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르네상스 시기부터 시작된 여러 귀족들이 모여 사교춤을 추는 축제로 사교 모임의 상징이며, 근대 귀족문화의 상징이다. 현재에서도 프롬 파티 등 여러 문화권에서도 퍼졌다.2. 역사
13세기 시절 베네치아 중심으로 퍼진 가면무도회가 시초이며 이 때는 무도회 보다는 제사에 가까운 행사였다. 그러나 무도회의 형태가 갖춰진것은 16세기 이후이며, 16세기 르네상스 부터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무도회가 등장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영향으로 무도회는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파티로, 나라를 망친 원흉으로 뽑히지만, 프랑스 대혁명 주 원인은 기존 귀족들의 사다리 걷어차기와 면세특권 고집이 시민혁명을 폭발시킨거지, 무도회가 원인이 아니다. 오히려 왕과 귀족들이 연회와 무도회를 통하여 자신들의 위신을 높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정보교환을 하는 일종의 사교의 장으로 정보통신체계가 미비하던 당시에 효과적인 정보교류기능을 하였다.수많은 창작물에서 예쁜 드레스와 연미복을 입고 춤이나 추는 파티 정도로만 묘사하지만, 실상은 일종의 맞선 자리 겸 취업알선회이자 토론회 역할도 겸하던 매우 중요한 행사였고 참석할 수 있는 조건도 굉장히 까다로웠다. 먼저 무도회를 주최한 집안과 급이 맞는 가문만이 초대를 받을 수 있었고 조금이라도 추문이 도는 가문은 지위나 사실여부 상관없이 초대받을 수 없었다.[1] 장사로 부를 얻은 가문 역시 천박하다며 초대받지 못했다. 다만 몰락한 가문이라 해서 죄다 초대받지 못한 건 아니었는데, 남을 돕거나 나라를 위해 희생하다가 몰락한 가문은 명예를 지켰다고 여겨져서 사교계의 초대를 받을 수 있었다.
결격 사유가 있거나 지나치게 내성적이어서[2] 춤을 추지 못하고 우두커니 앉아있기만 하던 영애들은 벽의 꽃(Wallflower)이라 불렸다. 춤 신청은 오직 남자쪽에서만 가능했기에, 이들은 다른 커플들을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조바심과 음악에 맞춰 몸만 들썩이는 노처녀 취급을 받았다.
사족으로 여성들은 무도회가 열리면 일단 참석하려는 경향이 강했으나 의외로 남성들은 무도회에 큰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유는 보기보다 단순한데, 여자들 눈치를 봐가며 관심없는 주제로 수다를 떨고 춤을 추는 것보다 같은 남자들끼리 담배 피우고 술 마시며 당구를 치는 클럽에서의 활동이나 야외 스포츠를 더욱 편히 여겼기 때문.[3] 거기다 독신 남성들은 훗날 생길 가족을 위해 돈을 미리 벌어두려고 무도회 참석을 차일피일 미루는 일도 잦았다. 그래서 19세기 말 영국 사교계가 쇠퇴할 즈음에는 '맞선 자리'라는 역할에도 불구하고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참석해버리는 웃지 못할 광경도 매우 자주 나왔다고 한다. (《영국 사교계 가이드》, 무라카미 리코 著)
[1] 그나마 명예회복에 성공한 경우는 다시 초대받을 수 있기는 했다.[2] 어쩌다가 상대의 눈에 들면 행운이겠지만, 당시에는 여성이 스스로의 매력을 적절히 어필하여 춤 신청을 받아내는 것이 중요했다.[3] 이런 경향은 사교 댄스가 보편적이지 않았던 중류 계급에서 특히나 자주 보였다. 춤은 계집애나 추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그 대신 피크닉에는 흔쾌히 가는 남자들의 비율이 좀 더 높았다고 한다. 바깥 공기도 쐴 수 있고, 여차하면 뱃놀이나 사냥, 낚시도 가능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