노한 무슬림들이 봉기하여 정부에 맞섰다. 이 라스 알푸하라스 봉기는 결국 국왕군에게 진압당했으며 스페인 정부는 반란을 명분으로 그라나다 조약을 폐기하고 무슬림들의 권리를 제한했다. 이후, 종교 재판이 탄생하면서 소수자에 대한 탄압은 정점에 달했다.
유대인들은 무슬림들보다 먼저 기독교인들의 의심과 탄압을 받은 소수 세력이었다. 에스파냐의 기독교인들은 이미 오래전에 기독교로 강제 개종했던 콘베르소 유대인들도 의심하여 탄압하거나 추방했으며 선조들의 신앙을 계속 믿던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더욱 강하게 탄압했다. 그라나다에 십자가가 세워진 1492년, 카스티야 - 아라곤 연합 왕국에 거주하던 25만의 유대인들은 개종이 아니면 추방을 강요받았다. 결국 절반은 개종하고 절반은 고향을 떠나 북아프리카, 발칸 반도, 이탈리아, 아나톨리아 등지로 떠났다. 이주 과정에서 이들은 이베리아의 문화를 전파했고 상당 기간 동안 문화와 언어를 유지했다. 스페인에 다시 유대인들이 조금씩 돌아와 공동체를 형성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부터였다.
기독교로 개종했음에도 에스파냐의 주류 사회는 모리스코들이 선조들의 문화와 언어를 유지하고 안달루스의 의복을 입는 것,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주류 사회와 거리를 두려는 것 등 다양한 사유로 이들을 의심했다. 일부 모리스코들이 콘베르소 유대인들처럼 비밀리에 옛 신앙과 문화를 유지하다 발각당하는 일들도 있었다. 이에 에스파냐 정부는 모리스코 공동체를 분산시키고 각지에 재정착하게 만들어 공동체의 규모를 약화시키는 방식으로 주류 사회에 동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스페인 주류 사회의 의심은 계속되었고 일부 카톨릭 성직자들은 모리스코에 적대적인 선동을 일삼았다.
다만, 그라나다와 발렌시아는 분산 정책에도 불구하고 모리스코 인구가 많은 곳들이었다. 특히 발렌시아의 영주들은 1520년대까지 모리스코들이 공식적으로 이슬람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게 허용했고 이슬람 법 체계도 어느 정도 인정했다. 1519년, 카를 5세의 통치에 반발한 도시민과 길드를 중심으로 일어난 형제단 반란 시기, 반란 지도부는 반이슬람적 정서가 강해 발렌시아의 모리스코들에게 개종을 강요했다. 이에 분노한 모리스코들은 국왕군에 합류해 반란을 진압했으며 여러 전투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냈다.
하지만, 카를 5세는 모리스코들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강제 개종당한 모리스코들을 종교 재판소의 관할하에 두고 이들의 개종이 적법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발렌시아의 모리스코 사회는 이러한 타격을 입었음에도 안달루스의 문화를 유지했다. 1570년대까지도 발렌시아의 모리스코들이 이슬람 신앙을 유지했다는 증언도 있으며 모리스코들의 언어도 계속 보존되었다.
종교 재판소의 재판 또한 성립 초기인 15세기 말 ~ 16세기 중반에 스페인 내부의 개신교 신자를 색출하던 시기에 집중되었다. 평시에는 예산과 인력 부족, 다른 행정 기관들과의 충돌, 민간 사회와 종교적으로 좀 더 관용적이었던 일부 귀족들의 반발 등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이교도와 이단을 색출하거나 콘베르소와 모리스코들을 동화시킬 형편이 못 되었다. 게다가 모리스코들에게 적대적이었던 교회와 모리스코의 강제 이주를 집행한 정부에서도 점진적인 동화, 모리스코들과의 통혼과 교류를 지지하는 온건파들의 세가 상당했다. 그래서 모리스코에 대한 스페인 주류 사회와 교회의 태도는 한 가지로 딱 잘라서 말하기 힘들며 관용과 불관용을 오가는 모호한 것이었다.
미국의 유명한 코메디언 멜 브룩스의 코미디 영화 세계사, 스페인 종교재판 에피소드에서는 종교재판소에서 유대인과 무슬림을 탄압하는 것으로 나오지만, 개종을 거부하는 유대인과 무슬림들은 종교 재판소에 회부하지 않고 즉각 추방하거나 투옥했다. 종교 재판소의 설립 목적은 올바른 기독교 신앙 확립이지, 예수회처럼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스페인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종교 재판소의 관할권은 현지 스페인계 백인 + 흑인 노예 + 이주민들과 공존하는 도시의 원주민 카톨릭 신자 + 혼혈에 국한되었고 개종하지 않은 원주민들은 프란치스코회, 예수회, 도미니코회 같은 선교 수도회의 영역이었다.
1567년, 펠리페 2세가 모리스코의 정체성과 문화를 부정하는 프라그마티카 칙령을 내리자, 강제 동화에 반발한 모리스코들이 제2차 라스 알푸하라스 봉기를 일으켰다. 봉기군은 아벤 아보오를 국왕으로 옹립하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군수 물자와 4000여명의 병력을 지원받아 스페인군에 맞섰으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모리스코의 반란을 진압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항쟁이 극심한 시기에 일부 모리스코들이 오스만 제국이나 모로코 왕국과 접촉하는 외환죄를 저지른 일들도 있는데다 오스만이 봉기에 개입하기까지 했으니 모리스코에 대한 스페인 정부의 인식은 심각하게 나빴다. 결국 정부는 모리스코들을 또 다시 분산하여 강제 이주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라나다에서 거주하던 약 8만 ~ 9만의 모리스코들이 스페인 중부와 북부, 발렌시아 지역으로 이주당한 것으로 파악된다.
3. 추방
1609년 4월 9일 펠리페 3세는 칙령을 발표해 모리스코들을 북아프리카로 추방할 것을 명령했다. 약 5년 동안 17만 5천명의 모리스코들이 북아프리카로 추방당했고 여기서 몇 천명은 정부의 눈을 피해 도주했으며 일부는 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당시 모리스코의 60% 정도가 추방된 것으로 보고 있다.현대와 달리 법령이 즉각적이고 완전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모리스코들이 뇌물을 주고 추방을 피하거나 운 좋게 은신에 성공한 이들도 있었다. 관료나 영주들이 마드리드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일도 있었고, 모리스코들이 많이 살던 발렌시아에서는 귀족들이 항의까지 했다. 마을에서 함께 살아가던 이웃들이 모리스코들을 보호하거나 숨겨주기도 했다. 일부 지역의 모리스코들은 주류 사회와 동화되어 잘 공존하고 있어서 추방을 피했다. 또한 추방령에는 연령 제한이 있어서 아동 · 청소년들은 추방을 피할 수 있었다.(초기 4세 이하 면제 → 16세로 상향)
어떤 지역의 모리스코들은 아예 성직자나 공무원이 되어 추방을 피했고 모리스코 추방을 위해 내려온 관리들을 투옥한 지역도 있었다. 게다가 이전 정권들이 지속적으로 모리스코들을 분산 이주시켰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모리스코들을 모조리 잡아다 추방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북아프리카로의 추방 과정은 적대 관계인 북아프리카 이슬람 세력들과의 협의 없이 이뤄진 일이어서 스페인군은 북아프리카 해변에 모리스코들을 내버려 두고 떠났다. 곧, 도적떼나 군벌, 부족들이 이들을 덮쳤고 일부 모리스코들은 죽거나 노예로 팔렸다. 정착에 성공한 이들 중 일부는 바르바리 해적에 가담해 자신들을 추방한 스페인 제국에 복수했다. 피레네를 넘어 프랑스로 넘어간 약 13000명의 모리스코들은 갑작스런 난민을 맞이해 난감한 상황에 빠진 프랑스 정부에 신변을 구속당한 채로 아그드 항구로 보내졌다. 이들은 항구에서 자비로 배편을 마련해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고향이 그리웠던 4만 ~ 9만 명의 모리스코들은 제3국을 경유해 스페인에 귀환했고, 스페인 정부는 이들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하고 받아들였다.
4. 평가
이 사건은 당시 스페인 주류 사회가 이제는 사회적 소수자가 된 과거의 지배층과 무슬림들에 대해 갖고 있던 반감과 모리스코들을 국가 존속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불안 요소로 바라본 스페인 정부의 인식이 작용한 일이었다. 당대 스페인 사회는 여전히 카스티야와 아라곤 간의 지역 갈등이 심했으며 국가를 하나로 잇는 요소는 종교 뿐이었다. 게다가 오스만 제국과 패권 경쟁을 하는 상황에 오스만 제국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는 모리스코들은 스페인 정부의 눈에 시한 폭탄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그러나 모리스코인들은 천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북아프리카에서 베르베르인, 아랍인이 이동해서 거주하다가 가톨릭으로 개종한 사람들이었므로, 스페인을 고향으로 여기고 있었다. 이들의 동화 과정은 진통이 심하고 갈등을 유발했지만, 동화 자체는 모리스코 순교 성인까지 있을 정도로 착실히 이뤄지고 있는 편이었다. 그러나 모리스코의 동화 속도는 스페인 주류 사회의 인내심을 따라가지 못했으며 결국 극단적인 추방 조치가 시행되었다.[4]
하지만 추방 문단에 기재된 현실적인 이유로 모리스코 추방은 부분적인 성공만 거두었을 뿐이었다. 스페인에서 이슬람 신앙과 아랍어는 전멸했지만, 스페인어에 미친 아랍어의 지대한 영향, 외모, 건축 양식, 공예품 양식 등 스페인 문화의 많은 분야에서 무어인의 영향은 여전히 크게 남아 있다.[5]
4.1. 모리스코 추방과 스페인 국력의 관계
펠리페 2세가 죽자, 그가 진 부채와 모든 재앙이 결코 유능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아들 펠리페 3세의 머리 위로 덮쳤다. 게으르기 그지 없었던 펠리페 3세는 총신들에게 권한을 위임함으로서 그때까지 스페인에 남아있던 27만 5,000여 명의 무어인 전원을 배에 실어 추방시키는 대실책을 범했다. 이런 비생산적인 조치 때문에 무어인들에게 돈을 빌려줬던 발렌시아나 아라곤의 중산 계급, 토지를 임대해줬던 귀족들은 실제적으로 파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 추방은 박해를 받아야 마땅할 25만 명 이상의 이단자들을 갑작스레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종교재판소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 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 카를로스 푸엔테스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 / 카를로스 푸엔테스
모리스코 추방은 스페인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다수의 모리스코들이 상공업자에 전문직 종사자였으며 선조들이 전수해준 농업 기술을 익히고 있던 경험이 풍부한 농민들이었다. 이들이 쫓겨나자마자, 숙련된 기술자과 농부, 전문직 종사자들이 대량으로 없어져서 스페인의 제조업은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모리스코 추방을 찬성했던 발렌시아의 가톨릭 대주교조차 "이제 누가 우리의 신발을 만들어줄까?"라고 한탄했다.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의 드넓은 식민지와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7세기 중반 이후로 부흥에 실패하고 긴 쇠퇴의 길을 걸었던 이유도 바로 모리스코 추방으로 인한 제조업의 타격 때문이었다. 제조업이 부실하니 거의 모든 물건들을 수입에 의존해야하고, 수입에 의존하니 물가가 오르고,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금과 은을 모두 대금으로 지불하니, 아메리카 대륙의 풍부한 천연자원도 전부 해외로 유출되어 스페인 본국은 그다지 이득을 보지 못했다.[6]
그러면 스페인 사람들이 직접 공장을 차리고 물건을 만들면 되지 않겠냐고 할 지 모르겠지만, 사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은게 당시 스페인 제국 자체가 주권과 통치 주체가 명확한 근대 국가들과는 달리, 동군연합과 가톨릭 통합 보편 제국에 대한 열망같은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기반했던 국가이다 보니 경제 정책을 그다지 일관적으로 짤 수 없었다.
따라서 압스부르고 왕조가 당장 제노바 공화국을 필두로 이탈리아반도나 신성 로마 제국, 재정복한 저지대 10개주 같은 유럽의 스페인 봉신, 제후, 동맹 세력들을 구슬리고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현대 국민국가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힘든 수준의 경제적 특권을 막 뿌렸는지라 스페인 내부, 특히나 왕실이 직접적으로 과세, 징병할 수 있는 카스티야-안달루시아 양대 카스티야 연합 왕국 직할령에서는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상당한 수준이었던 제조업이 17세기 초반에 한 번 박살나고 다시 복구되지 못했다.
스페인 제국이 하나의 지정학적 헤게모니로 패권을 굳히는 과정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물질적인 인구, 경제력의 핵심 출처인 이베리아반도의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자체적인 경제기반이 뿌리채 뽑힌 것이라고 볼 수 있다.[7]
스페인의 민족 가톨릭주의 이념을 비판하다가 스페인 내전 발발 직후에 프랑코 정권에게 살해당한 시인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는 생전에 "모리스코 추방이야말로 그저 쓸데없는 분풀이로서 오히려 스페인 경제와 문화에 큰 타격을 준 비극만 초래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모리스코 추방이 남긴 상흔은 회복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다. 스페인이 17세기 중반 이후로 부흥에 실패하고 긴 쇠퇴의 길을 걸었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17세기 초반에 국왕령의 제조업은 한 번 박살나고 다시 복구되지 못한 게 아니었다.
모리스코 추방은 스페인에 큰 타격을 입혔지만, 역병과 해외로의 인구 유출 등 스페인의 국력 약화를 야기한 원인들 중에 하나일 뿐이지 그것만으로 스페인의 쇠퇴를 논할 수는 없다. 모리스코 추방 이후, 스페인은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이민을 받아들여 인구를 벌충했고 추방 이후에 복귀한 모리스코의 숫자만 해도 4 ~ 9만에 이른다. 17세기 스페인의 인구 감소는 모리스코 추방보다 3차에 걸친 대역병이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쳤다. 1597 ~ 1602년 역병으로 50만, 1647 ~ 52년 역병, 1677 ~ 1685년 역병으로 각각 25만의 스페인 국민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사회의 성장 동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게다가 식민지 개발로 떠나는 이주민과 잦은 전쟁 때문에 국외로 나가는 군인들의 수가 매년 1만 명이 넘었다.
17세기에 스페인이 몰락했다고 하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도 경제 침체나 전염병 같은 문제를 겪었다. 서유럽과 중부 유럽에서는 30년 전쟁이 일어나 독일은 다수의 인민들이 도륙당했고 도버 해협 너머의 영국은 내전으로 정신이 없었다. 동유럽의 강국인 폴란드는 대홍수로 나라가 풍비박산이 났고, 러시아 또한 상당 기간 동안 동란기의 상처를 회복하는 과정을 겪어야 했다. 또한 스페인은 유럽 최강의 자리를 내려놓았을 뿐이지, 17세기 내내 유럽 2위의 자리에 만족하는 열강이었다. 보수적으로 봐도 스페인의 국력은 유럽에서 3위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다.
스페인은 17세기 중반 이후로 부흥에 실패한 게 아니라, 도리어 17세기 중반 이후로 경제 회복이 이뤄지고 있는 나라였다. 펠리페 4세의 재위 말년부터 경제 회복의 조짐이 보였고 1680년대부터 점차 경제가 호조를 보였다.[8]
5. 유사 사례
모리스코 추방과 비슷한 일이 1685년 프랑스에서도 벌어졌다.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을 폐기하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여 프랑스의 위그노 신자들에게 가톨릭 개종을 강요한 것이다. 루이 14세는 개종을 거부하면 재산을 몰수하거나 감옥에 수감할 것이라고 위협했고, 이를 견디지 못한 30만 명의 위그노들은 개신교 국가인 잉글랜드, 네덜란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북미 등지로 도피했다.이들 대부분이 상공업자와 전문직 종사자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제조업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프랑스는 이 피해를 130년 후인 나폴레옹 전쟁 무렵까지 극복하지 못해서 프랑스 군인들이 입었던 군복의 절반 가량이 적대 국가인 영국의 옷감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루이 14세는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기 이전부터 위그노들을 탄압했기 때문에 상당수의 위그노들이 이미 해외로 이주한 상태였고, 퐁텐블로 칙령은 위그노 추방의 완수를 뜻하는 수준의 조치였다. 그리고 프랑스는 영국인들과 여러 개신교 국가들이 추방한 가톨릭 신자들을 받아들여 위그노 추방으로 인해 생긴 손해를 벌충했다. 오늘날에는 "퐁텐블로 칙령이 프랑스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는 주장 역시 영국 등 개신교 진영의 휘그 사관과 반가톨릭 정서에 기반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 포르투갈어로는 모리스쿠다. 당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압스부르고 왕조의 동군연합인 이베리아 연합이었기 때문에 스페인뿐만 아니라 포르투갈의 모리스코(모리스쿠)들도 대거 추방당했다.[2] 오스만 제국의 호의로 이스탄불로도 다수 망명하였다.[3] 20세기 튀르키예에서 추방된 기독교도들과 발칸반도에서 추방된 무슬림들도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대표적으로 이즈미르(스미르나) 출신 정교회 신자들이 그리스에 세운 네아 스미르니가 있다.[4] 청나라의 중원 입관 이래 200년 넘게 중원에서 살았던 만주족도 청나라 말기에는 자신들의 고향인 만주에 대한 애착이 줄어들고 사실상 중원을 자신들의 고향으로 여길 정도였는데, 만주족이 중원에서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이베리아반도에서 살아 온 모리스코들이라면 가톨릭으로 개종까지 했으니, 북아프리카인이라는 정체성이 사실상 없어지다시피 하고, 북아프리카를 그저 조상들의 고향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5] 스페인의 이슬람 신앙과 아랍어는 소수의 모로코계 스페인인들 사이에서 간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스스로를 알안달루스 문명의 마지막 후예로 여기고 있다.[6] 출처: 신의 전쟁/ 도현신 지음/ 이다북스/ 111~112쪽[7] 레콩키스타 과정에서 형성된 상무적, 이상주의적이고 노동을 천시하는 귀족적인 문화적 영향력도 있긴 있지만, 스페인 제조업의 역사적 몰락의 주된 원인으로 볼 수는 없다. 손으로 노동하는 걸 천하게 보고 귀족이면 마땅히 전쟁, 아니면 하다못해 공무원이나 교회에서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게 좋다는 귀족주의적 가치관은 귀족들에게나 통하는 얘기고, 스페인 평민들은 어디서나 다 그렇듯이 적당한 실용주의적 먹고사니즘이 일반적인 가치관이었으며 이런 상무적, 귀족주의적 문화도 어디까지나 카스티야-안달루시아 내에서나 통하는 소리지 카탈루냐, 바스크, 모리스코 추방으로 집중적인 타격을 입은 발렌시아 같은 지역은 중세 아라곤 연합왕국 시절부터 반대로 실리적이고 상업과 제조업을 존경하는 문화가 발달했고 카스티야 왕국에서도 동시대에는 세계적 규모의 무역항이었던 세비야나 갈리사아, 칸타브리아의 무역항들처럼 상업문화가 발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었던 동네도 많았다.[8] 참고문헌 : 케임브리지 스페인사. 근대초 스페인 제국의 흥기와 몰락. 스페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