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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04:22:36

메멧 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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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96 · 2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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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91 · 1997-98 · 2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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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멧 숄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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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Bayern München Hall Of F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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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D
파일:Mehmet Scholl.jpg
이름 <colbgcolor=#ffffff,#191919> 메흐메트 토비아스 숄
Mehmet Tobias Scholl[1]
출생 1970년 10월 16일 ([age(1970-10-16)]세) /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카를스루에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
[[튀르키예|]][[틀:국기|]][[틀:국기|]]
신체 177cm, 73kg
직업 축구 선수 (공격형 미드필더, 윙어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해설가
소속 선수 SV 노르트베스트 카를스루어 (1976~1982/유스)
카를스루어 SC (1982~1989 / 유스)
카를스루어 SC (1989~1992)
FC 바이에른 뮌헨 (1992~2007)
감독 FC 바이에른 뮌헨 JT U-13 (2008~2009)
FC 바이에른 뮌헨 II (2009~2010)
FC 바이에른 뮌헨 II (2012~2013)
방송인 ARD
국가대표 36경기 8골 (독일 / 1995~2002)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2.2. 국가대표
3. 플레이 스타일4. 은퇴 이후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개인 기록
6.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의 전 축구 선수. 현재는 ARD에서 해설을 맡고 있다.

일생의 동지인 올리버 칸과는 출신지역데뷔 클럽, 그리고 자신들이 전설로 남은 클럽에서의 행보까지도 거의 똑같다.

1992년 한창 바이에른 뮌헨이 "FC 할리우드"라고 불리는 막장 시절부터 건너와 팀의 중흥기를 쭉 함께했으며 분데스리가 8회 우승, UCL 1회 우승에 기여하였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Mehmet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메수트 외질, 일카이 귄도간, 엠레 잔 등과 같은 튀르키예계 독일인이다. 정확히는 튀르키예, 독일 혼혈이다. 1970년 10월 16일, 카를스루에에서 튀르키예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메흐메트 토비아스 위크셀(Mehmet Tobias Yüksel)이다. 5세 때 부모님이 이혼했고, 이후 양육권을 가졌던 어머니와 살다가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새아버지의 성인 숄(Scholl)이라는 독일식 성을 쓰게 되었다. 지역 유스팀 SV Nordwest Karlsruhe와 카를스루어 SC에서 성장해 89년 퍼스트팀으로 콜업되어 첫 해 3경기에 출장했다. 1990년 4월 21일 쾰른전에서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가졌고, 이 경기에서 데뷔골까지 넣었다. 이후 주전으로 도약해 55경기 10골을 터뜨렸고, 이 활약을 지켜본 바이에른 뮌헨이 당시로서는 적지 않은 금액인 250만 유로를 비드해 92-93 시즌을 앞두고 바이에른에 합류한다.

2.1.1. FC 바이에른 뮌헨

파일:850full-mehmet-scholl.jpg

조반니 트라파토니, 오토 레하겔 등의 감독이 거쳐갔던 뮌헨으로써는 이 당시는 썩 좋지 않은 FC 할리우드 시절이었지만 숄은 이적 첫시즌 31경기 7골을 넣는 활약을 펼쳤고, 그 다음 시즌도 27경기 11골을 기록하는 맹활약을 펼쳤다. 숄의 활약을 바탕으로 바이에른은 1994-95 시즌에 우승을 차지해 마이스터샬레를 탈환해오는데 성공한다. 95-96 시즌 뮌헨은 또다시 죽을 쒔지만 꾸역꾸역 UEFA컵을 우승했고, 숄도 여전히 출중한 기량을 보여줬다.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95년에 처음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고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하차한 마리오 바슬러를 대신해 유로 1996에서 주전 중앙미드필더로 파격 기용되었고 잉글랜드와의 4강전, 체코와의 결승전에 연이어 활약하며 조국 독일의 우승에 기여하였다. 다만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는 대회전에 장기부상을 당해 독일의 무기력한 탈락을 지켜봐야했으며, 이어지는 98-99 시즌에도 오트마어 히츠펠트의 부임 후 뮌헨은 분데스리가와 리가포칼을 동시에 들어올렸고 12년만에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라 준우승을 거뒀지만 부상여파로 13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다.

1999-00 시즌, 부상을 떨쳐낸 숄은 다시 폼을 되찾았고 뮌헨은 다시 한번 리가를 제패했지만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합계 8대3으로 대파했던 레알 마드리드에게 1,2차전 합계 3대2로 패배해 4강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연이어 열린 유로 2000에 모처럼 유리몸 결석자 이미지를 떨치고 독일 국대의 에이스로 출전했으나, 루마니아전의 호쾌한 중거리슛 한방으로 팀의 유일한 무승부를 끌어낸 것이 전부였다. 플레이 질적인 측면에서는 눈물겨울 정도로 홀로 고군분투했으나, 과거 1990 월드컵, 유로 1996 우승 멤버들이 일거에 은퇴하며 자동문 수준이 되어버린 수비진의 한계로 당시 하향세이던 라이벌 잉글랜드에게 0대1로 패배하고 루이스 피구, 세르지우 콘세이상, 후이 코스타 등 골든 제네레이션의 포르투갈에게마저 0대3으로 완패하는 등 팀은 조별리그에서 역사적 사건 수준의 광탈을 당하고 만다.

이 충격으로 독일 대표팀 감독이 루디 푈러로 교체되었고, 푈러호의 오프닝 기념차 열린 스페인과의 A매치에서 벽을 이리세우고 저리세우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스페인 수비진들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환상적인 프리킥을 포함해 2골을 넣으며 독일의 4대1 대승을 이끌었다.(2000년대 초반 온갖 흑역사에 가려진 대승리..) 이런 걸 보아 숄이 계속 정상적인 폼으로 국제대회에 나왔다면 당시 독일이 더 좋은 성적을 냈으리라는 추측도 무리는 아니다.

이처럼 2000-01 시즌은 그야말로 숄의 전성기였다. 리그 9골, 챔피언스리그 5골이라는 맹활약과 더불어 팀의 3연속 분데스리가 제패와 25년만의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2001-02 시즌, 숄은 여전한 폼을 보여줬지만 팀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마이스터샬레를 내줬고 포칼은 지난 시즌 극적으로 우승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샬케 04에게 내줬다. 챔스에서는 또 지긋지긋하게 만나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합계점수에서 3대2로 패했다. 또 메이저 대회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장기부상을 당한다. 이 시즌을 끝으로 숄은 독일 대표팀에서 쓸쓸히 은퇴한다. 결국 메이저 대회 직전마다 부상당했던 숄은 커리어상 월드컵 출전은 통산 0경기로 남고야 말았다. 숄이 국내에서 인지도가 바닥인것도 이렇듯 월드컵 출전을 부상으로 한 경기도 못했기 때문. 만약에 2002 월드컵에 출전해서 나왔다면 대한민국 내에서 그의 인지도는 지금보다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그나마 조국 독일이 이런 암울한 부상악령을 딛고 준우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으로 위안삼아야 했다.

이후 02-03, 03-04 시즌도 숄에게는 힘든 시간이 계속되었다. 부상여파와 되풀이되는 부상재발로 시즌 한자리수 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고, 이런 메멧 숄이 빠지자 팀도 창조성이 있는 테크니션을 잃으며 공격전개도 단조로워지고 이는 유럽대항전에서의 유례없는 부진으로 이어졌다. 아르연 로번이 합류하고 슈바인슈타이거가 중앙미드필더로 포변한 2009-10 시즌 전까지 바이에른은 01-02 시즌을 마지막을 챔스 8강 이상을 뚫지 못하는 부진이 이어졌다.

펠릭스 마가트 감독 부임 이후 숄은 적지않은 나이와 부상여파, 후배들의 성장 등을 고려해 선발보다는 주로 슈퍼조커 역할을 많이 맡았다. 백전노장인데다 워낙 축구센스가 좋다보니 나올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다보니 팬들은 더더욱 그놈의 부상이 안타까울 따름. 하산 살리하미지치와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오언 하그리브스 등의 멘토이자 팀의 최고참으로 제 역할을 다해주던 숄은 결국 2006-07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전 친선경기에서 옛 No.7인 숄이 새 No.7인 프랑크 리베리와 교체되어 포옹하는 장면은 감동 그 자체.

1992~2007 15시즌 동안 8회의 분데스리가 우승, 5회의 DFB-포칼 우승, 각각 1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과 UEFA컵 우승, 그리고 유로 1996 우승이라는 전설적인 행보를 끝으로 숄은 그라운드를 떠났다.

이런 그의 행보로 숄은 역대 단 15명밖에 없는 바이에른 뮌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5년 팬들의 투표를 통해 구단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 11을 뽑는 자리에서 측면 미드필더 자리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2.2. 국가대표

이렇게 뛰어난 클래스를 자랑하는 선수임에도 국가대표 경력은 고작 36경기 밖에 되지 않는데 이유는 고질적인 유리몸 이기에 월드컵에 출전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래도 유럽 선수권 대회는 두 번 출전했는데 영광의 유로 1996 우승 맴버로 그리고 4년 뒤 암흑기의 유로 2000에서의 출전이 그의 국제 메이저 대회 출전 기록이다. 그래도 국가대표에 나왔다 하면 평타 이상의 뛰어난 클래스를 보여주었는데 유로 2000 루마니아전 기습 중거리포 골과, 특히 2000년 8월 열린 스페인과의 친선전에서 4 : 1로 완파할 때 숄이 보여준 프리킥 선제골은 일품이였다.

3. 플레이 스타일


프랑크 리베리 이전 바이에른의 No. 7의 상징적인 존재였으며, 무려 15년간 바이에른 뮌헨과 영광의 시대를 함께하며 334경기 87골의 기록을 남겼다. 주 포지션은 사이드 미드필더지만 중앙 미드필더도 소화가 가능할 정도로 전술 이해도도 뛰어났다. 또한 볼 키핑 능력이 좋아 탈압박에도 능했으며 무엇보다 숄의 최대 장점은 정확한 킥력, 뛰어난 프리킥 스페셜리스트였으며 인플레이 상황에서의 중거리 슛 능력도 매우 뛰어났다. 또 신장이 큰 편이 아님에도 헤딩능력도 좋았고 라인 브레이킹 능력도 좋아 크랙으로써의 기질도 뛰어났다. 이런 숄의 치명적인 단점은 유리몸이었다는 점. 그랬기에 국가대표 출전기록이 36경기 밖에 안되며 뮌헨에서도 15년간 출장기록이 고작(?) 334경기인것에서 짐작했을 것이다.

다만 37세의 나이까지 현역으로 활동할 정도로 프로페셔널 했으며, 유리몸이였지만 피치 위에 복귀했을 때 변함없는 실력을 보여주며 바이언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선수다.[2]

4. 은퇴 이후

은퇴 이후에는 지도자와 축구 해설가의 길을 걸으며 축구계를 떠나지 않았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는 바이에른뮌헨 U-13팀의 감독을 맡았고, 2009년부터 2010년까지는 바이에른 뮌헨 B팀의 감독도 맡았지만 8승 10무 23패, 19.51% 승률의 처참한 기록을 세우며 사임하였다. 이후 뮌헨 B팀이 더 죽을 쑤자 다시 팀 코치로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복귀해서 21승 10무 7패, 55.16%의 승률을 기록하며 양호한 성적을 내었다.

분데스리가 경기나 독일이 출전하는 주요 메이저 대회에도 심심찮게 숄의 해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3]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개인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89/90 카를스루어 SC 분데스리가 3 1 0 0 - -
1990/91 카를스루어 SC 분데스리가 27 6 1 0 - -
1991/92 카를스루어 SC 분데스리가 28 4 2 1 - -
1992/93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1 7 2 0 - -
1993/94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7 11 2 1 4 1
1994/95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1 9 1 0 10 3
1995/96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0 10 2 0 11 5
1996/97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3 5 3 1 2 0
1997/98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32 9 6 2 8 0
1998/99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13 4 2 0 3 0
1999/00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5 6 3 1 12 3
2000/01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9 9 1 1 16 5
2001/02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18 6 3 1 2 0
2002/03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18 4 4 0 4 0
2003/04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5 0 2 1 1 0
2004/05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0 3 2 1 5 1
2005/06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18 3 3 2 6 0
2006/07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14 1 1 0 4 0

6. 여담

현재 그의 아들인 루카스 숄바이에른 뮌헨 유스팀에서 뛰고 있다.

공식적으로는 무종교 신자이지만, 언젠가부터 불교에 상당히 심취해 있다고 한다.


[1] 튀르키예식 이름은 메흐메트 토비아스 윅셀(Mehmet Tobias Yüksel).[2] 비슷한 유형의 선수로 체코토마스 로시츠키를 들 수 있다.[3] ARD 전속 해설자라서 ARD에서 중계해주는 경기에는 늘 나오는 편. 참고로 ZDF 전속은 올리버 칸.