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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사천(泗川)[1], 자는 순경(舜卿), 호는 매계(梅溪), 시호는 충정(忠貞)이다.2. 생애
1571년(선조 4년)에 선무원종공신 목첨(睦詹, 1515~1593)[2]과 계배 동래 정씨(1539~1613) 사이의 3남 4녀 중 넷째[3] 태어났다. 그의 막내 여동생은 안동 김씨 김치와 혼인했는데, 그가 바로 임진왜란 명장 김시민의 양자이자 김득신의 아버지이다.임진왜란 초인 1593년(선조 27년)에 아버지 목첨과 형 목수흠(睦守欽)을 잃었고, 1597년(선조 30년)에 음서로 관직에 올라 제용감 참봉을 지냈으나 얼마 뒤 물러났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내시교관, 호조 낭관, 형조 낭관을 역임했고 1606년(선조 39년)에는 양주 현감으로 부임했으나 문묘낙서옥으로 물러나야 했다.[4]
광해군 재위기에는 병조 정랑과 홍문관의 요직을 맡았다.
1623년(인조 원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즉위한 후에는 함경도 선유어사로 임명받았고, 1년 뒤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공주까지 인조를 모시고 따라갔다.
이어 광주목사, 남양부사, 지제교, 좌승지를 역임했고 정묘호란 때에는 이괄의 난 때와 마찬가지로 인조를 옆에서 모셨다. 그 뒤 양양부사와 개성부 유수를 거쳐 우승지와 예조참판을 지내는 등 정부 내 주요 관직을 두루 맡았다.
이 시기에 수재들을 별도로 수학시키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救恤)했으며 관혼(冠婚)을 치를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었다.
효종이 즉위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650년(효종 1년)에는 동지중추부사 직을 맡았고, 나이가 많은 관료들이 들어가는 기로소에 입소했다.
2년 뒤인 1652년(효종 3년) 3월 24일 청파리에서 사망했다. 향년 82세였다.[5] 사후 23년 뒤인 1675년(숙종 1년)에 시호 '충정(忠貞)'을 받았고, 아들 목내선이 좌의정 품계에 올랐으므로 다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
3. 가족과 후손
4. 묘역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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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공 목서흠 묘역 忠貞公 睦叙欽 墓域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62번지 |
분류 | 유적건조물 / 무덤 / 무덤 / 기타 |
수량 / 면적 | 분묘 1基, 석물 9基, 토지 205.3㎡ |
지정연도 | 2009년 6월 25일 |
<colbgcolor=#C00D45> 충정공 목서흠 묘 및 신도비 |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목서흠의 묘가 있다. 부인 안동 권씨와 합장되었으며 봉분은 하나이다. 묘비, 상석, 혼유석, 망주석, 동자석, 향로석은 조선 시대에 조성한 것이고 나머지 석물은 전부 현대에 만든 것이다. 이 일대는 목서흠 뿐 아니라 그의 조상들과 후손들의 묘도 같이 있어 하나의 가족 묘역을 이루고 있다.
조선 시대에 조성한 석물인 목서흠묘와 신도비(神道碑)는 2009년 6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7호로 지정받았다.
묘역 입구에는 목서흠의 일생과 업적이 적힌 신도비가 세워져있고 바로 옆에서는 아들 목내선의 신도비도 세워져있다. 목서흠이 예조에 재직했을 때의 동료 조경이 글을 짓고 이정영과, 조경의 조카인 조위명이 글씨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